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여자의 일생.단편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2
G.D.모파상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1998년 9월
평점 :
품절


‘너무 짧다…너무…짧다…’.

책을 다 읽고 내 머릿 속에 맴도는 문장이다. 그의 소설의 분량이 짧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짧아서 더 강렬하고 정제되어 있다. 너무 짧은 건, 다름 아니라 바로 그의 삶이다. 1850년 노르망디 출생. 1892년 니스에서 자살기도, 파리의 정신병원에 감금. 1893년 사망,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 43년 간의 삶....삶의 비참과 고통들을 너무 많이 목격해서였을까…. 너무 짧다…너무…. 잠시 목이 잠긴다. 치열했기에, 짧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그의 삶은. 10여년의 창작기간동안 쏟아낸 단편 310여편, 장편 6편, 여행기 3권, 극작과 평론 등에 잘 녹아있다.

나는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1870년 발생한 보불전쟁에 징집당해 참가한 모파상이 그리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러나,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전쟁이 빚어내는 잔학성과 광란의 무법상태 속에서 무엇이 온전하게 남아있겠는가. 작가의 말을 빌리면 ‘전쟁은 금수로 돌아간 광포한 인간의 행위이며, 거기엔 이미 법률도 없고 법칙도 통하지 않으며, 정의의 모든 관념이 소멸해 버린 살인 행위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백작부부와 상인부부, 정치인, 수녀들과 한 명의 창녀가 같은 마차를 타고 피난을 간다. 그 고귀한(?) 지도층 인사들은 창녀를 ‘비계덩어리’로 멸시한다. 위기의 상황이 닥치자, 그들은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부르짖으면서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결국 몸을 허락한 비계덩어리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이전과 꼭 같은, 아니 그보다 강도가 조금 더해진 멸시와 모멸이다. 용기니 애국심이니 하는 따위의 가면이 모두 벗겨진 추악하고 비열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이 섬뜩하게 보여진다.

그의 보석같은 단편들 중에는 지금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주효한, 삶의 단편들을 보여주는 것들도 많다. 연보에 의하면 그는 실제로 10년 동안 해군본부와 국민교육성에서 하급관리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삶의 바닥에 가까이 닿아있는 사람들의 탐욕과 회한과 두려움과 불안등을 선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큰 상처나 큰 불행은 오히려 치유될 수 있지만 ‘어떤 해후, 흘끗 보고 예측하는 어떤 일, 어떤 은밀한 슬픔, 어떤 운명의 배신,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속에 고통스러운 생각의 세계를 모두 휘저어놓고, 우리 앞에 갑자기 복잡하면서도 고칠 수 없는 심적인 고통의 신비스러운 문을 슬며시 열어준다’고 한다.

그의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때문에 얼핏보면 작가의 시선이 냉소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투박하고 직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고 또 혹 우리 자신일 수도 있는 그런 인물들......그들에게 다가오는 어처구니없는 숙명과 고통들을 세밀화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 뒤에는 한없는 연민과 동정이 숨어있다.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건, 주관적으로 설명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그 고통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들은 … 우리의 마음 속에 슬픔의 자국같은 것, 쓰디쓴 맛, 환멸감 같은 것을 남겨놓는데, 그것을 몰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요. 언제나 내 눈앞에는 두세 가지의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확실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마치 치유될 수 없는 가늘고 긴 바늘자국처럼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내 안에도 그 ‘가늘고 긴 바늘자국’이 만져지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숭이 사냥
콜린 터너 지음, 이민아 옮김 / 창해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하나의 화두처럼 맴도는 말이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부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남원에 있는 '실상사(實相寺)'에서 주지 도법(道法)스님의 말씀을 듣고 부터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다. 흔히 안하무인이며 독선적인 사람을 일컬어 '유아독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었다.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말에서 <我>는 석존 자신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있는 존재가 모두 <我>의 확장이요 변형이라는 말이다. 다른 존재들과 나는 우주의 그물망에 다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결국은 같은 <我>로서 모두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 제대로 된 해석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여덟음절 속에 이렇게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것 몰랐던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 책을 읽으며 부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지 않은가. <원숭이 사냥>. 숨막히는 경쟁사회에서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선 내가 사냥꾼이 되라? 정도의 처세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별반의 기대나 설레임도 없이 가볍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세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내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기 시작했다.

