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집에 있을걸 - 떠나본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멋진 후회
케르스틴 기어 지음, 서유리 옮김 / 예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올 여름 피서를 떠나면서 3권의 책을 챙겨갔다.

물놀이 외에 다른 할 일은 없는 계곡으로 떠나기에 책 읽을 시간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피서지에서 펼쳐 든 이 책을 보고 가족들이 꺌꺌대며 웃었다. 왜 '그런 책'을 여행에 가져왔냐고.

물론, 제목 때문이었다. <그냥 집에 있을걸>!

 

내 경험에 따르면,

이 책은 한 가지 면에서는 여행에 아주 잘 어울리는 책이었고, 다른 한 가지 면에서는 여행에 절대 피해야 할 책이었다.

 

내가 집을 떠나면서 굳이 '그냥 집에 있을걸' 하는 후회가 가득 담긴 제목의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 책이 여행 에세이, 그것도 케르스틴 기어가 쓴 여행 에세이였기 때문이다.

(이 책 전에 그녀의 소설 몇 권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오늘 죽고 싶은 나>는 어찌나 재밌게 읽었던지, 그때 병원에 입원해 있던 동생 읽으라고 가져다 주려다가 엄마의 제지로 실패했다. 왜 '그런 책'을 병원에 있는 애에게 가져다 주느냐는 것이었다. 역시 제목 때문에!)

여행 에세이를 한 권 챙겨가고 싶었는데, 이왕이면 감성을 자극해서 자칫 진지해질 수 있는 글 보다는 케르스틴 기어의 그 유머와 재치를 만끽하며 즐기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이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한낮의 물놀이 외에는 그다지 즐길 것도 볼 것도 많지 않은 그곳에서 나는 계곡물 소리를 음악 삼아, 선풍기 바람 대신 시원한 계곡 바람을 쐬며 케르스틴 기어의 글 속으로 또다른 여행을 떠났다.

 

여행 에세이라고 해서 그녀가 다닌 많은 나라의 풍광이 담긴 사진이 실려 있고, 사진 옆에 시처럼 아름다운 글귀가 적혀있는 그런 책은 아니다.(요즘은 그런 책이 대세지만.)

오히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게 '여행 에세이'라는 건 까맣게 잊고, 그저 이 여행 좋아하고 조금은 호들갑스럽고 말 많은 '아줌마'의 수다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내가 기대한대로 아주 유쾌한 수다를!

비행기 공포증을 비롯해서 여행지에서 있을 수 있는 갖가지 공포증에 관한 이야기, 이탈리아 어를 둘러싸고 친구들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 여행지에서 만난 귀신, 점쟁이의 말을 믿고 미래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섬, 세상에서 가장 추레한, 하지만 해마다 찾고 싶게 만드는 이상한 펜션 등등.

그 중에서도 금발머리 사촌 헬레나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할머니 최고!!"를 외치며 어찌나 유쾌하게 읽었던지.

'그냥 집에 있을걸'이란 제목이 무색하게 정말 후회스럽지 않고 유쾌상쾌통쾌한 여행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한참 물놀이를 하다 나와 젖은 옷 채로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계곡 물에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아, 두 발은 시원한 계곡물에 담그고 이 책을 읽다보니, 이제 더위가 살풋 수그러 들 시간이 되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갑자기 배가 싸르르 아파졌고, 도저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던 그곳의 간이 화장실에 가야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것도, 그날 저녁에만 스무 번 넘게!!!

책에 푹 빠져서 몸이 젖은 채로 너무 오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두 발은 찬물에 담근 채로!

 

이 책을 읽다가 갑자기 화장실에 뛰어갔다가, 다시 책을 읽다가, 다시 화장실에 뛰어가기를 반복하고 있는 나를 보고 남동생이 한 마디했다.

"여행 와서 '그런 책'을 읽으니까 그렇게 되지!"

아, 역시 제목 때문인가?

가수는 자기가 부른 노래 가사를 따라가고, 영화배우는 자기가 맡은 배역을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더니,

이 독자는 그만 읽던 책의 제목을 따라가고 말았다.(조금 억지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상황이 그렇게 맞아 떨어졌으니 뭐.)

아픈 배를 움켜쥐고 눈물을 찔끔 흘리며, 속으로 한 마디 했다.

'아, 그냥 집에 있을걸...'

 

하지만, 책 제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상황 때문에 더욱더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되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이 책도, 이 책을 읽다가 정말 제목과 꼭 같은 후회를 하게 되었던 올 여름의 피서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다음 피서에는 <나는 여기가 좋다>를 가져 가리라 다짐을!!)

 

잠깐 무겁고 진지하고 머리 아픈 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책 추천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케르스틴 기어 아줌마(왠지 '아줌마'라고 불러보고 싶다)가 들려주는 이 수다에 푸욱 빠져보자. 아, 그냥 집에서. 여행지에는 가져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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