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 문학과지성 시인선 34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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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에 가슴을 데었었다.

평소에 시를 많이 접하지 않는 탓에 오규원이라는 시인의 이름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의 다른 시집을 보고 싶어 찾다가 <두두>를 만나게 되었다.

(한 온라인 서점에서 2008 최고의 시집을 투표하는데, 그 후보에 올라 있었다.)

 

시집을 펼쳐들다가 '시인의 말'에서, 그 짧막한 네 줄 글귀에서 시선이 오래오래 머물고 말았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2007. 1. 21

                          오규원

 

시인은 2007년 2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는 문장이 어쩐지 곧 다가올 시인의 마지막 안식을 말해준 것 같아서 가슴이 찡해졌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그 길이가 다 짧다.

맨 마지막에 실린 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한 페이지에 들어오는 분량인데, 다섯 줄 미만의 시도 제법 많고, 대부분이 열 줄 안팎이다.

시집 뒷부분에 실린 '해설'을 읽으면서, 시인이 생전에 짧은 시편들만 모은 시집을 따로 준비했던 사실을 알았다.

1부 '두두'와 2부 '물물'이 시의 길이에서 차이가 조금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상당히 짧은 시들로만 엮인 시집이라는 점이 내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4월과 아침' 전문)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나무와 허공' 전문)

 

내가 태어난 4월, 나하고 같은 날 태어났을 '생년월일이 같은' 수많은 잎들을 이제서야 생각해보며 나도 잠시 어리둥절.

그 잎들은 이미 가지를 떠나고 그 자리에는 허공이 들어차고, 이듬 해 또 다른 잎들이 같은 날 와르르 태어나고 또 가지를 떠나고...

그들은 그렇게 생몰을 반복하며 자라나고, 나는 처음 태어난 그 몸을 가지고 이렇게 자라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묘하다.

갑자기, 몹시 사무치게 그 잎들이 그리워졌다. 같은 날 태어났다는 인연으로.

 

이 시집에는 꽃과 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시를 읽으며 만나게 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 정원에 심었다

제비꽃, 베고니아, 제라늄, 라일락, 애기똥풀, 조팝나무, 산수유, 층층나무, 붉나무, 쥐똥나무, 비비추, 때죽나무, 수국, 배롱나무...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내 머릿속에 꽤 근사한 정원 하나가 태어났다.

꽃을 좋아하다보니, 꽃이 등장하는 시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이 시집이 더욱더 마음에 들었다.

 

  빗방울이 개나리 울타리에 솝-솝-솝-솝 떨어진다

 

  빗방울이 어린 모과나무 가지에 롭-롭-롭-롭 떨어진다

 

  빗방울이 무성한 수국 잎에 톱-톱-톱-톱 떨어진다

 

  빗방울이 잔디밭에 홉-홉-홉-홉 떨어진다

 

  빗방울이 현관 앞 강아지 머리에 돕-돕-돕-돕 떨어진다 ('빗방울' 전문)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한 나에게 '어울리는 법'을 가르쳐 주기라도 하듯 '**과 ##'식으로 짝꿍을 이루는 제목이 많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대와 산', '봄과 밤', '라일락과 그늘', '조팝나무와 새떼들', '산과 길', '덤불과 덩굴', '아이와 강', '발자국과 길', '쥐똥나무와 바람'...

상당히 많은 시의 제목이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나도 가만히 '나와 ...' 제목을 지어보았다. 나와 가족, 나와 강아지, 나와 책, 나와 친구, 나와 사진, 나와 여름...

내 옆에 많은 존재가 함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지고 푸근해졌다. 시의 제목들에서 어울리는 법을 배워본다.

 

아름답고 향긋하고 다정하고 싱그럽고 가끔은 헛헛하게 만들기도 하는 시들을 만나는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

시인과 고향이 같은 걸 알고 더욱 반가웠는데, 시인 생전에 한 번 뵙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앞으로 기회가 없으니...

대신에 시인이 남긴 시집들을 한 권 한 권 더 많이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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