저자 콜린 터너는 약 2천5백년 전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웨이즈(魏子)의 철학에서 현재 우리-개인이나 기업 모두의 측면에서-가 처한 정체성의 위기와 비전없음의 해답을 찾아낸다. 그는 진정한 깨달음은 자신이 다른 모든 것과 하나라는 인식 즉 우리 모두는 광막한 우주의 한 부분들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현재까지 우리를 지배해왔던 사고방식-모두가 잘사는 관계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사는' 길을 선호하고, 서로 이익이 되는 거래가 아니라 자기에게만 유리한 방법을 모색하며, 먼저 주기보다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얻어보겠다는-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우주적 자아를 망각한채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와 행동을 포기할 때 우리는 타인과 더욱 조화를 이루고, 우주가 물려준 유산- 무한한 생명, 정신력, 지혜-을 함께 누릴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2천년도 더 된 중국의 도가철학과 21세기의 경영철학이 '상생(相生)'이라는 발원지에서 저마다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흘러나오는 물줄기라는 사실을 알고 난 가히 놀라움을 넘어 어떤 경이로움을 느꼈다. 역사의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지혜의 두루마리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같은 야만적인 위협을 피해 동굴과 동굴, 집안의 숨겨둔 벽 속과 벽속으로 이어지며 지혜를 찾는 후세인들에게 전해진다는 역사의 엄연(儼然)함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몸과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타인에게는 숨기고 싶은 내면의 복잡한 갈등과 기억들, 혹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부정적인 습관 등이 책의 갈피갈피에 보여질 때이다. 12장의 두루마리를 넘기면서 현재의 모순투성이인 내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괴로웠다. 하지만 이젠 그런 내 모습을 숨기거나 자학하지 않겠다. 왜냐면 나는 우주라는 태(胎)에서 나온 존재니까. 그래서 아주 귀하고 소중하니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고귀한 존재이며, 그들과 더불어 원래 우주가 내게 준 생명력과 에너지를 다시 찾아나서야 하니까. 이제 비로소 내가 내 인생과 내가 태어난 우주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월트디즈니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는 딸을 극진히 사랑하는 바다의 왕이 등장한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보다 우연히 바다 위에서 만난 왕자를 사랑하게 되어 마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맡기는 조건으로 인간이 된다. 딸이 자신을 배반했는데도 바다의 왕은 오히려 딸을 위해 자신의 왕권마저 마녀에게 맡기고 만다. 원작과 달리 해피엔딩-인어공주와 왕자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미녀와 야수’, ‘뮬란’등 다른 몇몇 디즈니애니메이션처럼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정의 권력구조를 보다 강력하게 표현해내기 위해 딸과의 관계를 비약시켜 표현했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부성애’는 ‘모성애’ 만큼은 아니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끊임없이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발자크는 ‘고리오영감’을 통해 ‘부성애’를 어떻게 그렸는가. 그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

고리오가 딸들을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발자크 자신이 화자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사람! 그는 딸들이 자기에게 가하는 고통까지도 사랑하였다.” 그는 딸들을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인 천사의 반열로 떠받들’었다. 자신을 위해 종신연금을 만든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딸의 멋진 하루저녁을 위해 약값으로 써도 모자랄 돈을 다 주어버리고, 자신의 은기를 팔아버린다. 그는 딸들을 위해서라면 타락도 불사하겠다고 단언한다.

그렇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타락’을 한 것이다. 임종을 앞두고서야 그는 자신의 ‘타락한’ 사랑을 돌아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욕망을 만족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만이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정열의 노예가 되어 그는 끊임없이 채워주려 몸부림지만, 그녀들의 욕망은 무한대로 커져만 갔다. 결국 그는 처참하게 파멸한다. 자신의 두 딸과 함께 말이다. 딸들의 방종하고 타락한 원인이 고약한 사위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너무 뒤늦게 깨닫는다. 그제서야 회한의 눈물을 흘려보지만 딸들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딸들을 위해, 그들의 타락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 ‘자기 딸들의 살롱에 더러운 기름얼룩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딸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방종한 삶 조차도 말이다.

