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제국 - 개정판
이인화 지음 / 세계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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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직후에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읽게 되었다. 우리 역사를 소재로 실체와 허구를 넘나드는 작가의 재주에 탄복하며 하룻밤 새 이 소설의 막바지까지 내리 읽어갔었다. 어찌된 이유인지 소설의 결말을 앞두고 나는 책을 내려놓았고 그 후 십 수 년이 지나도록 [영원한 제국]은 내게 미처 다 읽지 못한 소설로 남아있었다. 그토록 재미있어 하면서도 왜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보지 못하였을까? 내 스스로는 너무 재미있기에 독서를 끝내기가 아쉬웠다고 되뇌었지만 그것은 정확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때가 93년이니 이제 십삼 년이 지난 뒤에 나는 다시 집구석에서 햇볕에 바랜 [영원한 제국]을 다시 꺼내 들었다. 


여러 가지 숙제로 머리가 번잡한 시기였다. 과거의 그날처럼 [영원한 제국]의 이인몽은 다시 날 정조 24년의 어느 날로 귀환시켰다. 이제 대학교수가 된 이인화는 이 소설로 인해 한국 소설의 구원자로 비쳤다. 지식이 없고 관념만 난무한 책받침의 시화같은 한국 소설에 진저리쳤다.  [영원한 제국]을 읽고 우리에게도 이처럼 뼈대가 굳고 근육이 단단한 문학이 있음을 감사하게 했다.  [영원한 제국]은 한국 문학의 신세계로 보였다. 그러한 감동은 지금도 여전하다.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립 속에서 왕권의 회복을 통해 나라의 부흥을 꿈꾸는 이인몽의 꿈, 그와 맞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론 심환지의 갈등구조는 여전히 독자를 흥분시킨다. 고루하게 '황공하옵니다. 마마'만 외치는 줄 알았던 조선 조정의 희미했던 이미지는 검은 뿔테 안경을 코에 걸쳐 쓴 정조대왕의 모습으로 색채와 음영이 생겼다. 조선중기의 정치 철학과 사회상에 대해 그 어느 역사책보다 [영원한 제국]은 더 깊은 이해를 주었다. 영원한 제국의 생동력은 10여년이 지나 21세기가 된 오늘에도 왕성하다. 여전히 독자를 흥분시키고 각성시켜주었다. 어쩌면 죽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헌사인 이인화의 [인간의 길]은 이 [영원한 제국]에서 씨를 뿌렸을지 모른다. 저자는 현군(賢君)의한 절대정치가 근대화로 가는 역사적 절차임을 주장했다. 그렇기에 저자는 정조대왕의 20세기판 현신을 박정희 대통령으로 간주했을 것이라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지로 [영원한 제국]의 구판(舊版)본 266쪽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홍재(정조 대왕)유신에 실패함으로써 우리 민족사는 160년이나 후퇴했다. 우리의 불행은 정조의 홍재 유신 대신,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경험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은 것으로, 현명한 왕법이 지배하는 절대왕정 대신, 조야하고 참혹한 개발 독재를 겪은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길]을 집필하면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2006년에 개정판을 내면서 이 부분이 글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왜 나는 90년대의 어느 밤 [영원한 제국]을 중도에 읽지 않았을까?


아마 나는 소설의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해서였을 것이다. 이인몽의 선택과 행동에 그만큼 공감했기에 그의 품은 청운의 꿈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차마 바라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구재겸이란 별기군이 이인몽의 집에 난입하면서 주인공이 의지와 행동에 주체성을 잃었기에 흥미를 없어진 면도 있다. 즉 노론의 계략에 흔들리며 무력해진 주인공의 행보가 이 소설의 플롯 마지막 부분에 박력을 잃게 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출간 당시에 [장미의 이름]을 비롯한 외서를 모방했다는 구설수가 있었지만 이는 꼬투리를 잡기 위한 시비이다. 오히려 [영원한 제국]은 그 후에 등장한 역사 소설의 귀감이 되었다. 이정명의 [뿌리 깊은 나무]는 '제국'의 그림자 없이는 결코 등장할 수 없었던 소설이라 생각한다. [영원한 제국]은 이처럼 시효로서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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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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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은 클리세로 가득판 영화이다. 액션이라기 보다는 남성의 환타지가 투영된 인물이 007이란 스파이다.  본드걸은 그 007의 환타지에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이다.  오현종이란 소설가가 이러한 007의 환타지에 딴지를 걸었다.


