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지인과 함께 창 넓은 카페에 앉아 점심으로 빵과 커피를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완전 초록초록할 때 오면 이 자리 정말 끝내주겠다, 그때는 여기 자리 잡기 치열할걸, 그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지인의 바지.

'패피(패션 피플)'인 그이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대로 '롤업한 팬츠'를 입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롤업'을 떠올리며 내가 정작 내뱉은 말은, "요즘 이거 유행이라며, 바지 접어 입는 거".

내 말을 받는 지인의 대답은, "응, 롤업".

"나도 롤업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패션 고자'인 내가 롤업이라고 하려니까 넘 웃겨서 '바지 접어 입는 거'라고 말했어. 아아, 내게는 '롤업'이 '하기 힘든 말'이야!"

역시 마스다 미리의 애독자인 그이와는 그뒤로 각자의 '하기 힘든 말'들에 대한 수다를 나누며 깔깔거렸다.

 

줄곧 격한 공감 / 묘한 공감 / 비밀스러운 공감 /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공감(^^) 등등등 각종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으로 내 마음을 톡톡 건드려온 마스다 미리. 최근에 연달아 만난 두 권의 책, 『하기 힘든 말』『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역시 그랬다.

그리고 이 책들에 공감하며 나는 묘한 깨달음이랄까, 그런 걸 얻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하기 힘든 말이 많아지면서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라는 것.

문득 문득, 내가 어느새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는데, 나에게는 하기 힘든 말이 많아진 것도 그중 하나.

 

 

 

 

어쩌면 그것은, '세대차이'라는 말로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전에는 어른들을 보며 '세대차이'를 떠올렸던 내가, 이제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보며 '세대차이'를 떠올리다니.

 

친구가 아이를 낳고 그애가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늘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애들은 조끼나 폴라티 같은 말은 안 쓰겠구나.'

내 어린 시절, 베스트는 조끼였고 터틀넥 스웨터는 폴라티였다. 그외에 다른 이름이 생겨나는 미래 따윈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끼는 베스트로, 폴라티는 터틀넥으로 바뀌어버렸다. _ 『하기 힘든 말』 (18)

 

'터틀넥'은 내게도 '하기 힘든 말'. 나 역시 '폴라티' 세대였고, 어느 순간 스리슬쩍 바뀌어 있는 '터틀넥'에 나는 입을 내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목 있는 거 갑갑해서 못 입어."

'롤업'은 '바지 접어 입는 거'였으니 '터틀넥'은 뭐, '목 있는 거'. 하기 힘든 말을 하느니, 차라리 풀어서 말하는 걸 택하는 나.

 

어쩌면 그것은, '영어울렁증'에서 비롯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어는 내가 잘 못하는 것, 그러므로 영어로 된 말들은 내가 잘 못할 것들.

 

"서프라이즈 파티였어."

내가 처음 '서프라이즈'라는 말을 들은 것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짐작이 가는 것은 파티 앞에 구태여 '서프라이즈'라는 수식어를 붙였으니 단순한 파티는 아닐 거라는 정도였다.

(…)

친구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서프라이즈'라는 말을 써서 차마 그게 뭐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이 말이 다음과 같이 기억되었다.

서프라이즈 = 나 같은 영어치 인간이 쓰면 실수한다. _ 『하기 힘든 말』 (38)

 

어쩜 꼭 내 마음. 이 언니, 정말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글을 쓴 듯하기도 하지...

버라이어티, 스펙타클, 서스펜스... 다, 작가와 같은 이유로 내가 '하기 힘든 말'들. 나 같은 영어치 인간이 쓰면 실수한다!

 

 

 

이번에 마스다 미리 책을 연달아 두 권 찾아 읽은 건, 어지러운 심사 때문이었다. 마음이 복잡해서 '기분 전환 스위치'가 필요했다.

평소 내게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수많은 공감들을 안겨준 마스다 미리의 책이라면 어떤 면에서든 분명히 내 마음을 달래줄 거라는 생각, 어쩌면 믿음.

 

뭐가 어떻게 된 건 아니지만, 이유 없이 이런저런 것들이 싫어질 때가 있다. 이런저런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이 싫어지는 것이다.

싫어졌다고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도 없다. 도망친다고 새롭고 멋진 내가 방글방글 웃으며 기다려줄 리도 없다. 나는 '나'의 몸속에만 있는 것이다.

(…)

부드럽게 노래 부르는 유키 씨를 보고 있으니 눈물이 나면서 또 마음이 좀 밝아졌다.

스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힘이란 역시 대단하구나.

나는 '나'의 몸속에서 감동했다. 그러나 그건 이런저런 일들이 있겠지만 힘을 내서 잘해보자! 라고 생각하는 '나'가 항상 기분 전환할 기회를 찾고 있다가, 옳지, 이번엔 이거야! 하는 식으로 바깥 세상에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_ '기분 전환 스위치'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134~135)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힘이란 역시 대단하구나.

옳지, 이번엔 이거야! 나는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에 기꺼이, 격하게 반응했고, 딸깍, '기분 전환 스위치'는 켜졌다.

마스다 미리가 '부드럽게 노래 부르는 유키 씨'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마음이 밝아진 것처럼,

나는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마스다 미리의 글을 읽으며 어느새 마음이 밝아졌고, 박시환의 노래를 들으며 '스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힘'을 제대로 받았고, 늘 '기분 전환할 기회를 찾고 있다가' 봄날의 산책에 깊이 반응했고, 주말에는 그 산책에 나의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동행한다.

아직도 내 삶에는 '기분 전환 스위치' 딸깍, 올려주는 존재들 많아 참 다행이다.

 

 

 

 

 

나는 시원시원한 사람도, 줏대 있는 사람도, 온화한 사람도,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도,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사람도, 겉과 속이 같은 솔직한 사람도, 다른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호쾌하고 대담한 사람도 아니다. 거듭거듭 유감스럽다…… 내 성격 중에서 싫어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몇 가지 좋아하는 부분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간다.

내 성격 중에 마음에 드는 부분.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내 전부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가장 좋아한다. 어째서 흔들림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믿음이 있어서 쓰러지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을 믿는 것도 중요하다. _ '내 성격'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201~211)

 

마스다 미리가 쓴 것과 꼭 같은 성격을 가진 나.

 

내 성격 중에 마음에 드는 부분,은

'귀가 얇아서 누군가가 쓴 긍정적인 문장들에 금세 가슴이 팔랑거린다.'

그런 얇은 귀와 긍정 기운을 강하게 흡입하는 심장과 나만의 '기분 전환 스위치'를 찾아내는 탐지 능력(?) 덕분에 오늘도 나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어간다.

 

 

 

+ 문득 문득, 내가 어느새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느낀 또다른 '말'들.

_ 잔소리가 많아지면서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에게 잔소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ㅜ.ㅡ)

_ 욕이 많아지면서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_-;; 지옥 같은 출퇴근 지하철에서 속으로 욱하며 욕을 내뱉을 때가 많아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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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7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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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7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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