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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평점 :
일단, (부끄럽지만) 나는 '전혀'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만큼, 철학을 거의 모름을 밝혀둔다.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 중에는 철학에 상당한 지식이나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도 있을테고, 나처럼 철학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한 번쯤은 발을 담가보고 싶은,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나와 비슷한 경우의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읽은 느낌을 간단히 남겨본다.
철학,이라는 말을 듣고 "너 자신을 알라"나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철학자를 떠올리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철학책이 바로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이다.
작년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고나서 갑자기 무척 알고싶어진 철학자가 있어서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철학 쪽을 기웃거려 책을 몇 권 빌려 왔었다. 의욕에 불타 올라 그 중 한 권의 책장을 펼쳤지만, 결국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함께 빌려온 다른 철학서와 함께 그대로 반납하고 말았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그 뒤, 몇몇 흥미로운 철학서 소개를 보았지만 선뜻 집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책,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가 기어이 나를 잡아 끌어 책장을 펼쳐들도록 한 데는 그만한 매력이 있었을테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일단 겁없이 철학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제목을 보고는 철학과 '도시 디자인'이 결합된 책인가, 생각했는데 책 소개를 읽어보니 유럽 도시 곳곳으로 철학 여행을 떠난다 한다.
그렇게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과 사람을 살살 유혹하다 못해 황홀하게 만드는 여행이 결합된 책이라니, 내가 작년에 맛 본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기억 저편으로 밀어내고 다시 도전해볼 용기를 내도록 해준다.
저자의 당부대로 먼저 여행짐을 꾸렸다. 나는 이제 열한 곳의 유럽 도시와 고대 그리스로 떠날 테니까!
하지만 사뭇 경쾌한 발걸음으로 떠난 '여행'은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이 여행의 무게가 그리 가볍지 않음을, 아니 상당히 무거울지도 모름을 느끼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경치나 보고 즐기자고 떠난 여행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철학 여행'이니까.
저자는 이 철학 여행의 목표를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살면서 한 번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여행 목표만 보고도 그 무게가 느껴지리라 생각된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만큼 답도 없고 어려운 질문이 있을까? 그런데 이제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이 여행을 떠나자 한다. 처음의 경쾌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사뭇 비장해진다.
그리고 닷새 정도에 걸쳐 대단원의 '철학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어떤 도시를 다녔으며, 어떤 철학 사상을 보고 들었고, 어떤 철학자를 만났는지는, 책 소개에 나와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사실 그걸 정리하기에는 아직 나는 '철학을 너무 몰라~'가 진심이겠지만.)
이 여정에는 정말 흥미로워 정신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닌 곳도 있었고, 엄청난 무게감에 짓눌려 한 줄 한 줄 천천히 따라가며 잠시 쉬었다 가고 싶은 곳도 있었다. 아, 이런 게 철학의 묘미로구나 하며 열심히 밑줄 긋고 황홀한 마음으로 읽은 부분이 있었는가 하면, 아, 역시 철학은 너무 어렵구나 하며 흰색은 종이요 검은색을 글자,라는 심정으로 읽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해 떠난 여행길일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으로만 충만할 수는 없는 법. 이번 '철학 여행'도 그런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굴곡이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나 같은 철학 문외한도 겁없이 덤벼들 수 있도록 매력적인 소재로 접근했다는 점이었다면,
그 다음 매력은, 이 책을 읽고 나면 철학이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될까?
이 책에서 소개해준 데카르트의 <방법 서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읽고 싶어졌으니까. 앞으로는 다른 철학책도 과감히 도전해 볼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생겼으니까.
물론 책 속에서 만난 여러 철학적인 내용들이 무척 어려웠고, 정말 철학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읽기에는 힘든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말했다시피 나는 철학을 '하나도' 모르지 않는가. 어떻게 전혀 모르는 분야에 접근을 하면서 그저 쉽고 재미있기만을 바란단 말인가. 나의 '도둑놈 심보'가 부끄러워지고, 그런 나의 마음가짐을 반성할 수 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꾸짖기라도 하듯, 여행에 앞서 말한 저자의 한 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남이 먹기 좋게 꼭꼭 씹어서 한입에 넣어 주는 철학은 생명력이 약하다."(당연히 이 책에서는 그렇게 '꼭꼭 씹어서 한입에 넣어 주는' 밥은 없다.) 그러니 이 책은 내 스스로 꼭꼭 씹어가며 몇 번이고 읽어 생명력이 강한 철학을 내 안에 키워야겠다.
나처럼, 철학을 어렵게만 느끼고 선뜻 접근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철학을 만나보라고 적극 권해주고 싶다.
후회하지 않는 철학 여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