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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3 - 휴가 ㅣ 어떤 날 3
김소연 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8월
평점 :

// 회사 메신저에 '오프라인'이 제법 보였다. 휴가철이었다.
지금껏 프리랜서로 지내며 따로 '휴가철' '휴가'라는 걸 챙겨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가철'이 영 낯설다.
평소에는 출근길에 훌쩍 눈에 띄는 지하철 역에 내려 달아나 보고 싶기도 하고,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기 위해 출근을 포기하고 '반차'를 쓰고 싶기도 하고 그렇더니, 막상 정정당당하게 '달아나도' 되는 휴가 앞에서, 어리둥절. (역시, 멍석 깔아주면...)
누가 휴가 안 가느냐고 물어도, 딱히 갈 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고, 어쩌고 할 뿐, 휴가 계획도 없다.
아, 휴가인데... 처음으로 내 앞으로 주어진 '휴가철'을 맞았는데...!
이 책에 박연준 시인이 쓴 것처럼,
"우연히 한 다발의 돈을 얻은 가난뱅이가 돈 쓰는 방법을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지나가는 좀도둑에게 돈을 몽땅 빼앗긴 꼴과 같"아진 심정이라니!
그렇게 내 앞에 주어진 휴가철에 속수무책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어떤 날』 3권이 나왔다. 이번 호의 테마는, '휴가休暇'.
깔아 놓은 멍석 앞에서 멍 때리고 있는 내 마음에, 이 책을 처방한다.
휴가는 행복을 더이상 유예시키지 않아도 되며, 지금 이 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아도 된다는 허락이다. 나의 오늘이 어제와 분명히 다름을 선언하고, 비로소 내 의지대로 주어진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더이상 보이지 않는 도둑에게 귀한 것들을 빼앗긴 채 찡그리고 살 순 없다. 휴가는 '인생'이란 큰 덩어리에 갈라진 틈, 어떤 '사이'에 도착하는 것이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목적의식 없이 순간 속에 자연스럽게 머물거나 스밀 수 있다. 쉬자. 주먹을 펴고, 욕심과 걱정에서 놓여나자. 나는 가벼워지고 내 삶은 더 말랑하고 행복해지리라.
_ 박연준 '보이지 않는 도둑이 훔쳐간 것들'
// 이번 호에서도 내 마음을 '훔쳐간' 박연준 시인의 글!
(『어떤 날』을 1호부터 3호까지 꾸준히 챙겨 보고 있는 애독자로서, 박연준 시인의 글, 특히나 반갑고 참 고맙다.)
내 마음을 훔쳐간 박연준 시인의 문장이 어디 이뿐인가?
내가 도둑맞은 게 어디 이뿐인가? 내 2013년의 시작은 어디로 갔을까? 호기로운 다짐들, 신나게 계획했던 여행들은? 나이가 들수록 오늘이 어제 같고, 올해가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자각하게 된다. 어제와 오늘이 완전히 새로운 날이란 사실, 오늘은 내가 '생전 처음 겪는 하루'란 사실을 잊고 산다. 어떻게 이런 자명한 사실을 눈뜬장님처럼 못 보고 살았을까?
_ 박연준 '보이지 않는 도둑이 훔쳐간 것들'
// 이 책을 읽으며 '휴가'를 엄청 갈망하며 '나도 당장 휴가 갈 테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 마음은 우선 뒷일이고,
책 속 문장들에 빠져들어, 이 책과 보낸 시간 시간이 그냥 휴가 같았다. 제대로, 북캉스.
그래도 이런 문장들에는, 앉은 그 자리에서 짐 꾸리고 싶어져 마음이 마구 간질간질해지지...
문득 작은 도발을 하고 싶은 날이 있다. 출근을 하다가 문득 핸들을 돌려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진다든지, 친구를 만났다가 그 길로 같이 춘천 가는 기차를 탄다든지, 밤하늘이 예뻐서 이름 모를 시골로 무작정 향한다든지……. 하지만 그건 늘 공상에 그치고 만다. 마음속으로만 '언젠가' 저지르고 말 거라고 다짐만 하고 살아온 인생이다. 하지만 그 언젠가가 바로 오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저지르지 않는 한 '언젠가'는 내 머릿속에만 있을 뿐,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떠나기로 했다.
_ 위서현 '푸른 곳에 마음 풀다'
// 다들 작은 도발을 꿈꾸며 살겠지...?
누군가는 저지르지 않고 '언젠가는...'만 되뇌고, 누군가는 문득 '떠나기로' 한다.
이 도발적인 떠남이, 참 매력적이다.
휴가철 앞에서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고 했지만,
나도 세워둔 여행 계획은 있다. 10월의 시작과 함께 만나게 될 나의 대만...!
대만 여행 계획하고 비행기 티켓과 숙소 예약을 하고 참 들떴는데, 갑자기 '계획'이라는 한 고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도, '도발'처럼, '일탈'처럼,
문득 떠나고 싶었던 거다.
그냥 아무 때고, '오늘은 휴가를 내겠어요~' 하고 훌쩍, 나만의 휴가를 즐기러 떠나고 싶었던 거다.
이 책은 내 마음에 '휴가'를 심어주기도 했지만, 그보다 '도발', '일탈' 을 더 크게 심어주었다.
앞으로도 정해진 휴가철에 계획을 세워 어딘가로 떠나기 보다는 문득, 불현듯, 갑자기, 홀연히, 그렇게 회사 메신저를 '오프라인'으로 만들어버리고 떠나겠다... (응? 무슨, 선전포고 하듯이...;;)
// 어떤 날, 어떤 문장.
다녀오면 후유증으로 현실이 더 빠듯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일탈을 꿈꾸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친다.
어딘가로 떠날 이들의 설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운인 것 같다.
_ 박세연 「휴가」
문득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어. 뭉개진 발끝으로 거대한 몸뚱어리를 이끌고 저기에서 여기로 걸어 나오는 것.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이동하는 것. 그게 오늘을 살아 견디는 일이 아닐까? 이 땅 위에 꼿꼿하게 걸어가. 살아, 살아가. 그 발이 감동스러워. 이 몸뚱이로 오늘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일렁여 눈시울이 뜨거워져.
_ 김민채 「동경東京」
살다보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할 때가 있다. 갑자기 모든 게 끝나버린 것 같아서 절망스러울 때도 있고, 때로는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아 답답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순간이 남김없이 나의 삶이라는 사실이다. 멈춰 있는 시간도 소중한 삶의 순간들이고, 주저앉아 있는 동안도 똑같이 귀중한 내 삶의 순간들이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아 무의미해 보이는 순간들이 어쩌면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방황하고 부유하는 그 시간들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_ 위서현 「푸른 곳에 마음 풀다」
모든 여행자란 어느 순간에도 아름다운 존재다. 알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그대의 용기란 언제나 근사하니까. 길 위에 선 우리라 아름다우니까……. 삶이라는 길 위의 모든 여행자에게 브라보!
_ 위서현 「푸른 곳에 마음 풀다」
슬픔과 눈물은 가끔씩이라도 소모해야 좋다는 생각이다.
슬픔과 눈물이 쌓이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기 전에 미리 덜어내고 운 다음 볕에 잘 말려 뽀송하게 살펴주어야 한다. 성가시지만 마음이란 게, 그렇다.
그러니 이런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말고 우는 거다. 휴가의 다른 말이 힐링이라면, 눈물의 소모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테니까.
_ 장연정 「휴가에 관한 몇 개의 말풍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