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였던....)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엄마가 베란다 창고에서 커다란 박스 두 개를 꺼내왔는데 그 안에 일기장, 상장, 스케치북 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이사를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그동안 이걸 버리지 않고 이고지고 다녔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쓴 일기장이 모두 남아 있었다.(초등학교 5,6학년 때 일기장이 없는 걸 보면 고학년 때는 일기 쓰기 숙제가 없었나보다.)


일기장을 대충 정리만 하고 집어넣었어야 했는데 나는 일기장을 열어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집정리 십계명 중 하나가 '추억의 물건은 절대 들춰보지 말 것'인데 나는 그 금기를 어겼다. 그리하며 어제 밤 늦게까지 초등학교 때 쓴 일기를 읽느라 늦게 잤다. 나름 힘들었고 나름 즐거웠던 초등학교 때의 내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 과거와 단절된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일기장을 보니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가 조금이나마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매니아였다. 이 프로그램의 첫 화가 방영하기 전에 예고편만 보고도 마음을 홀딱 뺏겼었는데 학교 걸스카우트 야영날이랑 딱 겹치는 바람에 첫 화를 본방으로 보지 못 해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엄마한테 첫 화를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해달라고 부탁했고 야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1화를 봤다.


나는 혹시나 이 기억이 조작된 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었다. 왜 그런 이야기 있지 않은가.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911테러와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 당신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어디에서 누구와 무얼 하고 있었다'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전혀 틀린 기억일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 말이다.


나는 혹시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첫 화를 집에서 본 게 아닐까, 걸스카우트 야영 때문에 첫 화를 못 봤다고 나 혼자 착각한 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일기장 안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 일기에 걸스카우트 야영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그 날이 바로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첫 화가 방영한 날이었다!!! 야영 때문에 토요 미스테리 극장을 챙겨보지 못 한 게 확실했다. 사람의 기억은 불확실하다고 하지만, 어떤 기억은 놀랍도록 정확하다.


언니가 탕수육 먹다가 토한 사건도 내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이건 내가 기억하는 사건은 아니고 언니가 기억하고 있는 일인데 내 일기장에 꽤나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 깜놀했다. 이걸 내가 일기장에 적은 것도 기특하고 그 오래된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언니도 참 대단했다.


엄마가 창고에서 너덜너덜한 박스를 꺼냈을 때는 어우 저걸 왜 아직도 짊어지고 다니는 거야, 이러면서 살짝 싫어했는데 다 커서 일기장을 보니까 재밌긴 참 재밌다. 이래서 그 당시 선생님들이 일기 쓰라고 닦달을 했나 보다. 그것이 30년 후를 위한 큰 그림이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재밌는 건 둘째 문제고, 손도 대기 싫을 정도로 낡아버린 일기장들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 했다. 가장 좋은 건 사진 찍고 버리는 건데 수십 권의 일기장들을 반듯하게 펼쳐놓고 정갈하게 사진 찍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눈 딱 감고 버려 버리는 게 제일 좋은데 차마 그럴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쌓아두기에는 나의 미니멀리즘 성향이 견디지 못 한다. 아아아 괴롭다.


이래서 미니멀리즘 전문가들이 추억의 물건은 제일 마지막에 정리하라고 하는 거다. 추억의 물건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정리 작업은 올 스톱이다. 지금 다른 것도 정리할 게 많은데 일기장 때문에 다른 것에 손도 못 대고 있다. 거실에 널어놓은 너덜너덜한 공책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유튜브 쇼츠만 보고 있는 거 실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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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2024-11-1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옛 추억을 되살려주는 일기장에 관한 너무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Laika 님의 글 「어떤 기억은 놀랍도록 정확하다」를 읽고 많은 분이 공감하고 추억 속에 잠길 것 같네요. 이런 좋은 글이 나오게 된 건 Laika 님의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네요. Laika 님의 어린 시절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옛 일기장,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중에 또 들춰 보면 어떤 추억과 영감을 불러일으키겠죠. 저 같으면 못 버리겠어요. 종이로 된 기록이 디지털로 된 전자 문서 기록보다 훨씬 오래간다고 하죠. 감사합니다. 건필하시고요. ^^

2024-11-21 2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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