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들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일기를 쓸 걸 그랬다고, 나는 생각했다. 기억이 이토록 허망하게 유실되는 것인 줄 알았다면 일기를 쓸 걸 그랬다고. 과거에 대해 무엇도 상기해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자, 신분증을 잃어버린 것처럼 황망해졌다. _ 「고도리」 중

 

 

한때 나는 매일같이 일기를 썼었다. 초등학교 때는 숙제였으니까 밀린 일기까지 챙겨가며 꼬박꼬박,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어느날 내가 '아그네스'라 이름 붙인,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산 뒤로 매일매일 쓰고 싶어서, 그렇게 일기를 썼다. 숙제로 쓴 일기는 제외하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해까지 나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기를 썼다. (사실은, 몇 번 빼먹은 적이 있었다. 숙제도 아닌데, 그렇게 빼먹은 일기는 나중에 기억을 되살려 채워넣었다.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일기'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일기 쓰기를 그만 둔 것은, 할머니의 죽음이 내게 너무나 큰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다거나 그런 까닭은 아니었다. 다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쓰지 못한 3일의 일기를 채워 넣기가 힘들었다. 뭐라고 쓸 것인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나는 아직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아픔과 죄책감이 있다. 어찌되었든, 3일이나 이가 빠져버린 일기장은 나의 '개근 정신'을 시들하게 했고, 그 후 나는 일 년에 며칠, 생각날 때만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장 속에는, 일기에 적지 않았더라면 결코 떠올리지 못 했을 수많은 추억과 기쁨과 슬픔과 반항과 사랑과 자기 혐오가 나만큼이나 못난 글씨로 담겨 있다. 가끔 일기장을 펼쳐보면 그 시절 내 모습에 혼자 얼굴 붉히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도 민망해 고개를 세차게 저어 기억을 떨쳐버리려 하기도 하고, 이런 행복한 날도 있었지 싶어 괜히 가슴 두근거리기도 한다. ('이런 걸 내가 썼단 말이야?' 뿌듯해지는 문장도 1년치에 하루이틀쯤 보이기도 한다.) 내가 잊고 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는 '재미'가 있지만 나는 일기장을 웬만하면 꺼내보지 않는다. 그 안에는, 아픈 내가 너무 많다. 열등감과 외로움으로 똘똘 뭉쳐 세상에 대해 온통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있던 내 모습을, 이렇게 과거의 일기장을 통해 확인하는 순간이, 나는 지금도 아프다. 덤덤해질 수 없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이기에. 그런 나를 떠올릴 때면, 차라리 '신분증'을 잃어버리고 싶어진다. 과거의 내가 어떠했는지, 지금의 내가 어떠한지, 나조차도 나를 잊고, '나는 이런 사람이었겠거니'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다시 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지기도 한다. 일기를 쓰지 말 걸 그랬다고, 나는 생각했다. 일기가 이토록 아프게 열등감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인 줄 알았다면 일기를 쓰지 말 걸 그랬다고. 과거에 대해 무엇도 상기해내지 못하게 되더라도, 허전해하지 않겠다고.

 

애써 펼쳐보려 하지 않던 일기장이, 예고 없이 내 앞에 펼쳐졌다. 한때, 특히 사춘기 시절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열등감을 낱낱이 상기시키며 나를 괴롭게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일기장'을 읽다가 조금 울었다. 그러다가 이 글을 쓴 이를 떠올려봤다. 하재영. 두 권의 책으로 만난 작가. 전작 『스캔들』에서도 차마 몇 쪽 몇째 줄이라고 밝히기 뭐한 부분에 밑줄 그으며 '슬픈 공감'을 하게 했던 작가. 그녀와 나, 성질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그 깊이는 비슷한 열등감으로 마음이 일그러졌던 경험을 공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콤플렉스로 뭉쳐진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 역시 결핍을 만성질병처럼 끌어안고 사는, 그녀와 같은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이었다.'(「타인들의 타인-17세」) 설령 진실은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렇게 '오해'하며 '내 마음 아실 이'라고 진한 동지애 느끼고 싶었다. (나는 심지어 이런 문장에도 밑줄을 그었다. '예쁘지 않아서 슬펐던 적이 있다.' 예쁘지 않아서 슬픈 적이 많았기 때문에, 그 언젠가 눈물 자국 얼룩지게 썼던 일기가 생각났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내가 보이는' 그런 문장들에 밑줄을 많이 그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 사랑을 갈구하는 건 결핍감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결핍을 앓을 만한 환경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들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며 자랐다. 결핍이란 선천적으로 내장되는 것인지 모른다, 유전적 질병처럼. 결핍감은 열등감을, 열등감은 시기심을 낳는다. 늘 누군가가 부러웠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러움은 증오로, 자기혐오로, 자주 모습을 바꾸었다. 누군가를 부러워하게 되면 판단력이 마비되면서 분노가 치솟았다. 시기, 증오, 자기혐오는 같은 뿌리에서 자란 다른 모양의 열매였다. 한 아버지의 씨를 가지고 다른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부럽다 못해 미워진 사람은 동생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다가, 시기하다가, 증오하다가, 결국 스스로를 혐오했다. _ 「타인들의 타인-17세」 중