매번 본드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007과 본드걸은 그 뜨겁던 정사 후에 어떤 관계가 되었을까? 다음 시리즈로 넘어가면 당연히 교체되는 본드걸의 운명을 거부한 미미하는 한국 여인이 있다면... 때마침 007도 토종 한국인이라면 우리는 이제 어떤 내러티브를 만날 수 있을까?


오현종은 이런 독특한 발상으로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사실 그리 대단한 발상도 아니다. 창작의 샘이 메마른 헐리웃의 프로듀서들이 후편(sequel)을 만들어내는 것도 모자라 전편(prequel)을 만들어낸 것이 최근의 일이다. 오현종의 발상이 특이한 점은 후편과 전편 사이인 중편(midquel)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시리즈와 시리즈 사이에, 임무와 임무 사이에 007의 사생활은 어떠했을까'하는 작가의 발상이 미미라는 본드걸은 만들어냈다.그녀의 발상에 마음이 동한 독자는 작가에게 후한 점수를 쳐주시라. 아마 그러한 작가의 발상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펴들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마케팅의 소임은 다한 것이고 우리는 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평가할 차례다.


책장을 덮고 난 소감은 풍자라고 하기엔 그 수준이 낮고 스파이물이라고 하기엔 치밀하지 못하며 페미니즘류라고 불리기엔 너무 진부한 소설이다. 발상은 기발하되 문학적인 성취가 별로다. 어떤 이들이 문학적인 성취가 무엇이냐고 질문할텐데 글쎄 그 질문은 평론가들에게 해주길 바란다. 나는 정통으로 문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학에 심취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한 예술에 내가 슬며시 딴지를 걸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문학은 문학대로 영화나 다른 비디오 매체와 달리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미의 모험]을 읽고 난 소감은 이 소설은 구태여 책으로 읽지 않고 얼마 있으면 영화화될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나으리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이미 한 영화사에서 판권을 구입했다고 하니...)


아마도 영화는 그 런닝타임인 100분을 알차게 메우기 위해 작가의 여백이 많은 텍스트를 채워 넣는 작업을 할 것이다. 그 어느 영화화된 문학처럼..아무리해도 이 소설은 영화가 작가의 텍스트를 충실히 구현하지 못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소설가가 키치적인 접근을 했다고 해서 그만으로 칭찬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키치라는 접근이 상업화된 자본주의 마케팅의 소산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있게 나설 것인가? 반대로 통속 소설이라해서 함부로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 스티븐 킹이나 이선미의 대중 소설이나 분명 어느 정도의 문학적 성취도 있다고 생각한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이 허탈한 것은 속이 너무 뻔히 보이고 그 만큼 실속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면 문학답게, 스파이류면 스파이물 답게, 페미니즘이면 페미니즘 답게 전력을 다해 달려달란 말이다. 어영부영 포장해서 서점에 내놓은 상품이라면 우리는 이미 질리도록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정체가 뭐냔 말이다.


발상은 훌륭했다. 하지만 더이상 007에 딴지를 걸지말고 미미에게 시비를 걸어본다. 007를 굴레를 벗어난 다음 미미가 문학적으로  이루어낸 성과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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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시간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3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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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자신을 너무나 좋아해주는 돈 많고 능력있는 게다가 젊은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신데렐라같은 동화 주인공의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이 여기에서 이야기를 끝 맺겠지만 [아주 사적인 시간]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부와 명예를 손에 거머쥐고도 주인공이 그것을 박차고 나선다면 세속적인 우리는 그녀의 선택을 '손에 굴러온 복을 걷어차버린' 격이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어 나가면 그런 주인공의 선택에 공감하게 된다. 삶 속에서 자신이 가진 욕구를 솔직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모습이 약간 포커스가 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 포커스를 맞추려고 계기를 조정할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은 포커스가 맞지 않았어도 참고 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기서 포커스의 중요성을 말한다. 타인의 보는 시선 속에 내 삶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스스로의 삶을 들여다보는 뷰 파인더 속에 초점이 나가 있다면 영상으로서 나의 삶은 엉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가 표현한 것처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겠다. 한 사람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두사람의 감정이 공명한다면 둘은 한 곳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철없는 한 여자의 이혼기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사랑과 삶에 대한 솔직한 성찰로 바꿔 놓았다. 겉보기에 아무리 화려한 삶일 지라도 '이 삶은 아니야'하고 박차고 나온 노리코의 선택은 그녀의 '이주 사적인 시간'을 되찾기위한 몸부림이었다.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하나가 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전히 상대의 '사적인 시간'을  인정해주는 것 아닐까. 용광로처럼 각자의 삶이 용해된다는 것보다 상대의 삶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진정한 합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삶의 격랑에 휩쓸려 '사적인 시간'을 뺏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의 시작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 주인공 노리꼬가 남편 '고'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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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과의 인터뷰
김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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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로 여피, 히피인 한 독자의 인터뷰이고, 나쁜 의도로 정리한다면 청담동스러운 시각으로 잔득 무장한 작가가 22명을 만났다. 시인 함민복은 예외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의 가난과 독신조차 아름답게 포장한 것을 보면 작가 김 경의 청담동스러움은 어쩔 수 없나보다. 신동엽의 동 페리뇽으로 상징되는 인터뷰 대상자들의 쿨한 기름기와 작가의 세련된 글발을 견디기 힘든 사람은 이 책을 보지 않으면 되겠다.


