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늙으매 꽃꿈 창비시선 227
이선영 지음 / 창비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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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의 시배달을 통해 '섬'이라는 시를 만났다.

재미있는 시도 다 있구나 하며 설렁설렁 보다가 어느 문장들에서 그만 심장이 덜컹.

내 안에 숨어 있을, 나도 아직 모르는 어떤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글, 그래서 내가 나에게 더이상 좌절하지 않도록, 굽혔던 무릎 조금이라도 다시 펴게 해주는 글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그런 글을 만나면 다시금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

그래서 당장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여 이 시집을 찾았다. '섬'은 이 시집에 실려 있었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가슴이 너무 벅차서 쉬이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빨간 밑줄을 그으며 읽은 문장 또 읽고 또 읽으며 행복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무슨 까닭인지 절반 쯤 넘어가면서는 마음이 안정을 되찾고 차분하다 못해 덤덤해졌다.

그건 시집에 실린 시들의 느낌이 정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앞에 너무 열정을 다 해 읽은 까닭에 뒷부분에서는 지친 건지(그럴 수도 있나?) 아무튼 그 까닭을 모르겠지만, 시집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훑어보니, 내가 그은 수많은 밑줄들이 다 앞의 절반에 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현상이라 생각했다.

 

이 시집을 만나게 된 건 '섬' 덕분이고, 그래서 '섬'에 가장 애착이 가지만, 그 외에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시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산수유나무'를 읽었을 때의 그 신비스러움과 애틋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얼마 전에 대만 시인 席慕蓉의 '一棵开花的树(꽃 핀 나무)'라는 시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었는데, 그와 비슷한 감동을 전해주는 시였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대만에 '一棵开花的树'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산수유나무'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느낌과 감동으로 내 마음을 흔드는 시를 두 편 만나다니, 이것도 내 복이다.

 


처음부터 그는 나의 눈길을 끌었다

키가 크고 가느스름한 이파리들이 마주보며 가지를 벋어올리고 있는 그 나무는

주위의 나무들과 다르게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기 위해 잠시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산수유나무라고 했다

11월의 마지막 남은 가을이었다

산수유나무를 지나 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이를테면 천 년 전에도

내가 그 나무에 내 영혼의 한 번뜩임을 걸어두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되풀이될 산수유나무와 나의 조우이리라는 것을

영혼의 흔들림을 억누른 채 그저 묵묵히 지나치게 돼있는 산수유나무와 나의 정해진 거리이리라는 것을

 

산수유나무를 두고 왔다 아니

산수유나무를 뿌리째 담아들고 왔다 그후로 나는

산수유나무의 여자가 되었다

 

다음 생에도 나는 감탄하며 그의 앞을 지나치리라 ('산수유나무' 전문)

천 년 전에 산수유나무에 내 영혼의 한 번뜩임을 걸어두었으며 다음 생에도 그의 앞을 지나칠 '나'와, 그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나기 위해 오백 년 간 부처 앞에 기원하고 그가 지나는 길에 한 그루 꽃핀 나무로 탄생한 '나'('一棵开花的树'). 이 두 시 때문에 난데없이 내 가슴이 심히 들뜨고 콩닥콩닥 한다. 어쩌면 나도 내 영혼을 걸어두었을지도 모를 나무 한 그루 만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걸까? 내 가슴은 마냥 설레고 두근두근.

 

엄마가 된 지 15개월 된 동생에게 권해주고 싶은 시도 많았다. 강아지를 키우면 어딜 나가서도 강아지 자랑을 하고 싶고, 아이를 낳으면 어딜 나가서도 아이 자랑을 하고 싶어지는 거 같은데, 아마 시인도 아이 자랑에 입이 근질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물씬 묻어나는 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나는 그런 시들을 만나면 조카를 떠올렸다. 나도 녀석에게 바치는 헌시를 한 편 쯤 써봐야하지 않겠는가는 생각도 잠깐 해보고. 생각난 김에 조카에게 시 한 편 바쳐야겠다. 아직 잘 못 알아 들을 때, 이모 시가 손으로 쓴 건지 발로 쓴 건지 구분 못 할때(나는 손으로든 발로든 시를 써 본 적이 없으므로, 흠흠). 그리고 나중에 내가 너를 위한 시도 썼었노라고 공치사 좀 해야지. 제목은 '내가 천사를 키운다'로 해야겠다(시인의 시 제목은 '내가 천사를 낳았다').

 

마음이 자꾸자꾸 따뜻해지는 시집이니까 여름보다는 겨울에 읽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 그러므로 나는 아주 좋은 때에 이 시집을 잘 만났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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