 

  내가 바라는 것은 이 고독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들키지 않기 위해 차가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 '너희가 말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라는 합리화. _ 「타인들의 타인-18세」

 

  나는 친구는 단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서고금의 문인과 철학자들의 말처럼 우정이 고귀한 것이라면 그것은 여러 사람에게 분할될 수 없다. 카사노바가 많은 여자를 안았다고 해서 그가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아직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면 안간힘을 써서 테두리 안에 들어간들 외로운 건 마찬가지다. 나는 그룹의 일원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타인들의 타인이 되기를 자청했다. _ 「타인들의 타인-18세」

 

안간힘을 써서 테두리 안에 들어간들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래도 그룹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다. '타인들의 타인'이 되기를 자청하지 못하고, '싸늘한 얼굴' 짓기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다정한 무리인 척, 그냥 그 속에 속해있고자 했다. 그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혼자일 때보다 더 지독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 그럴바에야 차라리, 그래, 차라리, '타인들의 타인'으로 지내는 편이 더 낫겠다. 어차피 그들도 내게는 '타인들'일 뿐이다.

 

겉으로는 다정한 '절친'이지만 속으로는 서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는(어쩌면 나만 혼자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친구들 '그룹'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 친구들」 읽으며 씁쓸한 웃음도 많이 흘렸다. 그래, 우린 그렇게 '좋은 친구들'이지, 하는 자조. "'자신의 방패막'을 만드는 데 급급해 타자와의 관계 맺기 자체를 포기해버"리고 "상처 받지 않는 대신 '그대로 멈춰버린 생'과 마주하고 있"('해설')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표제작 「달팽이들」에서는, 나 역시도 '그녀'처럼 나와 달팽이의 유사점을 발견했다. 바로 앞에 인용한 부분들. 정여울이 작품 해설에서 말하듯이 '하재영의 소설은 이렇듯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검열하며 끊임없이 자기 안의 결핍을 양산해내는 고독한 존재들을 그려낸다. 하재영의 인물들은 콤플렉스를 만성질병처럼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지금 하재영의 소설 속으로 걸어들어간데도, 하재영 소설 속의 인물이 소설 밖으로 걸어나와 내가 된데도, 삐걱거림 없이, 이질감 없이 금세 어우러질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도 '콤플렉스를 만성질병처럼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니까.

 

이 책에서 너무 '콤플렉스'만을 읽어내고 주목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글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닌데 하필이면 내게 와서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책으로 둔갑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읽었음에 만족한다. 대단히 만족한다. 비록 글을 읽는 동안 들쑤셔지는 열등감에 아팠을지라도, 이 책을 만나서 마음 한켠이 따스해진 것도 사실이다. 내 마음 읽어주는 소설,을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상자에 꼭꼭 넣어두고 꺼내보지 않는 내 일기장과 많이 닮은 마음이 담겨있는, 그래서 마치 내 일기장 꺼내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가지게 한 글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와 마음을 나눈 것이 하재영이든, 하재영이 허구로 그려낸 소설속 인물이든, 그 깊은 밤 나와 교감하고 서로의 상처 꺼내보여준 이 지기(知己)를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테다. 그리고 언제고 또 펼쳐 만나볼 테다. 앞으로 나올 작가의 책들을 기다리는 마음도, 그 설렘의 박자를 더해간다.

 

 

  바라는 건 달라도 모든 욕망의 밑바닥에는 타인의 시선이 있는 거 아닐까요? 나도, 당신도, 남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비치나 전전긍긍하는 나약함을 욕망으로 포장하고 있지 않나요? 외부로부터 강요받은 욕망을 내면에서 우러난 것이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고요? 혼자 밥 먹을 때 혼자가 아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것은 왜일까요? _ 「같이 밥 먹을래요?」

 

  모든 비행에는 이유가 있다. 담임의 말은 틀렸다. 내가 그랬던 건 오직 그러고 싶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같은 일을 겪었지만 나처럼 되지 않았다. 차압을 당하고 빚쟁이가 쳐들어와도 일일호프에 쫓아다니거나 도둑질하지 않았다. 나와 같이 쓰는 방에서 곱사등처럼 몸을 웅크린 채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모든 비행의 원인이 불운은 아니다. 모든 불운의 결과가 비행은 아니듯이. 어떤 비행에는 이유가 없다. 있다면 삐뚤어지고 싶은 욕망만이 이유다. _ 「고도리」

 

  후는 헌책방이라는 말 대신 오래된 책방이라는 말을 쓴다. 책은 새 것과 헌 것이 따로 있지 않다고, 누군가에 의해 펼쳐진 책과 펼쳐지지 않은 책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후를 만나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새 것과 헌 것으로 나눌 수 없음을, 어떤 것들은 그 분류로부터 비껴나 단지 낡거나 오래되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_ 「가장 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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