드 보세앙 부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은 보물과 같아서, 단번에 그것을 비워버리면 파멸이예요. 우리는 감정을 온통 드러내 보인 사람을 돈 한푼 없는 사람보다 더 용서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 아버지는 모든 것을 주어버렸어요.…그의 딸들은 레몬을 잘 쥐어짠 다음, 레몬의 겉껍질을 길모퉁이에 내다버린 셈이죠”

단말마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고리오의 처절한 부성애를 보며 프로이트의 일렉트라컴플렉스를 떠올렸다. 일렉트라 콤플렉스는 여성이 자신의 성이 여성(남근이 없기 때문에)이라는 것에 대하여 불만족스러워하며, 이에 기반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미워하고 그것을 소유한 아버지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고리오의 딸들은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했고 자신은 그 대가로 딸들의 애정을 붙들고 싶어했다.

권력, 돈, 도박, 사랑, 사교계……. 이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의 욕망의 대상은 어찌보면 아주 많이 닮아있다. 붙들수록 멀어지고, 결코 채워질 수 없으며, 인간을 타락으로 몰고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으젠느와 드 보세앙부인, 아나스타지와 델핀느, 보트랭, 보케르부인 그리고 우리의 고리오 영감까지 어찌보면 같은 사람으로 읽힌다.

아침 7시, 보케르부인의 고양이가 제 주인보다 먼저 나와, 찬장으로 뛰어 올라가서는 접시가 덮여 있는 몇 개의 사발 속의 우유냄새를 맡으며 ‘가르릉 가르릉’소리를 내는 그 보케르관의 식당, 그 비참하고, 인색하고, 농축되고, 꾀죄죄한 비참이 도사리고 있는 그 곳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과 얼마만큼 다른가? 혹 같은 곳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의 이면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길이 막혔을 때 '끊긴 길 앞에서 주저앉는 대신 수렁에 빠지는 쪽을 택한다'는 작가의 말이 가슴을 쳤다.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과 집착…….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그 길을 확신에 차서 정신없이 달려갔는데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길이 뚝, 끊겨있었다. 그 길이 내가 찾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우리에게 '깨달음이란 언제나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게온다.' 그러나, 난 주저앉지 않았다. 마지막 발짝을 마저 내딛었다. 예상대로 수천킬로미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내 의식에 난 상채기에서 쉬지않고 고통의 핏물이 베어나왔다. 하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고통의 임계점(臨界點)을 지나면 자신의 고통을 즐기게 되는 것일까. 체념이나 자포자기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의식의 진공상태가 시작되었고 난 생각보다 담담히 그 시기를 넘겼다.

이 소설의 책장을 다 넘겼을 때 온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린 박부길의 고통스런 유년의 모습이 촘촘히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그 모습은 또한 나의 이전의 모습으로도 오버랩되어 의식을 압박해왔다. 부길의 모습에서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눈을 찌르는 오이디프스왕과 광기와 신경증에 에 휩싸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병적인 자의식의 과잉으로 세상과 불화하는 어린 자폐아의 계보를 이어받은 우리의 박부길. 그러나 그가 먼저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아버린 것이 아니다. 세상이 먼저였다. 그 결과로서 그는 더욱더 자신의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습기찬 골방으로 숨어들었을 뿐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정신병에 걸려 차꼬가 채워진채 뒤란 감나무 옆 움막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죽어서야, 그것도 자신이 가져다준 손톱깍기로 자살한 사실을 알게 된 아들. 엄마마저 집안어른들의 무언의 압력으로 집에서 내쫓겨간 아이. '그러면 이제 안녕, 내 치욕의 시간들이여. 다시는 너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아버지의 무덤을 불태우고 집을 나간 아이. 제임스조이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우리가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악몽'이라고 비유한 글 밑에 붉은 밑줄을 그은 아이. 자신에게 유년기가 없다고, 아버지의 매나 어머니의 품을 기억의 층에서 불러내지 못한다고 절규하는 너무 일찍 늙어버린 아이. 그 아이가 박부길이다.

이 소설은 동료작가인 '나'를 화자로 내세운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박부길의 유년시절, 그 속에서 구원을 찾아 헤메다 자신의 고립된 세계-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아버지를 시인하게되는-로 회귀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

어린 부길이는 성장기 내내 자신과 동질의 원형질을 가진, 자신과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다 '그처럼 편안하고 놀랍게 안락'한 종단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감정이라는 바다에 키나 돛도 없이 둥둥 떠 다니는 풍선(風船)과 같았다' 얼토당토 않은 상상과, 엉뚱한 비약, 터무니없는 과잉반응등으로 불같은 집착을 보인다. 싱클레어의 에바부인에 대한 숭배처럼 그에게 종단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신성으로서의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녀를 통해 골방의 어둠을 벗어나지만, 그가 그녀를 택한 것은 실은 그녀 역시 어둠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비춰주는 거울인 그녀에게 거울인 그녀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그는 사랑을 퍼부었다. 그러니까 그의 그녀에 대한 몰두는 나르시스의 자기애일 뿐'이었다.

