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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평점 :
작년에 읽었던 이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다이어리를 살펴보니 꼭 일 년만이다.
이미 리뷰까지 올린 책은 다시 읽는데도 리뷰를 새로 쓰지는 않는데, 이 시집은 기어이 또 리뷰를 써야겠다.
그 일 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고 하면, 문학 계간지에 실린 심보선 시인의 시를 몇 편 만나고는 그만 마음에 하트가 뜨고 말았고, 한 시인의 낭독회에서 시인을 직접 보고 시인의 목소리로 낭송되는 시를 듣고는 마음이 아주 훈훈해졌더랬다. 그리고 생각했지.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내가 읽었던가? 이미 읽고 리뷰까지 썼음에도 기억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작년에 쓴 리뷰를 읽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어렵다'고 했더라. 어려워서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영 멀리하고 싶지는 않은, 다시 꺼내어 보고 싶은 시집이라고.
그런 사실 같은 거 기억했거나 못 했거나, 어쨌든, 며칠 전 밤 문득 시인이 생각나 시집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이미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던 시집에 또 수많은 밑줄들을 보탰다.
참으로 가슴 설레고 벅찬 시들이었는데, 작년에는 '어렵다'는 평만 남긴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아니, 일 년 사이에, 같은 시를 대하는 내 마음이 이렇게나 달라졌단 말인가? (그래서 리뷰를 다시 쓰기로 마음 먹었지!)
오늘은 휴일입니다
저녁 내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부재중 전화가 두 건입니다
아름다운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사랑하는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문득 창밖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허공이라면 뛰어내리고 싶고
구름이라면 뛰어오르고 싶습니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이토록 평화로운 날은
도무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_ 「휴일의 평화」 부분
이번에 새롭게 밑줄을 그은 구절. 이 시를 읽던 날이 바로 '휴일'이었고, '부재중 전화'가 온다면 떠올려볼 '아름다운 그대', '사랑하는 그대'가 생각났고, '도무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날'을 보내고 있음에 감사하며 공감했던 거겠지.
사람도 책도, 그때 내 마음에 딱 들어올 그 '타이밍', 그 '시절 인연'이 참으로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준 이번 만남.
그런 평화로운 휴일 속에서 시집은, 첫 만남때와 달리, 내 마음속 깊이깊이 들어와 자리했다.
나는 그저 고독한 아크로바트일 뿐
굳이 유파를 들먹이자면
마음의 거리에 자우룩한 구름과 안개의 모양을 탐구하는 '흐린 날씨'파
고독이란 자고로 오직 자신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기괴함이기에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_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부분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이런 시구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작년에 그었던 밑줄에 다시 밑줄을 보탠다.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이라는 문장에 밑줄 긋는 마음이 씁쓸하기는 하지만, 이 시를 만난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칠지도 모를 구절들에 큰 의미를 두며 '나만의 시'를 완성하는 기쁨의 손을 들어준다. 작가의 시인의 손을 떠난 작품은, 독자에게서 각자 나름의 형태로 완성된다는 말도 문득 떠오르며, 내 안에서 새롭게 완성하는 한 권의 시집.
작년에 계간지에 실린 시인의 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난 달에 낭독회에서 시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시집을 다시 펼쳐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아찔하다. 내 생의 소중한 한 페이지를 놓칠 뻔 했지 않은가.
내가 늘 곁에 두고 수시로 펼쳐보는 시집들과 함께 이 시집도 앞으로 언제고, 몇 번이고 계속 펼쳐보게 될 것 같다.
행복하다. 그렇게 펼쳐볼 시집이 한 권 늘어났다는 것이.
생은 균형을 찾을 때까지 족히 수십 번은 흔들린다. 그러다가 쓰러진 이들은 정말 완벽하게 쓰러진 것이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혁명일까? 아버지, 여태 빈 링거병 꽂고 누워 계세요?
보도블록에 다리가 끼인다. 누구인가, 나를 이토록 무지막지하게 흡입하는 자는? 서서 생각해본다. 우리쯤의 나이면 삶은 몇 번의 암전(暗轉)을 겪고도 남는 것이다. 이제서야 막(幕) 끝의 술처럼 나풀거리는 깨달음. 아버지, 이렇게 장성해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내가 당신이 남긴 그 숱한 혼잣말의 잔뿌리들 중 하나일 줄이야! _ 「대물림」 부분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_ 「오늘 나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