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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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시린 가을이다.

내 생애 단 한 번뿐인 이천십년의 가을, 이렇게 내게 잔인하게 굴다니,

이 가을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빨간약을 집어들고 가슴 언저리에 바르게 될 것만 같다.

아니다, '가망 없는 감정의 소모'를 이제 막 끝낸 참이니, 나는 오히려 홀가분해야 옳다.

 

괜찮지? 괜찮아. 그러면서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 이제 모든 것은 소소한 과거사가 되었다. _ 79

 

그 소소한 과거사를 정리하며 괜찮아지는 과정 중에 나는 빨간약을 바르는 대신 붉은 열매들을 따먹었다.

수확의 계절 가을. 

일부 농가들에서는 곤파스의 무자비한 칼질에 흉년을 맞은 가을이겠지만, 여기, 내 정원에는 붉은 열매가, 참 탐스럽게도 주렁주렁 열렸다.

나는 그 붉은 열매들을 누가 따가기라도 할세라 욕심스럽게 거둬들여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깨물어 먹었다.

붉은 열매에서 흘러나온 붉은 즙이, 내 심장에 닿아, 괜찮지? 괜찮아, 하면서 스며들었다.

까진 무릎에 바른 빨간약보다, 더 탁월한 효과로 내 심장을 어루만져준 이 붉은 열매들 덕분에, 잔뜩 성나 있던 심장이 이제야 긴장을 푼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_ 80

 

이제 막 일 년여에 걸친 짝사랑을 정리한 탓인지, 책 속에서 사랑에 관한 구절들이 유난히 마음을 사로잡았다.

참 우습지. 짝사랑도 사랑이라고 실연의 시련을 겪고 있는 이 내 마음이 말이다.

그 보잘것없는 아픔에 나는 보잘것없지 않은 따스한 위로들을 많이 받았다. 참, 염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더 괜찮아야 하고,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

아픈 마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상처가 결국은 보잘것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인 이유는 차미령 씨의 해설에 적힌 대로인 것 같다.

 

그 처절함을 바깥에서 제어하고자 하는 작가 특유의 사색과 통찰이, 이 이야기들을 소설 속 주인공에 국한된 체험이 아니라 너와 내가 공유할 수 있는 체험이 되게끔 이끌어간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어쩐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것은 모든 소설의 본성이 아니라 좋은 소설에만 가능한 자질이다. _ 275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처럼 영원히 그 자리에 매달려 있을 붉은 열매.

봄여름가을겨울, 언제고 나는 내 정원을 찾아가 이 붉은 열매들을 따먹을 것이다.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새콤하게 내 마음의 허기를 달래줄, 이 붉은 열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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