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두꺼운 벽돌책을 숙제 하듯이 읽었다. <미들마치2>는 '이달의 적립금' 이벤트 때문에 3월10일 전에 다 읽고 백자평을 남겨야 하는데 현재 30% 정도 읽었다. 그 와중에 밀리의 서재에서 <듄>이 곧 내려간다고 해서 부랴부랴 다운로드 받았는데 내가 가진 전자책 리더기에서 열리지 않아 태블릿으로 읽고 있다. 눈이 시려서 화면 밝기를 최저로 했다가 배경색을 노란 색으로 바꿨다가 태블릿을 멀리 두고 읽다가 사선으로 읽다가 아주 쌩쇼를 했다. 눈이 아파서 좀 쉬어야겠다 싶으면 다시 리더기를 들고 <미들마치>로.


벽돌책을 동시에 읽다보니 머리에서 과부하가 왔다. 책을 떠나 유튜브 어플을 켰는데 알고리즘이 나를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다룬 영상으로 이끌었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본 책이다. 흥미롭게 읽기는 했지만 그때 나에게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갑자기 이 책이 너무 좋아졌다. 이 책이야말로 내가 찾던 그 책이 아니겠는가. '읽고 싶은 모든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는 책이 나에게는 절실했다.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사야했다. 이렇게 나에게 영감을 준 책은 사야만 했다. 물론 나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읽어봤을 뿐이고 지금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으며 유튜브에서 책과 관련된 영상을 봤을 뿐이지만, 읽지 않고도 어떤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 책의 논지에 따르자면, 나는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써도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지금 해외에 있기 때문에 일단 엄마에게 곧 내 이름으로 된 택배가 갈 거라고 말해두고 책 쇼핑에 돌입했다. 나는 모든 책을 전자책으로 읽는 사람인데 안타깝게도 이 책은 전자책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는데 현재 판매중지 상태다. 할 수 없이 종이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내친 김에 피에르 바야르의 다른 저작들도 훑어보다가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와 <햄릿을 수사한다>도 함께 장바구니에 넣었다.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커로드 살인사건에 대한 책인데 내용이 아주 신박하다. 피에르 바야르 본인이 봤을 때는 이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여러 저작들을 통해 독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자고 주장한다. 남들이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말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책과 만나자는 것이다. 두꺼운 벽돌책을 쫓기듯이 읽다가 피에르 바야르를 만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셜록홈즈가 틀렸다>까지 구매했다. 피에르 바야르의 추리비평 3부작에서 책 하나가 빠지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였다.


<셜록홈즈가 틀렸다>는 절판인데 다행히 알라딘 중고서점에 있었다. 배송비 2500원 내고 주문할까 2만원을 채울까 고민하다가 2만원을 기어이 채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채링크로스 84번지> <인도 야상곡> <독서의 역사>를 중고로 구입했다.


<독서의 역사>는 개정판이 새로 나왔던데 역시나 개정판은 비싸다. 그래서 구판 중고로 저렴하게 구입했다. 요즘 개정판이 나오면 책값이 너무 오른다ㅠ하지만 진짜 문제는 개정판이 안 나오고 아예 절판이 되어버리는 사태다. 사실 피에르 바야르 책도 절판 가능성이 높아보여서 급하게 구입한 측면도 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그래도 계속 찍어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추리비평 3부작의 나머지 책들은 왠지 시중에 있는 책이 다 소진되면 절판될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가는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하게 부모님 댁으로 택배를 보낸 것이다.


위에도 썼다시피 이 책들은 전자책이 존재했다가 사라졌다. 알라딘 장바구니에서 '전자책 확인' 버튼을 누르면 전자책이 있다고 나오는데 전자책을 장바구니에 넣고 나면 '판매중지'라는 문구가 뜬다. 그동안 전자책의 절판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전자책이야말로 절판이 가장 빠르고 수월한 분야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 왔다. 


종이책의 경우 출판사와 작가와의 계약 기간이 끝나더라도 이미 책으로 만들어져서 시중에 깔린 물량은 계속 판매가 될 것이다.(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혹 서점 매대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중고책 시장이 있기 때문에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전자책은 계약한 기간이 끝나면 바로 판매중지가 되고 그렇게 사라진 전자책은 구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동안 전자책은 디지털 파일이니까 계속 판매하는 거 아닌가,라는 나이브한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전자책도 사라진다. 그것도 종이책보다 더 쉽게 사라진다.


그동안 나의 전자책 구매 패턴에는 문제가 조금 있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구독 서비스와 전자도서관을 검색해보고 거기에 없는 책들만 구입해왔던 것이다. 내 돈을 쓰면서도 언제나 최선이 아니라 차선에 머무르는 느낌이었다. 그러한 구매 패턴을 완전히 뜯어 고치기로 했다. 지금 현재 어딘가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진짜 좋아하는 책들은 판매 중일 때 미리 사놔야만 그 전자책이 판매중지가 되어도 읽을 수 있다.


보관함을 뒤지면서 만약 판매중지가 된다면 아쉬울 책들을 추렸다. 그 과정에서 보관함과 장바구니를 싹 재정비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예전에 흥미가 생겨서 담아뒀는데 지금은 관심이 없어진 분야의 책들이 너무 많아서 진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요즘 화술에 약간 관심이 있는데, 말을 잘 하려면 쓸데 없는 말들을 하지 않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그 원칙은 독서에도 적용된다. 책을 잘 읽으려면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에 시간을 뺏기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취향에 휩쓸려 이 책 저 책 손 대고 다니다가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해진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피에르 바야르는 '모든 독서는 비독서'라고 했다. 


보관함에 있는 책들을 아주 과감하게 정리했다. 꼭 사서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은 장바구니에 담아두었고 빌려봐도 괜찮은 책들은 보관함에 담아두었다. 이북 적립금 들어올 때마다 이거 살까 저거 살까 고민하지 말고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 중에서 절판 가능성이 있는 오래된 책부터 후딱 후딱 구매할 예정이다.


보관함이랑 장바구니 정리하느라 오늘은 책을 한 장도 못 읽었다. 하지만 책에 대해 그 어떤 때보다 많은 생각을 했다.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고 읽지 않는 것도 독서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4-03-01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책은 한번도 안 읽어봤지만, 저도 언제나 파는 거 아닐까 했어요 그게 아니군요 계약 기간이 끝나면 안 파는군요 한국 작가 책은 어떨지... 그것도 팔다가 안 팔기도 할까요


희선

Laika 2024-03-01 09:34   좋아요 1 | URL
저도 잘은 모르지만, 한국 작가의 전자책도 아마 계약이 끝나면 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판매할 때 미리 사놔야하는 것 같아요. 언제 절판되고 판매중지될지 모르니까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