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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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는 시인 이적요의 이야기이고, 그의 제자 서지우의 이야기이며 그들의 어린 연인 은교의 이야기입니다. 구도자 처럼 시(詩)를 써온 시인 이적요에게서지우는 유일한 가족이자 글쓰기에는 무능한 제자입니다. 그런 서지우에게 이 적요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시(時)가 아닌 장르 물을 대신 써주었습니다. 서지우의 이름으로 나간 그 작품은 의외의 화제작이 됩니다. 그들은 사제지간에서 함께 범죄를 저지른 공범이 되었고 , 이로 인해 더더욱 공고한 관계가 됩니다. 서지우는 이 적요의 집 근처 동네에 사는 여고생 은교를 집 청소를 위해 데려옵니다. 은교와의 만남으로 이 적요와 서지우의 삶은 파문이 일어납니다. 시인은 여자에게 사랑인지 욕정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고, 시인과 제자는 사제지간에서 연적이 되어 버립니다. 시인과 제자 사이를 기묘하게 줄타기 한 은교는 독자의 마음에도 파문을 던집니다.


 [은교]에는 주인공의 생과사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사고로 죽은 서지우, 자살하듯 생을 마감한 시인, 그리고 홀로 남아 죽음의 정체를 알아채는 은교의 이야기는 대단한 추진력으로 독자를 밀어붙입니다. 시인과 시인의 제자는 외부에 표방하는 모습과 내적인 모습의 괴리로 말미암아 서로를 파멸로 이끌 범죄로 치닫습니다. 실상과 그 후방 효과는 어느 미스터리 소설 못지않게 흥미롭습니다.


 [은교]는 저물어가는 인생을 관찰하는 다큐멘터리 같습니다. 사계절이 변하듯, 봄 처럼 태어나 여름처럼 번성하고 가을처럼 저물었다가 겨울처럼 굳어지는 인생의 면면을 잘 보여줍니다. 이 적요와 서 지우는 늙음과 젊음의 대조이면서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갈망하는, 그리워하면서도 대결하는 존재로서 작용합니다. 젊음에서 늙음으로 계절을 보내는 사람에게 이 적요의 추한 욕망은 너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그 절절하면서 위험한 욕망에서 저는 집착을 보았고 그 집착에 동의하는 순간 저도 시인 이적요와 공범(共犯)이 되었기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소설의 끝에 가면 독자는 시인 이적요가 진정 그리워하고 욕망하던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됩니다. 은교가 욕망의 대상이었는지,이 적요의 생애를 통해 가장 부족했던 것을 채워 준 보상이었는지 헛갈립니다.


 [은교]는 시(詩)와 같은 소설입니다.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는 시가 많이 실려 있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이야기와 정서가 시처럼 다듬어진 문장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외국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오랜만에 만난 모국어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책장을 넘겼습니다. 우리 말이 이토록 도도하고 품위가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시인 적요의 캐릭터는 시인의 문장으로서 형상화했고, 열등한 서지우의 울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은교의 캐릭터가 날 선 문장이 되어 독자의 가슴 속에 파고들었습니다.


은교는 한 번 읽고 덮을 소설이 아닙니다. 두세 번 더 읽는다고 해서 이 소설이 어떻게 영상화할지 구도가 잡힐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스터리 속에 인생이 주마등처럼 흐르며 시적인 경지에 오른 [은교]의 독특한 분위기를 다른 장르로 옮긴다는 것은 무모해 보입니다. [은교]는 저를 다시 한국 소설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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