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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1월
평점 :
이 소설의 배경은 타이완의 작은 마을인 용징. 혹독한 가부장제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그곳에서 딸만 다섯이 태어났다. 그 후에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들 둘이 더 태어난다. 천씨 집안 7남매 중 막내인 천톈홍은 누가 봐도 작가 본인을 투영한 인물인데 작가는 일인칭 시점을 사용하지 않고 '그'라고 지칭한다.
그는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으며 동성연인 T가 있다. T는 그가 떠나온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떠나온 용징이 어떤 곳이었는지 생각한다. 그곳은 귀신들의 땅이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소설 배경이 몇 년도인지도 모르겠고 약간 모호한 기분으로 소설과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모호한 가운데에서 작가는 초반부터 강력한 떡밥들을 던진다. 용징에는 귀신이 많은데 특히 여자 귀신을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도 여자 귀신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부터는 자세를 고쳐 앉고 집중하게 된다. 그가 살았던 용징과 그의 집안이 겪었던 일들이 보통 일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사악 스며든다.
[ T에게 자신이 이런 귀신들의 땅에서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했을까. 자신의 황당한 신세를 어떻게 말해야 했을까. 누나 다섯에 형 하나, 좀처럼 말이 없는 아버지, 이러쿵저러쿵 끊임없이 얘기를 늘어놓는 엄마, 뱀 잡는 이웃, 빨간 반바지 차림의 징쯔총, 물웅덩이, 혼례, 추풍나무, 백악관, 하마, 용싱 수영장, 지하실, 양타오 과수원, 청자오마, 밍르 서점, 은색 물탱크 탑을 어떻게 설명해야 했을까. ]
소설 극초반에 나오는 문장인데 이 소설은 앞으로 이 사람과 장소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살해, 교도소, 자살, 화재 등등 귀신도 놀라 도망칠 천씨 집안의 잔혹사가 펼쳐진다. 작가는 한번에 모든 걸 설명하지 않고 약간씩 떡밥을 던진다. 그 떡밥들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 회수한다. 책이 1, 2,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3부부터는 숨도 안 쉬고 읽었다.
누구나 유년 시절에 대해 쓰고 싶은 이야기가 한두개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좋았던 일이든 슬펐던 일이든 누구에게나 강렬한 기억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너무 생생해서 과거를 재현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용징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용징의 흙먼지, 나무를 갉아먹는 흰개미들의 소리, 여름의 끈적끈적함, 먹어본 적도 없는 양타오 탕이 떠오른다.
이 소설은 매 챕터마다 중심 인물이 바뀐다. 천톈홍을 포함한 7남매,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데 다 읽고 나면 커다란 퍼즐 조각이 차라락 맞춰진다. 각 챕터가 누구를 중심 인물로 내세우냐에 따라 그 챕터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천톈홍과 샤오촨이 만나는 모든 장면들이다.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여성 스트리퍼다. 타이완 시골 마을에 무슨 스트리퍼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타이완 문화라고 한다. 할말을 잃었다. 세상은 넓고 희한한 문화는 차고 넘친다. 물론 이미 없어졌겠지만은.
이 소설을 보면서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생각났다. 4시간 길이의 영화라서 OTT로 보다가 포기할 뻔 했다. 타이완 역사에 아주 약간의 관심이 있었기에 허벅지 찔러가면서 끝까지 봤다. 등장인물들 설정과 시대 배경이 다르기는 한데 그래도 소설을 감상하는 데 1그램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 미치게 하는 그 억압된 분위기를 여기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영화에서도 그렇고 이 소설에서도 그렇고 학교가 학생을 가르치는건지 조폭을 기르는건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사실 한국도 걸어왔던 길이라서 그런지 어떤 부분은 '오오 한국이랑 비슷해' 이러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이건 정말 심한데' 싶기도 하다.
여기서부터는 책과 관련없는 쓸데없는 이야기다.
이 책에는 '구아버'가 등장한다. 처음 봤을 때는 '구아바'를 잘못 쓴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구아버'라고 쓰길래 이게 뭔일인가 싶어서 네이버 국어사전을 검색했더니 guava의 올바른 표기가 '구아버'라고 한다. guava는 누가 봐도 '구아바'인데 '구아버'가 올바른 표기법이라고 하니 충격 받았다.
이 책은 주석이 많은 편인데 주석을 누르면 팝업으로 떠서 전자책 읽을 때 편리했다. 주석이 맨뒷장에 있고 왔다 갔다 하도록 만든 전자책이 제일 싫다...ㅜ 다행히 이 책은 그런 문제는 없었다.
민음사 블로그에 이 소설과 관련된 타이완 풍속을 정리해놓은 글이 있는데 읽어볼만 하다. 빈랑과 베틀후추, 삼합원 등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다만 조선일보에 실린 작가 인터뷰 전문은 완독 전에는 피하는 게 좋다. 기자 질문에 소설 결말에 대한 스포가 있다. 인터뷰는 책 다 읽고 나서 보는 게 맞기는 한데, 이 책은 워낙 천톈홍이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져서 중간에 작가 인터뷰를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꾹 참고 인터뷰는 나중에 읽길 정말 잘했다. 참고로, 소설에 나오는 천톈홍의 누나는 다섯 명, 작가 천쓰홍의 누나는 일곱 명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