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재밌다는 추천을 받아 구입하고는 오래오래 책꽂이에 꽂아만 두고 있던 이 책을 부랴부랴 꺼내 읽은 건 뮤지컬 퀴즈쇼를 보기 위해서였다.(일요일에 있을 뮤지컬 관람을 위해 금요일에 꺼내 읽었으니 말 그대로 '부랴부랴'.)
꼭 소설을 보고 뮤지컬을 봐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원작 소설' 정도는 읽고 가야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뮤지컬 내용을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하면서 이틀 밤 동안 열심히 읽었다.
뮤지컬 관람 전에 읽은 '원작 소설'은 확실히 뮤지컬 보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그런데 책 리뷰를 쓰자니 소설 속 문장이 생각나는 게 아니고 자꾸 뮤지컬 장면들이 머릿속을 장악해버려 좀 난감하다.
그래서 쓰는 김에 책 리뷰와 뮤지컬 리뷰를 두루뭉술 뭉쳐서, 그러니까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같이 쓰기로...흠흠.
책은, 여러 차례 '강추'를 들어와 기대했던 것 만큼 무척 재미있었다.
제법 두꺼운 책이었지만 몹시 흡입력이 있던지라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읽었(는지는 사실 시간이 지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랬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복잡한 현실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인터넷에 접속해 빠져들게 되는 퀴즈방. 그 세계가 내 밤을 하얗게 칠해버린 일등공신이었다. '영퀴방'이라니, 정말 얼마만에 들어보는 단어인지 모르겠다!
전화선으로 인터넷을 연결해 나우누리에 접속하던 그 시절, 영퀴방에서 밤을 지새던 동생의 덕을 십 년이 훌쩍 지나서야 고마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영화에 관심이 없었던지라 영퀴방에서 퀴즈를 푸는 동생의 모습이 참 신기해보였고, 어떻게 저런 걸 다 알까 싶기만 했지, 그저 밤늦게 다다다닥 거리는 타자 소리가 거슬리기만 했지, 이렇게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움의 재회를 하게 될 줄이야.
영퀴방에서 퀴즈를 풀던 실력으로 티브이 퀴즈쇼에도 출연하고 또 그 인연으로 영퀴방의 히로인 '벽속의요정'을 만나 사랑을 키워나가고... 비록 졸지에 천애 고아가 되고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어 고시원 쪽방에서 전전하다 그 마저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지만, 많이 서글프진 않았다. 젊으니까. 무책임하고 대책도 없고 가난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태연할 수 있는, 철없을 수 있는 젊은이니까.(그런 점에서는 나도 아직 싱싱한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쭐(이라니!)했다. 아, 정말 대책 안 서는구나.)
여기까지는 내게 추억을 불러 일으켜주며 대단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나를 매료시켰다면 이후에는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판타지가 이어진다. 사실 소설에서는 이 현실과 판타지 구분이 모호한 이야기가 조금 지루하고 책의 분위기가 너무 갈리는 느낌이 들어 별로였다.
그런데 이 부분은 뮤지컬에서 좀 더 빛을 발하게 된 듯 하다.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 대부분은 소설에서 내게 사랑 받았던 앞부분이 아니라 이 뒷부분의 장면들이니까.

소설에서는 현실과 판타지의 분량이 4:1 정도 였던 것과 달리 뮤지컬에서는 전반 후반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나눠졌던 것 같다.
뮤지컬 내용에 앞서 독특한 무대 장치가 무척 시선을 잡아 끌었다. 무대 전반에 설치된 반투명 스크린에는 채팅창이 뜨고 그 스크린 너머에서는 연기자들이 노트북을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는데 굉장히 훌륭한 장치라는 생각에 감탄을 했다.(다만 음성과 채팅창 입력 문장이 제대로 맞지 않아 좀 헷갈렸다는 아쉬움이.)
소설에서는 퀴즈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면 뮤지컬에서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이 주를 이루었다는 생각이다. 소설을 읽을 때는 영퀴방에 반가워하느라 미처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우리 시대 청년 실업자들의 모습이 뮤지컬을 통해 무척 가슴 찡하게 부각되었다. 4년제 대학 졸업은 기본이요 토익 고득점자도 넘쳐나고 부모 세대에 비하면 책도 많이 읽고 자격증도 많이 따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은데,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일자리는 없는 건지! 그들의 애타는 몸짓과 음성이 아직도 눈과 귀에 선하다. 면접 장면이 이 뮤지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무대 밑에서 지켜보는 나마저 어찌나 서글퍼지고 애가 타던지, 그만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더라는 건, 비밀... 어딜 가나 들려오는 '청년 실업' 소리가 지겨운, 하지만 그 소리에 가슴에 못이 박히는 젊은이들이 보면 깊이 공감할 것 같다.
후반부는 내가 책에서 살짝 흥미를 잃었던 판타지 부분인데, 뮤지컬 무대로 보니 색다른 재미가 있어서 좋았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장면 전환과 실제 퀴즈쇼 현장을 보는 것 같던 생생함. 아직도 무대를 빙글빙글 도는 은색 의상의 연기자들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대미를 장식한 키스신도 빼놓을 수 없겠다. 2층에는 모 카메라 동호회 회원들이 인기스타 기자회견을 방불케하는 카메라 장비들을 갖추고 뮤지컬을 관람하고 있었는데, 후반부 들어 완전히 수그러들었던 카메라 셔터 소리가 갑자기 쏟아져 키스신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미안한 사연.
대체적으로 만족할 만한 공연이었지만 조금 아쉬웠던 점이라면 음악이 약하지 않았나 하는 거다. 뮤지컬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뮤지컬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들은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은 노래를 들을 때였다. 공연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귓가에 맴도는 노래가 한둘 쯤은 있기 마련일텐데 딱히 기억에 남는 노래도 없고, 뮤지컬 보는 동안에도 노래가 아쉽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것만 뺀다면 대체적으로 감동적이고 만족스러웠던 무대!
그리하여 소설 퀴즈쇼와 뮤지컬 퀴즈쇼를 같은 기간에 함께 보는 색다른 경험을 즐겼는데, 소설 퀴즈쇼를 본 사람이라면 뮤지컬 퀴즈쇼도 함께 관람해 볼 것을 권하고 싶고, 뮤지컬 퀴즈쇼를 본 사람이라면 역시 원작 소설 퀴즈쇼를 함께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같은 듯 다른 책과 뮤지컬이므로 각각에서 주는 재미와 감동을 합친다면 엄지 손가락 두 개 쯤은 거뜬히 치켜들게 되리라는 것.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고, 아주 즐거운 책 읽기와 뮤지컬 관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