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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53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내가 본 것들을 믿지 마시고 내가 그린 것은 더욱 믿지 마시오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만 겹의 얼굴 뒤에
불온한 얼룩으로 묻은 시간의 고름일 뿐이오
나를 믿느니 속옷에 묻은 당신의 부끄러운 땀 냄새나 오래 바라보시오
내 얼굴이 문득, 꿈에 본 당신의 속마음으로 읽힌다면
만 권의 책을 덮고 오래 켜둔 불빛을 잠그시오
어둠 속에서 만개하는 그림들이 지평선을 바꾸는 순간,
당신은 어디에도 없는 나의 유일한 그림자라오
그렇지 않겠소?
어찌해도 당신은 내게 속아 넘어갈 뿐,
대체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마시오 _ 「자멸의 사랑」 부분
어렵게 읽힌 시집 한 권을 막 덮고, 빼든 시집이었다. 그 밤은 유난히 시가 끌렸고, 이전에 읽어보지 않은 새로운 시인의 시를 읽어보고 싶었다. '첫 만남'이 주는 기분 좋은 설렘을 안고 읽으면, 왠지 시집에, 시인에 더욱 애정이 샘솟을 것 같은, 조금쯤은 터무니없고 조금쯤은 그럴 듯한 이유로 연이어 시집 두 권을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두 권의 시집 모두 내게는 조금 어려웠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의 시집이 내겐 어렵다. 내가 아직 시를 몰라도 한참한참 모르는 탓이겠지……)
그래서, 머리가 좀 딱딱해진 밤이었다.
시집 곳곳에는 그림이 함께 실려 있어 독특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림들은 예쁘다기보다는, 대부분이 나신이며, 시의 분위기와 얼마쯤 닮아 있는 그런 느낌의 그림들이었다. 여러모로 신선한 느낌을 전해준 시집임에는 틀림없다.
지난해부터 벼르던 시집을 드디어 만났다는 기쁨을 가슴에 품으며, 다음에 머리가 좀 덜 딱딱한 밤에 다시 만나봐야겠다. 그때 혹 새롭게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 새로 리뷰를 작성한 그 시집처럼.
낯설어진 몸 안으로 스며온 봄은
전 생애를 통과해나간 기억보다 밝고 길어
아무리 집을 옮겨 살아도
내가 나를 만날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내가 처음 보는 풍경들은 언제나
내가 처음 만든 풍경들일 터이나
生時 전의 눅눅하게 물 찬 그림이
걸레질 끝난 창밖에 액자처럼 떠오르는 광경을
詩라고 부르려니
식어빠진 내 육체의 화덕이 푸슬푸슬 비웃는 소리가
봄밤의 질긴 불면보다 정겹게 허망하다
누군가의 빈자리로 넘실대는 방 구석구석을 덧대어 잇는
이 습관성 자기비하에
이 작은 집이 만화처럼 들썩거리기만 한다면
나는 또 웃을 수 있겠지만
노을빛으로 산산이 쪼개지는 웃음은
황혼 저편의 별자리처럼 욱신욱신
내 몸에서 너무 멀다 _ 「이사」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