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행
시노다 세츠코 지음, 김성은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살다보면 어디론가 떠나고픈, 그것도 단순히 떠나고 싶은 게 아니라 ‘도피’하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쯤은 찾아오지 않을까? 나는 일상 속에서 자주 도피를 꿈꾸곤 한다. 아주 나약한 이유로, 단지 눈앞에 닥친 아주아주 자그마한 현실을 피하고 싶어서. 실제로 ‘도피행’이라 불릴 만한 선택을 해 본 것은, 2003년 2월 말에 중국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던 일정을 조금 앞당겨 2월 중순에 출발했던 것 정도이다. 실제로는 ‘도피’를 할 배짱도 없다는 것이 참 서글프다.

 


<도피행>, 2003년 2월 그 당시 나름대로 복잡해 미칠 것 같았던 그때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제목에 끌렸다. 이 책 속의 주인공은 어떤 이유로 도피를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스멀스멀. 지금도 때때로 도피를 꿈꾸는 나는, 이 책 속의 주인공과 함께 도피행에 오르기로 했다.


 

후루야 타에코, 쉰 살, 얼마 전에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다. 남편은 타에코가 마흔이 되었을 때부터 “마누라는 이제 여자로서는 끝났으니까”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고, 두 딸들도 툭하면 ‘갱년기니까’라는 말을 하기 일쑤다. 두 아이를 품었던, 그녀를 엄마가 되게 해 주었던 자궁을 덜어내고 나서도 그녀의 맘을 위로해주는 것은 골든 레트리버 포포뿐이다. 어느 날 포포가 자기를 괴롭히던 이웃집 아이를 물어 죽인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포포 측’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나오는 보도를 통해 ‘살인견’ 포포는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게 되지만, 가족들 누구도 이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 포포를 지키고자 하는 타에코와 ‘살인견’이 된 포포. 그렇게 이 둘의 도피행이 시작된다.


 

그런 둘의 도피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한 기자가 있다. <주간 펄슨>의 다마키 겐이치. 소설 속에서의 비중이 큰 인물은 아니지만, 그가 기어이 타에코의 도피처까지 찾아와 던지는 질문이 어쩐지 가슴 속에 오래 남는다. “요컨대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이렇게까지 하면서 애완견을 지키려는 당신의 뜻은 무엇인가 라는 점입니다.” 그녀에게 포포는 어떤 의미였을까? 어째서 그녀는 가족들을 다 ‘버리고’ 그렇게까지 포포를 지키려고 했던 것일까? 요즘같이 ‘가족’이라는 의미가 무색해지는 시대에 그녀에게는 포포만이 ‘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가족들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우리 가족은 자칭 타칭 ‘화목한 가족’이지만 그래도 예전만 같지 않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특히 그 안에서 우리가 무수히 희생시켜왔던 그 역할, 엄마.


 

이 책을 읽으면서 며칠 전에 읽은 신경숙 작가님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자주 떠올렸다. 우리는 엄마의 존재를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다이 짱이 웃으면서 내민 상자는 무거웠다. 얼음이 가득 담긴 상자였다. 그러나 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젊은 여성들은 주부를 우습게 보지만 실제로는 그 나이 여자들보다 힘이 좋다. 오른팔에 첫째를, 왼팔에 둘째를 안고 장을 보러 다녔다. 쌀이나 배추, 우유나 등유도 결혼하고 나서는 근처 가게에서 혼자 사들고 왔다. 남편이나 딸들은 내 부탁을 들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청소 때 옷장을 옮기는 것도, 빡빡해서 안 열리는 차고 문을 떼어내는 것도 전부 타에코의 몫으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이 모습이 과연 타에코만의 모습일까? 당장 나도 이 위로 겹쳐지는 우리 엄마의 모습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 엄마들이 ‘가족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고독한 건 더 살벌’하다고 느끼기 전에, 우리 가정에서 엄마의 위치를 다시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말해두겠는데 내 이름은 부인이 아니에요.” 누구누구의 부인이나 누구누구의 엄마가 아닌, 한 인격체로서의 우리 엄마들의 모습을 말이다. 타에코와 포포의 이 특별한 도피 이야기를 우리 가족들과 같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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