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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평점 :
패니 플래그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읽었다. 동명의 영화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고 책으로 먼저 읽게 되었다. 한동안 절판이었던 모양인데 최근에 새 표지를 입고 다시 나왔다. 전자책도 나왔길래 냉큼 구입했다.
이 책은 1980년대, 에벌린과 니니 스레드굿 부인의 대화로 시작이 된다. 에벌린은 시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로즈 테라스 요양원에 왔다가 니니를 만나게 된다. 니니가 에벌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에벌린은 처음에 니니의 이야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니니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니니가 해주는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휘슬스톱 카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지 스레드굿과 루스 제이미슨이 운영하는 그 카페는 기찻길 부근에 위치하여 오고 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이지가 그 카페를 열었을 때는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던 시절이었다. 가난하고 배가 고픈 떠돌이 손님들이 휘슬스톱 카페로 찾아와 먹을 것을 주면 허드렛일을 해서 갚겠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지는 그런 손님들을 단 한 번도 문전박대하지 않았다. 흑인이 음식을 팔아달라고 찾아와도 무시하지 않았다. 그 시절, 흑인은 백인과 함께 어울릴 수 없었다. 흑인은 철저하게 고립되고 분리되어 백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만 활동해야 했다. 이지는 흑인들을 위해 뒷문에 메뉴판을 새로 달았다. 그들을 앞문으로 들여 테이블 위에 앉혀 음식을 먹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자신들은 물론 그 흑인들마저 위험해지는 상황에 처해질 수 있어서 할 수 없이 뒷문으로 음식을 팔게 된 것이다.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그저 소소하고 일상적인 일들로만 채워지진 않는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비일상적인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철길에서 놀다가 목숨을 잃거나 팔을 잃기도 하고, 2차대전에 참전하여 비극적인 사건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KKK단이 돌아다니면서 흑인들을 위협하고는 했고, 남편이 부인을 때려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 시절이었다. 이지와 루스를 비롯한 휘슬스톱 카페 사람들은 그 시절을 그저 무기력하게 흘려보내지 않았다. 개인이 사회 전체를 뒤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몇 사람만은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 주인공들은 알고 있었다. 이지와 루스, 그리고 십시와 온젤, 빅조지 가족은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때론 잔인하고, 때론 따뜻했던 그 시절을 헤쳐나간다.
작가는 미스터리한 사건 두 가지를 던져주고 끝까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하나는 대공황 시절 기차에서 물건을 훔쳐 흑인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길바닥이 던져주던 도둑 ‘레일로드 빌’이 누군인가 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이다. 특히 살인사건과 관련된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괴이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풍기니...이 소설을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 소설에서 느껴지는 주요한 정서 중 하나는 ‘쓸쓸함’이다. 1980년대, 요양원에 들어와있는 니니 스레드굿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휘슬스톱 카페가 존재했던 과거 그 시절을 추억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니니의 이야기를 듣는 에벌린 역시 휘슬스톱 카페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그들을 마치 친구처럼 느낀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비록 역사가 개인에게 잔인했을지언정 개인은 서로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했던 시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에벌린은 자신이 살아가는 1980년대가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정숙한 여자 프레임에 갇혀서 정작 자신의 인생은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가족들은 전부 남처럼 느껴지고, 마트에서 웬 양아치 청년에게 욕을 먹기도 한다. 에벌린은, 도대체 세상이 왜 이따위로 망가져버린 건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트린다.
‘과거와 현재’의 대결은 불공평한 싸움이다. 과거는 언제나 힘이 세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에도 '요즘 것들은 예의가 없고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는 말이 적혀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파피루스에 진짜 그런 내용이 있었는지 진위 여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현재는 거지 같은 것이며, 요즘 애들은 언제나 예의가 없고, 세상은 계속해서 망가져 가고 있다'는 인식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고 규정해버리면 나머지 삶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후에 남는 것은 '쓸쓸함'이라는 감정 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함정에 빠질 뻔했던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과거는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현재는 왜 이렇게 거지 같은 거람?!!!
하지만 이 소설은 지나간 시절에 대해 추억하면서도 마냥 쓸쓸하게만 끝나지는 않는다. 1980년대를 살아가는 에벌린 카우치라는 인물 덕분이다. 에벌린은 니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비록 현재를 구성하는 그 모든 요소들이 짜증이 나긴 하지만, 에벌린은 자신에게 남겨진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니니로 인해 변화하게 되는 에벌린 카우치 덕분에 이 소설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소설은 계속해서 과거의 휘슬스톱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가장 소중한 것은 현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에벌린 카우치, 무슨 말을 그렇게 하우. 당신은 아직 젊어요. 마흔여덟 살이면 아직 아기일뿐이라고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잖아요! 메리 케이는 나이를 상관 안 해요. 그녀 역시 햇병아리는 아니거든요. 자, 내가 에벌린이라면, 그리고 에벌린처럼 피부가 곱고 에벌린 정도 나이라면, 캐딜락에 도전해 보겠어요. 물론 운전면허를 따야하겠지만 어쨌든 도전은 해 볼 거예요. 생각해 봐요, 에벌린. 에벌린이 나처럼 오래 산다면 앞으로 살 날이 37년이나 남아 있어요."】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에게 이곳에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음, 있어요, 가끔 느껴요.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렸으니....가끔 교회 사람들이 보러오긴 하지만 그저 안부 인사나 나누고 가 버리죠.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만나고 작별하는 거죠. 가끔 클리오와 어린 아들의 사진을 보면서 지난 일들을 그려 본답니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스레드굿 부인은 에벌린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힘이에요,에벌린. 꿈, 내가 보낸 시절에 대한 꿈이죠."】
두꺼운 책인데도 흡입력이 굉장해서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여행 버킷 리스트에 '미국 남부에 가서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먹기'를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