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에서 나의 책읽기에는 슬픈 징크스가 하나 있다. 바로, '사랑'과 관련된 책에서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남들이 정말 감동적이고 재미있다고 추천 한 '사랑 소설'에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는 '사랑 에세이'에서도, 내 가슴은 데워지지 않는다. 보고 나면 괜히 서러움만 더해질 뿐이다. 내 가슴에는 '사랑'이 비었구나,를 깨닫고는 말이다. 요즘 시집에 한창 빠진 터라, 이 시집을 만나보면서도, 내심 걱정했다. 나, 이 시집도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고 차가운 마음으로 읽으면 어쩌나... 하지만 아름다운 시 앞에서 무너지고마는 내 '차가운 심장'을 느끼며 이 시집을 무척이나 아름답고 달콤하고 감미롭고 애잔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시의 힘이 위대함을 깨달았다. 이 시집은 시인 14명이 모여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를 추천하고, 추천작 중 50편을 엮은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한 번쯤 읊어봤을, 예쁘게 베껴 그리운 사람에게 한 번쯤 보내봤을 반가운 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장석남, 김선우 시인의 아름다운 해설은 시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 해설은, 단순히 작품 분석인 것이 아니라, 그 시인에 얽힌 혹은 그 시에 얽힌 일화가 재미있게 실려 있기도 하고, (신경림 시인의 '너희 사랑'과 '가난한 사랑 노래'에 얽힌 이야기는 무척 감동적이었다.)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생각들이 괜시리 내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도 만들어준다. 거기에 시를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낸 클로이의 그림이 곁들여져, 읽는 내내 행복한 책이다. 나처럼 '사랑' 앞에 차가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도 말이다. 창호지 문에 달 비치듯 환히 비친다 네 속살꺼정 검은 머리칼 두 눈 꼭두서니 물든 두 뺨 지금도 보인다 낱낱이 보인다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 - 이근배, '찔레' 중에서. '불혹이 되도록 사랑에 눈을 못 뜨면 인생에 이루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라고 김선우 시인이 해설에 적어놓았다. 그 문장을 오래오래 곰곰 생각해보았다. 불혹이 되도록 사랑에 눈을 못 뜨면 인생에 이루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갑자기, 불혹이 되기 전에 사랑에 눈 뜨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불혹이 되어 찔레 덤불 가시의 아픔을 맛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 비록 사랑에 빠진 눈으로 보지 않아서, 이 시들과 많은 교감을 하진 못했을 테나, '그리움' '기다림'을 노래한 시들은 오래전 짝사랑에 빠졌던 내 마음을 생각나게 해주어, 간만에 가슴이 콩콩 뛰는 시간 누려보기도 했다. 이미 잊은 지 오랜 감정이었는데, 시를 통해 되살아 난 그 느낌들, 참 그립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감미롭고 감미로운 시집이다. 특히 사랑에 빠진 이들이 읽으면 더없이 좋을! (한 지인은 이미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그의 연인에게 문자메시지로 '날려'주었다 했다. 이후 알콩달콩 아름다운 대화들이 오갔음은 당연한 일.) 김용택 시인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를 읽으며, 문득 달이 떴을 때, 달 떴다고, 전화를 할, 전화를 해 줄 상대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이 밤이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라고 말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