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열병을 앓았다. 엄마는 한데 나앉아 있다가 동장군이 든 거라 했지만
나는 마음을 태워 없애는 중이었다. 감정을 재료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의 장막들을 베어 없앨 칼 하나를 담금질하는 중이었다. _ 17
 

밝고 따듯한 곳에 있는 당신이어서, 춥고 어두운 곳에 있는 내가 애처롭다고?
조금만 기다리시라.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당신의 삶이, 모닥불을 향한 당신의 욕망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가르쳐줄테니. _ 87

 

부메랑을 뽑고 나니 가슴 한복판에 외눈이 생겨 있었다. 녀석은 장님이었다.
앞도 못 보는 주제에 자주 눈을 깜박거렸다. 자꾸만 속눈썹이 면 티를 스쳤다. 명치에 힘을 주어 꼭 닫고 있어야 했다.
잠시라도 딴청을 피우면 녀석은 그새 눈을 떴고, 그러면 나는 손바닥까지, 발바닥까지 속살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_ 98

 

민주주의 사회는 공평했다. 종과 유를 막론하고 동일한 게임을 택해야 했다.
일테면 포유류거나 어류거나 똑같이 수영 실력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포유류는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어류는 하던 대로 하면 그만이다. 자유경쟁이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냐? _ 102~103

 

 

 

첫사랑이란 가슴에 모양틀을 뚫는 일이었다.
삼각형으로 뚫리면 삼각형으로, 동그라미로 뚫리면 동그라미로, 별 모양으로 뚫리면 별 모양으로,평생 동안 감정이란 반죽을 잘라내게 되는 거였다. _ 143

 

상처는 상처가 아니었다. 진짜 상처는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잘못 아문 상처의 흔적이야말로 진짜 상처였다.
어떤 사람한테는 술이고, 어떤 사람한테는 잠수고, 또 어떤 사람한테는 섹스이거나 자해이거나 폭력일 수도 있는 그것.
어떻게든 상처는 낫게 마련이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일생을 두고 반복될 수도 있다. _ 217~218

 

그걸 사랑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놓치면 도망가고, 붙잡으면 파고드는.
가까이 있으면 가볍고, 멀리 떨어지면 무거운.
마음에 품으면 버겁고 아프고 화나고 무섭고, 몸으로 밀어내면 외롭고 쓸쓸하고 허전하고 비참한, 

그걸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_ 234

 

 

 

사람은 변하지만 바뀌지는 않는다. 세상은 바뀌지만 변하지 않는다.
변치 않는 세상 속에서 변해가는 게 인생이고,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게 정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 만에 나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얗게 눈이 깔린 캠퍼스를 걸으며 더 이상은 아무것도 '싶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다, 생각했다. _ 268

 

끊임없이 새로운 물결에 밀려나고 마침내 뭍에 부딪쳐 사라지고
날씨에 따라 수천 가지의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게 기억이다. _286

 
 

사랑해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겠습니다.

_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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