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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도 비행기를 타지 않은 150일간의 세계일주
세스 스티븐슨 지음, 윤미나 옮김 / 달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인천에서 중국 대련까지 비행 시간 1시간,
인천에서 중국 대련까지 항해 시간 18시간.
중국 대련에서 잠깐 유학생활을 했던 나는 방학 때 여러차례 한국과 중국을 오갔다.
그때 내가 선택했던 이동 수단은, 1시간의 짧은 비행이 아니라 18시간의 긴긴 항해.
처음에는 짐이 많아서, 비행기보다 배가 더 많은 짐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배를 탔던 건데, 한 번 타 보니, 이 열여덟 시간이 꽤나 매력적인 거다.
그 전에 단기 어학연수를 위해 비행기를 탔을 때는 한 시간만에 국경을 넘었다며 낯성 풍경 속에 나를 떨어뜨려 놓은 통에 도무지 내가 외국으로 왔다는 실감을 가지지 못했을 뿐더러, 그래도 이것도 '여행길'인데 그 어떤 운치라고는 없어 서운했다. 뭐, 이웃나라이니까. 국내선 타는 만큼만 타면 오는 거리구나, 생각하려 해도 뭔가 조금 아쉬운, 심심한 국경 넘기.
배는 달랐다. 그 무거운 짐을 낑낑대고 배로 옮겨 싣는 작업은 마치 부두 선적 노동자라도 되는 것 같아 "야, 다시는 배 안 탄다!!"라며 친구와 둘이 투덜투덜 칭얼칭얼거렸으나, 예약된 침대에 짐을 부려놓고 친구와 함께 갑판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쐴 때의 그 상쾌함은 짐 나르기의 수고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배 안에서 주말 오후에 하는 가요 프로그램을 보며 기다리고 있자니 서서히 배는 출발했고, 조금씩 조금씩 육지와 멀어져 어느 순간에는 그야말로 '망망대해'를 미끄러져가게 되었다. 친구도 나도 배는 처음 타본지라 마냥 신기하게 배 뒤로 화려하게 일어나는 물거품을 바라보며,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배 안의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이 열여덟 시간 항해의 '최고의 순간'이 펼쳐졌다. 하늘도 바다도 먹물을 풀어놓은 듯 까맣고 까맣기만한 시간. 그 경계도 구분이 가지 않는 하늘과 바다에 은빛 가루가 가득 흩뿌려졌다! 오래 전, 호주의 밤 초원을 달리다 만난 그 황홀했던 별 세상을 바다 위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마침 바닷물을 뜨러 내려온 것 같이 자리잡은 국자(북두칠성) 모습을 보며 신기해하고 몇 개 안 되는 아는 별자리 중 왕관자리가 더없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며 환호하며, 그야말로 내 생에 잊을 수 없는 밤, 밤바다, 밤하늘을 즐겼다.
책 읽고 리뷰 쓴답시고 앉아 쓸데없(다고만은 생각되지 않)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사랑한 그 열여덟 시간의 항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내가 배의 매력에 사로잡혀 비행기와는 작별하고 배만 타고 중국을 오간 것처럼, '일종의 로맨스'를 빼앗기는 빠른 속도의 이동에 염증을 느끼고,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황홀함'을 잊을 수 없었던 저자도 비행기 대신 배를 비롯한 다른 탈것만을 이용해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그 세계일주를 이렇게 유쾌상쾌한 이야기로 한 권의 책에 담았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세계를 한 바퀴 돈다는 건 생각만큼 혹은 생각도 못할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으로 실어다 줄 화물선을 찾는 일부터 시작해서 현지 국경일에 맞물려 극적으로 기차표를 구하는 일하며, 선실을 날려버릴 정도로 코를 골거나 객실을 마비 시킬 것 같은 냄새를 풍기는 다른 여행자들과 꼼짝없이 몇 시간 혹은 며칠을 함께 해야 하는 고욕, 까딱 잘못하면 예약해 놓은 크루즈를 놓치고 비행기를 타야 할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지경에서 파트너를 버려두고(?) 혼자 배에 탑승해야 했던 숨막히는 사건까지…… 그야말로 좌충우돌 우여곡절의 순간들이 이어졌지만 그러한 이동 자체가 색다른 매력의 여행 풍경이 되어주었다. 실제로 이 책을 읽다보니 이건 '여행'이라기에는 너무 이동만 하는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보니 제목이 '세계 여행'이 아니라 '세계 일주'다. 이동하는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거다. 그런만큼 그동안 읽어온 다른 여행서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 그 색다른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되었다. 비행기가 등장하지 않고, 어느 한 군데라도 머물기보다 움직임이 주가 되는 지금껏 보지 못한 신선한 여행 에세이.
이색 세계일주 중인 저자 만큼이나 독특한 여행자들의 이야기도 중간중간 소개되는데 그들의 이야기도 꽤나 매력적이다. 이를 테면, 이런 사람들.
활기찬 일본 친구는 파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삼륜차를 몰고 왔다고 말했다. 좌석이 하나뿐이고 뒤쪽은 짐칸인, 바퀴가 세 개 달린 작은 자동차다. 그는 그것을 보여주려고 우리를 자동차 갑판으로 안내했다. 삼륜차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튤립 꽃다발을 가득 싣고 암스테르담 주변을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일본 친구는 그걸 타고 유라시아 땅덩어리 전체를 누볐다. (138)
며칠 후 정유업을 하는 미국인은 랑카위를 떠나면서, 포브스와 마이크에게 원한다면 배에서 살아도 좋다고 말했다. 그들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캐나다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찢어버렸다. 이제 그들은 계류장 주민들로 이루어진 이상하고 작은 공동체의 필수 세간과도 같은 요트 갑판 위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때로는 배 밑바닥에서 물을 퍼내거나 가볍게 수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역에서 열리는 범선 경주에 나가기도 한다. 그들은 경주를 좋아한다. 그러나 대개는 기타를 치고 푸시업을 하거나 일광욕을 한다. (252)
삼륜차를 몰고 유라시아 전체를 누빈 일본 친구나, 여행길에서 만나 동행하게 된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찢어버리고 배 위에 머무르는 삶을 선택하는 등의 이야기는 모두 지은이의 독특한 세계일주가 펼쳐지는 가운데 만나서인지 '이야……'하는 감탄이 나오도록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지은이처럼 '비좁은 알루미늄 탈것 안에 갇혀 괴로운 비명을' 지를만큼 비행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아니, 오히려 비행기 나름의 매력을 즐기기도 한다. 뭐 몇 번 타본 건 아니다만 모든 이동 수단에는 그것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앞으로 장거리를 이동할 일이 온다면 혹시 그곳까지 나를 데려다 줄 육상 또는 해상 수단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빠른 것보다는 조금 느린 것으로. 내가 지금 이동 중임을, 곧 국경을 넘거나 다른 풍경의 땅에 가게 될 것임을 내 몸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지금도 나는 배를 타고 중국 여행 가기를 꿈꾸고 있으며, 너무 빨리 나를 남쪽 땅으로 데려다주는 KTX보다 무궁화호를 선호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열여덟 시간이 아닌 더 긴긴 시간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몇날 며칠을 보낼 수 있는 해상 여행을 할 기회가 오면 좋겠다. 날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자리 공부를 할지도!
아참, 그래서 지은이가 비행기 대신 도대체 뭘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돈 거냐 하면,
화물선, 여객선, 크루즈 등 각종 선박, 초고속열차, 침대열차, 좌식열차 등 각종 열차, 버스, 자전거, 택시, 지하철 등등 각종 이동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