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최후의 19일 1
김탁환 지음 / 푸른숲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계축년(癸丑年,1613년) 5월 20일 저물무렵 변산 바닷가 언덕에선 두루마기와 갓, 신발과 버선까지 모두 벗고 바지를 둘둘 걷어올린 한 사대부가 언덕아래 갯벌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조화옹(造化翁, 조물주)이 선물했다는 장엄한 낙조를 보러 온 많은 구경꾼들은 미친 듯 달려가는 그를 보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미처 잘 알지 못하는 교산 허균이다. 그의 미친 듯한 질주가 「세상의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서곡이었음을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허균. 우리가 기억하는 그가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조선조를 통틀어 손꼽히는 문장가요 지식인이다. 서화담의 수제자였던 허엽이 아버지였고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시조를 지어 이름을 얻었던 허난설헌이 누이였다는 사실도 흔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에서 우리가 만나는 허균은 조선시대의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라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는 혁명가이다.

그의 소설 '홍길동전'에서 나오는 홍길동처럼 말이다. 10대에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신동으로 이름을 얻고 20대에 임진왜란을 겪어 피난길에서 아내와 아들을 잃고 30대는 방랑과 기행(奇行)으로 삭탈관직을 밥먹듯이 당하며 조선팔도를 떠돌았던 그가 마흔 다섯의 나이에 '칠서의 옥'(무륜당사건)을 계기로 혁명을, 「세상의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하게 된다. 이 소설은 허균이 변산에서 박치의와 함께 혁명을 계획하고 5년 후 혁명을 시작해서 능지처참을 당하기까지의 19일 동안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배고픔과도 같은 희망'을 꿈꾸는 혁명가 허균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신화속의 인물이 있었다.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거대한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을 신들에게 받은 시지프가 바로 그 인물이다. 경련이 인 얼굴로, 진흙으로 뒤덮이 바윗덩어리를 어깨로 떠받치고 아래로 떨어지려는 바위를 고정시키려 다리를 잔뜩 버티고는 마지막 힘을 모아 산꼭대기로 올리지만, 다시 산 아래로 떨어지고야 마는 바윗덩어리를 보며 힘없이 내려와 다시 바윗덩어리를 굴려올려야 하는 신화 속의 인간, 시지프.

카위(A.Camus)는 '시지프의 신화'라는 글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진 후 시지프가 다시 산꼭대기에서 산아래로 내려오는 시간을 의식의 시간이라 부르며 이 순간에 그가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고,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고 얘기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며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자기의 바위를 들어올리는 행위는 도로(徒勞)가 아니라 '고귀한 성실'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이런 점으로 볼때 또 하나의 시지프가 아닐 수 없다. 혁명을 이루려는 거사가 실패로 끝나 처형을 당하기 직전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아들 굉에게 편지를 쓴다. '잘 사는 것보다도 잘 죽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그는 '혁명의 성공'이 아니라 '혁명'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혁명을 향한 그의 노력은 '도로(徒勞)'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성실'로 승화하는 것이다.

「세상의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했던 허균과,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올리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는 시지프! 이 두 명의 혁명가를 만난 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세상의 어디쯤에서 새로움을 꿈꾸는 또 다른 허균과 시지프가 있을 것임을, 그들로 인해서 지금껏 역사의 변혁이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이 세상 어딘선가에서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400년전, 세상의 탈바꿈을 준비하려 변산바닷가를 질주했던 혁명가 허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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