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의 『유령 퇴장』을 읽던 중이었습니다.

책 읽다 삼천포로 빠지기 좋아하는 저는, 또, 좀 다른 방향으로 한 캐릭터를 주목합니다.

 

 

 

 

 

 

"자넨 제이미의 학교에 대해 많이 아는군. 제이미가 살았던 도시도 그렇고."

"반한 거죠."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반했거든요. 저는 제이미가 가진 배경의 노예예요." (108)

 

 

일흔이 넘은 주커먼이 자신보다 마흔 살이나 어린 제이미에게 한눈에 반해,

제이미의 남편인 빌리에게 '슬쩍' 제이미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물론 빌리는 이 노인네가 '흑심' 같은 걸 품고 자기 아내에 대해 물어볼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지요.)

그런데, 이 남자 빌리, '슬쩍' 물어본 질문에 대한 대답치고는, 정말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더라고요.

제이미에 대해 아는 게 정말 많은 거죠. 반했으니까요. 정말 반했으니까요.

 

 

나는 그저 그녀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청했을 뿐인데, 무슨 장대한 건축물에 바치는 헌정사로나 적당할 열변을 듣게 되었다. 그처럼 충실하고 애정 어린 행동이 이상할 건 없었다. 불같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란 곳이라면 버펄로 같은 도시도 도원경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제이미와 제이미가 텍사스에서 보낸 소녀 시절에 대한 그의 열정은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마치 그가 감옥 안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혹은, 내가 감옥 안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제이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거나. 그것은 남성이 보여줄 수 있는 헌신의 걸작 반열에 들 만했다. 아내에 대한 숭배는 그를 삶에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끈이었다. (102~103)

 

 

'장대한 건축물에 바치는 헌정사로나 적당할 열변'은

101쪽의 "그럼 제이미, 제이미는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나?" 하는 질문 한마디에서 촉발되어, 무려,

110쪽에 가서야 '제가 반한 여자가 이런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여자하고 결혼한 거예요. 제이미는 이런 여잡니다.'라는 문장에 이르러 끝을 맺어요. *_*

중간중간 주커먼이 추임새를 넣었다고 해도 여튼,

 

아홉 쪽 가까이 자기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남자,

제가 반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또다른 한 커플,

신경숙 작가님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나오는 정윤과 단.

 

 

 

 

 

 

 

  ㅡ 언제부터 거미를 무서워했어?

  ㅡ 오래됐어.

  ㅡ 근데 왜 내가 몰랐지?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성장했는데도 단이가 거미를 그리 두려워하는 줄을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ㅡ 모를 수밖에.

  ㅡ 응? 무슨 큰 비밀이었어?

  ㅡ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모르는 거야.

  거미를 밟을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단이의 등을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나.를.사.랑.하.지.않.으.니.까, 라는 말이 낙숫물처럼 내 가슴속에 똑똑 떨어졌다. (42)

 

 

 

정.윤.은.단.을.사.랑.하.지.않.으.니.까,

단이 거미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잖아요.

아마, 단에게 정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면,

단도 아홉 쪽 정도는 거뜬히 이야기 들려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언젠가, 거센 시위가 지나간 뒤,

신발도 가방도 잃어버린 정윤 앞에 나타나, 정윤의 신발과 가방의 모양새를 척척 맞추며,

네 거니까 다 안다고 말하던 명서처럼요.

 

 

 

『유령 퇴장』 읽다가,

누군가를 그만큼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만큼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차이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떠올라 끼적끼적.

 

아, 그런데 『유령 퇴장』 말이에요,

『에브리맨』에서 봤던, '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라던 그 문장도 자꾸 떠올리게 하고요.

나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노년에 대한 묘사에 왠지 자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기도...

전립선 수술을 한 후 요실금 증세가 생긴, 그리고 '아주 소중한 걸 빼앗겨버린' 일흔한 살의 노인에게 찾아온 사랑은,

아, 무지 잔인한 듯해요.

 

 

그_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지.

그녀_ 왜요?

그_ 왜라고 생각하나? 자넨 작가야. 작가가 되고 싶어해. 일흔한 살이나 먹은 남자가 이런 상황에서 왜 가슴이 찢어질 것 같겠나?

그녀_ (조심스럽게) 그 모든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었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에요.

그_ 바로 맞혔네.

그녀_ 하지만 이 상황도 즐겁잖아요, 아닌가요?

그_ 온갖 아픔이 주는 즐거움이지. (179)

 

 

"인생의 황혼기에 찾아오는 위대한 사랑은 모든 것과 엇갈린다."

 

 

자꾸 두서없이 길어지네...

수다니까. 수다니까요. 수다잖아요. ㅋㅋ

 

 

 

한줄 결론:

 

필립 로스의 『유령 퇴장』,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며 읽고 있는 책입니다. -끝-

 

 

 

 

이라고 하고 가려고 했는데, 그 '정말 많은 생각'에 하나 더 보태...고...가야...겠습...니다...

 

 

그녀_ (……) 우리에게 이젠 단순히 적만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우릴 보호해줘야 할 사람들, 그들이 우리의 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우릴 돌봐줘야 할 사람들, 그들이 우리의 적이 되어버렸다고요. 절 두렵게 만드는 건 알카에다가 아니에요. 바로 우리 정부죠. 

그_ 알카에다가 무섭지 않다고? 테러리스트를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녀_ 두려워요. 하지만 더 심층에 있는 공포감은 내 편이어야 할 사람들 때문에 생겨나는 거예요. (169)

 

 

그(그녀)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차이이기도,

에서 시작하여,

노년의 대학살을 거쳐,

심층에 있는 공포감까지,

떠들고,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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