반대로, 사실은 코미디언이지만 고급 취향의 신동엽이나, 배우 주제에 심각한 책을 읽고 있는 장동건의 이면을 보고싶다면 이 책은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인터뷰이들은 작가 김 경을 만나 그 동안 매체에 소개되지 않았던 자신들의 매력을 깔끔하게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경은 훌륭한 인터뷰어인 것 같다. 패션 잡지를 위해 인터뷰 기사를 쓴다면 그것은 100% 인터뷰이를 칭송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 잡지의 중요 지면에 멋지게 폼잡고 사진까지 찍은 이들을 함부로 까댈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런데 다 같은 수준으로 상대를 빨아준다든지 올려세우면 그것은 아양이 되고 선전이 되버릴 것이다.


김 경의 인터뷰는 기획의도에 적합하게 인터뷰이들을 찬양했으나 작가로서의 위엄도 버리지 않았고 독자들의 자존심도 챙겨주었다. 즉 인터뷰 대상자들을 칭송하되 아양을 떨지 않았고 그들과의 만남을 독자에게도 흥미롭게 전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글에 등장한 22명도 작가의 글에 대해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상업적인 인터뷰나 리뷰, 비평의 가장 중요한 점은 '위엄있게 칭찬하기'이다. 비록 그 대상이 와인에 숙성시킨 삼겹살 같을지라도 분명 작가에 의해 삼겹살은 전혀 다른 상품이 되었다. (물론 애초의 인터뷰 대상들이 삼겹살 같은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김 경이 요리한 와인 삼겹살은 맛있다. 그래서 재밌다. 이렇게 글을 잘 쓰기도, 기분 좋게 남을 띄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김 경은 한 동안 그녀의 글로 먹고 살 것이다.


나는 와인 삼겹살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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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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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일본의 한 고급 고층 아파트에서 할머니를 포함한 일가족이 살해되었다. 작가는 이 가상의 사건이 발생한 몇 달후 사건의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아파트에서의 살인 사건을 그와 관련한 인물들을 다각적으로 접촉해 귀납적인 방식으로 조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살인의 이유 뿐 아니라 인간의 존재 이유, 가족의 의미까지 독자들이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읽었던 추리 소설과는 형식과 내용의 차원이 다른 작품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의 진범이나 진상이 무엇인지 독자의 시선을 대신한 탐정으로 하여금 수사하고 추리하는 방식의 과거의 추리 소설이었다면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르뽀르타쥬의 형식을 빌어 사건의 전모를 밝힌다. 나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 못된 습관이 있는데 소설 도입부의 사건이 제시되고 주요 캐릭터가 등장하면 곧 책의 뒷 장을 열어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는 버릇이다. 그러나 [이유]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작가가 독자에게 두뇌 싸움을 하자고 덤비지도 않았거니와, 독자는 사건과 관련한 인물을 만나며 그들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삶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그 개별적인 삶들이 어느 순간 "반다르 센주기타 뉴시티" 아파트의 웨스트 타워 20층 2025로 소용돌이처럼 모인다. 그 소용돌이의 와중에서 사건 전체의 윤곽을 알 수 있지만 이미 소설의 재미는 범인과 진상에 있지 않았다. 각기 다른 삶의 모습, 인간들이 어떤 경로와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타인의 삶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런 관찰의 과정이 내 삶의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훌륭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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