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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운 서른 - 흘러가다 잠시 멈추는 시간,서른
김종길 외 지음 / 버티고 / 2008년 5월
평점 :
서른 이후, 참 많이 앓는다.
마음이 앓아 몸이 앓는 것인지, 몸이 앓아 마음이 앓는 것인지, 아니면 몸과 마음이 동시에 앓는 것인지,
여튼, 앓는 만큼 성숙하는 게 아니라, 앓는 만큼 서러운, 삼십 대를 보내고, 아니 견디고 있다.
설운 서른.
제목부터 이보다 더 끌릴 수는 없는 시집이었다.
나 서럽다고, 나 좀 달래달라고, 투정부리는 심정이기도 했고,
너도 서럽냐고, 너의 설움을 좀 들려달라고, 매달리는 심정이기도 했고,
그렇게 만났다.
깊은 밤이었고, 자동차 소리가 아닌 진짜 파도 소리가 들려왔고(나는 종종 자동차 달리는 소리를 파도 소리로 듣곤 한다...)
해변의 가로등과 작은 손전등에 기대어 세로로 쓰여진 시를 한 줄 한 줄 더듬어 갔다.
그러고 보니, 내 생애 최초의 세로 읽기였다.
세로로 쓰여진 시들은 시구 그 자체가 전해오는 공감 혹은 감동 혹은 그 무엇을 넘어선 다른 느낌이 있었다.
익숙한 가로 쓰기에서 벗어나 조금 더 공들여 한 자 한 자, 한 단어 한 단어, 한 행 한 행 읽으며 시와 더 오랜 시간 나누는 마음들.
첫 시는 내게도 무척 익숙한 황인숙의 「강」이었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 (……) /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 당신이 직접 /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 강가에서는 우리 / 눈도 마주치지 말자.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종종 바다를 떠올리곤 했다. 강보다 바다가 내게 더 푸근해서인지,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토로하려면, 강보다는 바다일 것 같았다. 차라리 바다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바다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그런 바다에서 이 시를 만나니, 왠지 첫 장부터 울컥. 더 서러워졌다...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믐까지 이어졌다 // (……) //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이었다 _ 이기선, 「삼십 대의 病歷」 부분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이라는 것도 있다니. 그런 시절 속에 내가 있다니...
의사의 "신경성 같네요..."라는 진단보다 더 믿음 가고 수긍 가는 진단이다.
이 시절은,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는 시절이에요, 그냥, 마음껏 앓으세요, 앓을 만큼 앓으세요, 라고 왜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 밤, 이 시를 읽으며 괜히 조금 더 앓고 싶어졌고 앓아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시절 속에 있으니까.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는 그런 시절 속에...
이 시를 함께 읽은 이가 이런 댓글을 남겨주었다.
'앓을 만큼 앓고 나면 병의 깊이 만큼 세상이 깊고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 있어요.'
그 이의 말을 믿는다. 언젠가, 세상이 그만큼 깊고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말을.
서른 고개를 넘으면 / 더 넓은 땅이 보이리라 생각했다. / 아니 최소한 가로막힌 언덕이라도 / 명료해지길 기대했다. / 강을 따라 구비구비 흐를 수 없다면 / 소낙비처럼 어딘가에 스며들기를 바랐다. / 가을 들판의 곡식들이 바람에 흔들리듯 / 너무 뿌리를 고집하지 않더라도 / 밑동의 상처만은 더 옹골차게 키우고 싶었다. // 서른이 되기 전엔 / 내가 누군가의 밥이 되기를 은근히 원했다. / 밥풀데기 몇이라도 그들의 핏속에 녹아들길 / 설익은 밥이라도 포식하고 / 누가 잠시 비를 피할 처마라면 좋겠다고. // (……) // 서른, / 아직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고 / 귀를 먹기에는 너무나 많은 세상의 옹알거림이 / 고통의 연못에서 보글거린다. // 서른, 이것은 어떤 화살표에 관통당한 / 독설인가. _ 손현철, 「서른 고개 ㅡ 95년 7월, 만 서른이 되다」 부분
나도 서른이면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준비는 하지 않았고, 막연히 기대했고, 기다림의 결과를 얻지 못했고, 실망했고, 결론은 다시, 서럽게 앓았다.
이 시를 읽으며 나보다 먼저 서른이 된 누군가가 그 시절 '고통의 연못에서 보글거'렸던 길을 내가 따라 걷고 있구나, 그 이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 맞춰가며, 발자국 하나 하나 비슷한 마음을 실어가며 나도 같은 걸음 옮기고 있구나... 생각하니 나는 또 조금 더 괜찮아졌다.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라, '나만 그런 게 아니면 돼!' 싶은 걸까.
다른 누군가의 발자국이 이미 남겨진 길이니까, 적어도 이전만큼 황망하거나 두렵지는 않은 기분이다. 서로의 출구는 다르겠지만, 얼마 간은 같은 길 걸어간 누군가 있었고, 또 같은 길 걷고 있을 누군가 있고, 또 같은 길 걸어 갈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잠시 안도.
(……) 잘못 걸어온 나이가 막막하여 온몸을 떤다 /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안 된다며 / 허공의 뺨을 후려치는 선창의 깃발 / 맞는 건 허공인데 내 뺨이 더 아프다 / (……) / 그래, 너는 정말 잘못 살고 있어 / 파도가 입에 거품을 물고 나에게 충고한다 / 나의 개 같은 삶을 물어뜯으려고 / 이빨을 세워 부두에 기어오르는 파도 / 달빛이 튀는 얼음을 우두둑우두둑 밟으며 / 회한의 뼈가 부러지는 내 몸의 지진을 듣는다. _ 공광규, 「월미도」
위로와 안도 잠시 내려두고, 혼도 났다.
잔잔하게 들려오던 밤 바다의 파도 소리가 갑자기 거세진 느낌이었다. 나의 뺨을 후려치려고 갑자기 맹렬히 흔들리는 선창의 깃발, 같은 것은 없었지만, 깃발에 뺨을 몇 대 얻어 맞은 기분. 모래 위에 차르륵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이 다 내게 쏟아붓는 충고인 듯한 기분. 해변 내가 있는 곳 가까이까지 바득바득 기를 쓰고 달려오는 파도가 지금 내게 들려주고 싶은 말들 무엇인가, 움찔하며 제 발 저렸다.
파도는 아무렇지 않은데, 선창의 깃발도 나는 상관도 않는데, 나 혼자 발이 저려, 한참을 찌리리릿. 그러게, 잘 살지 그랬니...?
어쨌든, 나는 지금, 설운 서른, 하고도 둘.
'어찌 살아왔는지 어찌 살아갈 것인지'(오봉옥, 「이별」) 아직도 모르겠는, 그런 설운 서른, 하고도 둘.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겁고 쓸쓸한 나이 서른, 견딜 만큼은 견뎌야지 삶이란 걸 공짜로 살 수는 없지 않는가'(김경진, 「서른 살」).
'한 낮의 버스안에서 쇼핑백 터지듯 울음이 터'(김경미, 「시간 1」)지는 나지만, '갈 데까지 가보려거든 잠시 눈물로 마음 덥혀도 누가 흉보지 않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강연호, 「비단길 2」).
그러리라 믿는다.
나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안도현, 「모항으로 가는 길」)으니까.
그렇다고 믿으니까.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최승자, 「삼십 세」)!
설운 서른이여, 힘을 내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_ 최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