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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바람이 되다 - 집시처럼 떠돈 289일, 8만 3000Km 아메리카 유랑기
김창엽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여행의 계절을 보내면서 많은 여행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나도 적지 않은 여행서를 접하고 있다.
허나 이 책 <길 위의 바람이 되다>는 '여행서'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뭔가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 마음 속 책꽂이에서도 여느 여행서들과는 다른 한 켠에 자리한 이 책은, 책 표지에도 쓰인 '유랑기'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책이다. 정처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닌 이야기. 이는 여행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전적인 의미만 봐도 '여행'은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인데, 이 책의 저자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 것은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한 것이 아니라 '정처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닌' 것이기 때문이다. 제목 그대로 길 위의 바람이 되어, 불고 싶은 방향으로 이리저리 정처없이 떠돌았다.
20년 가까이 신문기자 생활을 했던 저자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역마살을 어찌하지 못하고 '이국의 하늘 아래서 죽음을 맞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2006년 8월,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이미 2000년부터 6년을 미국에서 보낸 뒤였지만, 이번의 미국행은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소망했던 '떠돌이'가 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깨달음을 갖고 돌아오라'는 아내의 당부에 '그냥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오는 걸로 만족해달라'며 떠난 길이었다. 이번 여행길에서 그와 함께 한 것은 그의 발이 되어주고 잠자리가 되어주고 보호막이 되어준 미니밴 한 대와 약간의 짐과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그가 챙겨간 것은 그 정도뿐이었지만, 실상 그와 함께한 것은 미국이란 대륙의 광활한 대자연이었다. 미국의 산과 들과 물과 바람과 바위가 그와 함께 했다.
2006년 늦여름 샌타바버라에서 출발한 저자의 '유랑'은 2007년 초여름 시애틀에서 막을 내렸다. 장장 289일 동안 거대한 미국 대륙의 이곳 저곳을 열심히 떠돌았다.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러 구경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그저 열심히 내달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함께 속도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감을 중시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일정을 하루 이틀 줄이는 데 있지 않다. 먼 여행길에서 옷깃을 스치듯 나눈 인연에 더 많은 여운이 있고 더 많은 얘기가 자리잡듯이, 가벼운 만남이 불러오는 끝없는 상상을 즐기고 싶은 게 내가 속도를 내는 이유다.' 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광들이 주는 무한한 상상. 바로 그 상상을 즐겼던 것이다. 또한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즐기고, 콘크리트 구조물이 가득한 도시보다는 자연에 훨씬 애착을 느끼는' 스타일은 나와도 잘 맞아 나는 저자와 함께하는 이번 미국 여행길이 별 다섯 개도 부족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자이언캐니언의 천지개벽을 연상케하는 아침 풍경, 수피리어 호수의 안온한 일출, 빠져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마이애미의 비췻빛 바다, 미시시피 강의 동서로 펼쳐진 대평원, 사람의 존재를 모래 한알과 같이 만들어버리는 콜로라도 고원...책 속의 사진 한 장과 몇 줄의 글로 만나는 모습들이었지만 내 가슴에는 내내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내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I ♡ NY'이라는 이미지로 대표되는 거대한 도시 뉴욕이었다. 미국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어 떠오르는 것도 많지 않지만 그 외에 연상되는 것도 전부 고층빌딩 숲 사이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대도시의 모습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나면서 아메리카 대륙이 품고 있는 대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바로 이것이 미국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던 '미국=I♡NY'이라는 이미지는 이제 장엄한 대자연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내가 미국을 방문할 일이 생긴다면, 이 책 속에 나와있는 것 같은 대자연의 이미지를 느끼러 가고 싶다. 그때가 되면 나도 저자처럼 열심히 달려야지. 그리고 그 짧은 만남이 주는 무한한 상상 속으로 빠져보고 싶다.
* 책 속 밑줄 긋기.
- 세상은 때때로 넋을 놓고 봐야 아름답다. (p.28)
- 산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그런 세상을 한동안 보고 있노라면 이번에는 내가 달라진다. 한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면 세상도 세상일 터다. 그렇다면 변한 것은 애초부터 세상이 아니고 나였을 것이다. (p.107)
- 세상에 안 미친 사람이 어디 있나요.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미쳐서 살지요. (p.112)
- 고향, 내 것, 우리 것은 절실한 것이다. 마이너리티라면 특히 사무치게 그리운 대상이기도 하다. 집을 떠나와 밖으로만 나돌면서 문득문득 그런 것들이 떠오를 때면 뼛속이 다 시린 듯 절절한 심정이었으니까. (p.131)
- 나의 존재를 한없이 가볍게 한 것은 아마도 억겁의 땅이 가진 심원한 무게였을 것이다. ... 콜로라도 고원에서 사람의 존재는 바위 꼭대기에 앉아 있는 모래 한알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한순간 존재하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져서 이런저런 원소들로 낱낱이 분해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게 유기물의 한계이고 보면, 모래 한알만도 못한 게 인생사인지도 모른다. (p.284)
- 현실은 때때로 꿈의 천적이다. 단 한 번의 망치질로 꿈을 산산조각 내는 힘이 있다. (p.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