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방 들어주는 아이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ㅣ 사계절 저학년문고 26
고정욱 지음, 백남원 그림 / 사계절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학년이 된 첫날, 석우는 같은 반 친구 영택이와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일 년 동안 영택이의 가방을 들어주라는 선생님의 부탁을 받는다. 영택이는 양 팔꿈치에 목발을 끼고 걸어야 하는, 다리가 불편한 친구다. 매일 등하굣길에 영택이 집에 들러 가방을 받고 건네줘야 하는 임무는, 2학년 석우에게는 쉽지 않다. 아니, '2학년'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일 년 동안 다른 사람의 일을 책임지게 된다면 쉬울 리가 없다. 자진해서 하는 일이라도 쉽지 않을 텐데 선생님의 부탁으로 하게 된 일이니 불쑥불쑥 불평이 생기는 그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축구도 한판 하고 싶지만 영택이 가방이 석우의 발목을 잡는다. 영택이 가방 때문에 마음껏 놀지도 못하다니! 매일 교과서와 준비물로 꽉 찬 가방은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힘들기도 하다. 게다가 가방을 두 개나 들고 다니는 석우를 보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마구 쑤근거린다. 공부 못 하는 아이인가보다는 둥, 숙제를 많이 했나보다는 둥. 이 모든 일이 석우에게 짜증을 불러오긴 하지만, 어린 석우, 꽤나 의젓하다. 불평불만은 속으로 삼키고 영택이 가방 대신 들어주는 일을 일 년 동안 꾸준히 잘 해내니 말이다. 그리고 가방 들어주는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방구 아저씨에게는 친구 가방 들어주는 착한 아이라고 사탕도 받고, 영택이 어머니는 고맙다며 석우가 구경도 못 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주기도 한다.
이런 석우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문득 조카를 돌봐주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일하는 엄마'인 동생 때문에 매일 오후 조카를 돌봐야 하는 임무를 맡은 내 모습이, 친구의 불편한 다리 때문에 매일 가방을 들어줘야 하는 석우 모습에 겹쳐져서. 석우가 투덜거리는 장면들도, 내게는 익숙하다. 튼튼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는 조카는, 조금 무겁다. "업어, 업어!" "안아, 안아!" 칭얼거리는 조카를 업고 안고 할 때는, 무거운 가방 두 개 드는 석우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고, 오후에 놀자고 친구들이 연락해 와도 조카를 돌봐야 해서 못 나갈 때는, 학교 끝나고 축구 하고 싶은 석우 마음과 같을 것이다. '내 것'도 아닌 것을 건사하느라 석우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석우처럼 나도 조카 돌봐주는 착한 이모 소리도 듣고, 가끔 동생이 고맙다며 사다주는 선물도 받곤 하지만, 역시 석우처럼 그런 소리를 들으며, 그런 선물을 받으며 마음이 썩 편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석우의 귓가에 맴돌고, 내 조카 내가 돌보는데 꼭 뭐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은 찝찝함은 내 마음속에 생기고. 처음에는 다리가 불편한 친구 도와주는 '봉사'를 권장하는 이야기려니 생각하고 별 기대없이 집어들었다가, 이래저래 석우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져, 생각지도 못 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나름대로 진지하게 읽게 만든 동화였다.
일 년이 다 지나간 후, 이제 석우가 가방 들어주는 임무에서 '해방'될 때, 과연 석우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척 궁금했는데, 아이다운 갈등을 겪으며 흘러가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석우는 이제 진정한 봉사의 의미를 온 마음으로 느끼게 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임무도, 봉사도 아닌, '우정'이겠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우정'을 석우는 진심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평소에 동화책을 읽지 않다보니 동화 작가 이름은 참 낯선데, 고정욱 작가는 장애인을 소재로 한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인가보다. 앞으로 죽는 날까지 동화라면 장애를 다룬 것만 쓰겠다고 마음 먹으며, 새로운 장애는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자꾸 나이를 먹어가는 현실에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는 작가. 작가는 언젠가 한 아이가 보내준 상장을 받은 적이 있다 한다. 장애를 소재로 좋은 글 써주어서 감사하다는. 글을 읽은 아이가 감동과 감사로 보내온 그 상장이 얼마나 값진 것일까. 이처럼 아이들의 마음을, 진심을 울릴 수 있는 글을 쓰는 작가를 알게 되었구나 싶어 참 기쁘다. 앞으로도 꾸준히 작가의 글을 찾아서 읽고 싶다. 동화, 정말 사랑스럽다. 맑고 깨끗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