그녀는 결국 떠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의 골방으로 들어간다. 이제야 그는 아버지의 엄연한 존재를 시인하게 된다. 이제야 자신의 유년시절의 기억의 층위를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그럼 그에게 있어 글쓰기는 무엇일까. 마지막에 화자의 입으로 대답이 주어진다. '지금까지의 그의 글쓰기가 전략적인 드러냄'이며, 그는 사실은 '감추기 위해 드러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동서고금의 작가들이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며 치열하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길이 막혔을 때 우리는 수렁에 빠져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균, 최후의 19일 1
김탁환 지음 / 푸른숲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계축년(癸丑年,1613년) 5월 20일 저물무렵 변산 바닷가 언덕에선 두루마기와 갓, 신발과 버선까지 모두 벗고 바지를 둘둘 걷어올린 한 사대부가 언덕아래 갯벌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조화옹(造化翁, 조물주)이 선물했다는 장엄한 낙조를 보러 온 많은 구경꾼들은 미친 듯 달려가는 그를 보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미처 잘 알지 못하는 교산 허균이다. 그의 미친 듯한 질주가 「세상의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서곡이었음을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허균. 우리가 기억하는 그가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조선조를 통틀어 손꼽히는 문장가요 지식인이다. 서화담의 수제자였던 허엽이 아버지였고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시조를 지어 이름을 얻었던 허난설헌이 누이였다는 사실도 흔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에서 우리가 만나는 허균은 조선시대의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라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는 혁명가이다.

그의 소설 '홍길동전'에서 나오는 홍길동처럼 말이다. 10대에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신동으로 이름을 얻고 20대에 임진왜란을 겪어 피난길에서 아내와 아들을 잃고 30대는 방랑과 기행(奇行)으로 삭탈관직을 밥먹듯이 당하며 조선팔도를 떠돌았던 그가 마흔 다섯의 나이에 '칠서의 옥'(무륜당사건)을 계기로 혁명을, 「세상의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하게 된다. 이 소설은 허균이 변산에서 박치의와 함께 혁명을 계획하고 5년 후 혁명을 시작해서 능지처참을 당하기까지의 19일 동안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배고픔과도 같은 희망'을 꿈꾸는 혁명가 허균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신화속의 인물이 있었다.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거대한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을 신들에게 받은 시지프가 바로 그 인물이다. 경련이 인 얼굴로, 진흙으로 뒤덮이 바윗덩어리를 어깨로 떠받치고 아래로 떨어지려는 바위를 고정시키려 다리를 잔뜩 버티고는 마지막 힘을 모아 산꼭대기로 올리지만, 다시 산 아래로 떨어지고야 마는 바윗덩어리를 보며 힘없이 내려와 다시 바윗덩어리를 굴려올려야 하는 신화 속의 인간, 시지프.

카위(A.Camus)는 '시지프의 신화'라는 글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진 후 시지프가 다시 산꼭대기에서 산아래로 내려오는 시간을 의식의 시간이라 부르며 이 순간에 그가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고,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고 얘기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며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자기의 바위를 들어올리는 행위는 도로(徒勞)가 아니라 '고귀한 성실'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이런 점으로 볼때 또 하나의 시지프가 아닐 수 없다. 혁명을 이루려는 거사가 실패로 끝나 처형을 당하기 직전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아들 굉에게 편지를 쓴다. '잘 사는 것보다도 잘 죽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그는 '혁명의 성공'이 아니라 '혁명'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혁명을 향한 그의 노력은 '도로(徒勞)'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성실'로 승화하는 것이다.

「세상의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했던 허균과,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올리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는 시지프! 이 두 명의 혁명가를 만난 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세상의 어디쯤에서 새로움을 꿈꾸는 또 다른 허균과 시지프가 있을 것임을, 그들로 인해서 지금껏 역사의 변혁이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이 세상 어딘선가에서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400년전, 세상의 탈바꿈을 준비하려 변산바닷가를 질주했던 혁명가 허균처럼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