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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달래는 순서 ㅣ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평점 :
책과의 만남에도 시절 인연이 있다는 걸 굳게 믿는다.
이 시집을, 지금 이 가을, 이런 시간에 만나게 된 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금이 아니어도, 충분히 내 마음을 흔들고 달래주었을 시집이지만, 지금 이 시집은 내게 최상의 '약효'를 발휘한다.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니. 그 순서가 궁금했다.
잠깐, 그 전에,
고통이, 달래지는 것이던가?
육체적인 고통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내 과거 경험들을 비추어 봤을 때 말이다.
그렇지. 고통을 달래는 데는, '순서란 없다 견딘다'.
육체적 고통을 겪는 데 있어서라면, 그 고통을 견디는 데 있어서라면, (안타깝게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한 여인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그녀는 '고통을 참는다'는 멕시코 말 '아구안타르'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1925년 12월 5일 일기에는 '유일한 희소식은 이제 내가 참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_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중에서...
갑자기 이 글이 떠오른 건, '유일한 희소식은 이제 내가 참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고통은, 어떻게 해도 달래지지 않는다, 그저 참고 참고 또 참고, 그렇게 견디어 내는 것일 뿐.
이 시집은, 나의 고통을, 혹은 누군가의 고통을 공유하고 함께 견디어 준다.
나의 아픔은, 누군가가 내밀어 준 한 알의 아스피린보다는, 나도 같은 고통 안고 있다, 혹은 네가 그런 고통을 안고 있구나, 공유하고 이해해주는 것으로 더 견딜만 해진다.
이 시집이, 지금 나를 만나야 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된 까닭은,
요즘 나를 괴롭히는 마음의 고통들이 이 시집안에 공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시 구절구절에 빨간 밑줄을 두 번이나 긋고 별표를 그려넣을 정도로,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내 마음과 같은 상황이 담겨 있는 시집이라니, 어찌 아니 사랑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시집에는, 내가 처한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시들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내가 읽기에는, 그 시들이 더욱 구구절절이 다가왔을 뿐.
다음에 다시 읽을 때는, 이 시집의 다른 시들에 밑줄을 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밑줄 그은 문장들을 보며, 내 마음 유난히 시리게 했던 이 가을을 떠올리겠지.
그때 '매일의 행복과 항복 사이'에 나는 잘 견뎌내었다고, 그리고 그때 이 시집이 내밀어준 손길이 유난히 따스했었다고 말이다.
다정한 모임 속 네가 갑자기 내 머리에 못을 박았다
그 대못 얼버무리려 괜한 웃음을 웃느라
이마와 코가 헐거워졌다,
너무 가깝거나 멀어 몹쓸
사이도 아닌데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도 뺨으로 눈썹이 흘러내렸다
나는 확실히
사람과 잘 안 맞아 어떻게 사람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죽은 척하는 순간
고양이가 내 두 손을 지목한다
_ '그날의 배경' 중에서
내 사랑의 겉묘엔 선혈의 망치못들, 잔디떼의 잔못질들 그 속 반달의 흙뚜껑 들솟도록 너무 많이 죽거나 너무 많이 죽인 나와 당신의 시신들 여전히 푸르고 성성하니 고르지 못한 처신과 처사들 사이 못질 좋은 모서리들 가득한데 나 하나 걸어둘 대못 하나 아직 단단치 못한 나는 마냥 쓸모없는 인간 같아요 위로나 두둔 따위 마세요 알지도 못하면서 어느덧 오늘도 귀신이 나타난다는 자정이다 잊고 싶지 않은 일들 벽에 못질해두는 일 따위
이젠 하지 않지만
_ '잘 모른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