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단편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2
G.D.모파상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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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짧다…너무…짧다…’.

책을 다 읽고 내 머릿 속에 맴도는 문장이다. 그의 소설의 분량이 짧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짧아서 더 강렬하고 정제되어 있다. 너무 짧은 건, 다름 아니라 바로 그의 삶이다. 1850년 노르망디 출생. 1892년 니스에서 자살기도, 파리의 정신병원에 감금. 1893년 사망,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 43년 간의 삶....삶의 비참과 고통들을 너무 많이 목격해서였을까…. 너무 짧다…너무…. 잠시 목이 잠긴다. 치열했기에, 짧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그의 삶은. 10여년의 창작기간동안 쏟아낸 단편 310여편, 장편 6편, 여행기 3권, 극작과 평론 등에 잘 녹아있다.

나는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1870년 발생한 보불전쟁에 징집당해 참가한 모파상이 그리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러나,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전쟁이 빚어내는 잔학성과 광란의 무법상태 속에서 무엇이 온전하게 남아있겠는가. 작가의 말을 빌리면 ‘전쟁은 금수로 돌아간 광포한 인간의 행위이며, 거기엔 이미 법률도 없고 법칙도 통하지 않으며, 정의의 모든 관념이 소멸해 버린 살인 행위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백작부부와 상인부부, 정치인, 수녀들과 한 명의 창녀가 같은 마차를 타고 피난을 간다. 그 고귀한(?) 지도층 인사들은 창녀를 ‘비계덩어리’로 멸시한다. 위기의 상황이 닥치자, 그들은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부르짖으면서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결국 몸을 허락한 비계덩어리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이전과 꼭 같은, 아니 그보다 강도가 조금 더해진 멸시와 모멸이다. 용기니 애국심이니 하는 따위의 가면이 모두 벗겨진 추악하고 비열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이 섬뜩하게 보여진다.

그의 보석같은 단편들 중에는 지금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주효한, 삶의 단편들을 보여주는 것들도 많다. 연보에 의하면 그는 실제로 10년 동안 해군본부와 국민교육성에서 하급관리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삶의 바닥에 가까이 닿아있는 사람들의 탐욕과 회한과 두려움과 불안등을 선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큰 상처나 큰 불행은 오히려 치유될 수 있지만 ‘어떤 해후, 흘끗 보고 예측하는 어떤 일, 어떤 은밀한 슬픔, 어떤 운명의 배신,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속에 고통스러운 생각의 세계를 모두 휘저어놓고, 우리 앞에 갑자기 복잡하면서도 고칠 수 없는 심적인 고통의 신비스러운 문을 슬며시 열어준다’고 한다.

그의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때문에 얼핏보면 작가의 시선이 냉소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투박하고 직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고 또 혹 우리 자신일 수도 있는 그런 인물들......그들에게 다가오는 어처구니없는 숙명과 고통들을 세밀화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 뒤에는 한없는 연민과 동정이 숨어있다.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건, 주관적으로 설명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그 고통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들은 … 우리의 마음 속에 슬픔의 자국같은 것, 쓰디쓴 맛, 환멸감 같은 것을 남겨놓는데, 그것을 몰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요. 언제나 내 눈앞에는 두세 가지의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확실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마치 치유될 수 없는 가늘고 긴 바늘자국처럼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내 안에도 그 ‘가늘고 긴 바늘자국’이 만져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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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사냥
콜린 터너 지음, 이민아 옮김 / 창해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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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하나의 화두처럼 맴도는 말이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부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남원에 있는 '실상사(實相寺)'에서 주지 도법(道法)스님의 말씀을 듣고 부터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다. 흔히 안하무인이며 독선적인 사람을 일컬어 '유아독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었다.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말에서 <我>는 석존 자신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있는 존재가 모두 <我>의 확장이요 변형이라는 말이다. 다른 존재들과 나는 우주의 그물망에 다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결국은 같은 <我>로서 모두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 제대로 된 해석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여덟음절 속에 이렇게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것 몰랐던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 책을 읽으며 부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지 않은가. <원숭이 사냥>. 숨막히는 경쟁사회에서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선 내가 사냥꾼이 되라? 정도의 처세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별반의 기대나 설레임도 없이 가볍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세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내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기 시작했다.

저자 콜린 터너는 약 2천5백년 전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웨이즈(魏子)의 철학에서 현재 우리-개인이나 기업 모두의 측면에서-가 처한 정체성의 위기와 비전없음의 해답을 찾아낸다. 그는 진정한 깨달음은 자신이 다른 모든 것과 하나라는 인식 즉 우리 모두는 광막한 우주의 한 부분들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현재까지 우리를 지배해왔던 사고방식-모두가 잘사는 관계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사는' 길을 선호하고, 서로 이익이 되는 거래가 아니라 자기에게만 유리한 방법을 모색하며, 먼저 주기보다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얻어보겠다는-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우주적 자아를 망각한채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와 행동을 포기할 때 우리는 타인과 더욱 조화를 이루고, 우주가 물려준 유산- 무한한 생명, 정신력, 지혜-을 함께 누릴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2천년도 더 된 중국의 도가철학과 21세기의 경영철학이 '상생(相生)'이라는 발원지에서 저마다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흘러나오는 물줄기라는 사실을 알고 난 가히 놀라움을 넘어 어떤 경이로움을 느꼈다. 역사의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지혜의 두루마리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같은 야만적인 위협을 피해 동굴과 동굴, 집안의 숨겨둔 벽 속과 벽속으로 이어지며 지혜를 찾는 후세인들에게 전해진다는 역사의 엄연(儼然)함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몸과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타인에게는 숨기고 싶은 내면의 복잡한 갈등과 기억들, 혹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부정적인 습관 등이 책의 갈피갈피에 보여질 때이다. 12장의 두루마리를 넘기면서 현재의 모순투성이인 내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괴로웠다. 하지만 이젠 그런 내 모습을 숨기거나 자학하지 않겠다. 왜냐면 나는 우주라는 태(胎)에서 나온 존재니까. 그래서 아주 귀하고 소중하니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고귀한 존재이며, 그들과 더불어 원래 우주가 내게 준 생명력과 에너지를 다시 찾아나서야 하니까. 이제 비로소 내가 내 인생과 내가 태어난 우주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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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최후의 19일 1
김탁환 지음 / 푸른숲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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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년(癸丑年,1613년) 5월 20일 저물무렵 변산 바닷가 언덕에선 두루마기와 갓, 신발과 버선까지 모두 벗고 바지를 둘둘 걷어올린 한 사대부가 언덕아래 갯벌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조화옹(造化翁, 조물주)이 선물했다는 장엄한 낙조를 보러 온 많은 구경꾼들은 미친 듯 달려가는 그를 보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미처 잘 알지 못하는 교산 허균이다. 그의 미친 듯한 질주가 「세상의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서곡이었음을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허균. 우리가 기억하는 그가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조선조를 통틀어 손꼽히는 문장가요 지식인이다. 서화담의 수제자였던 허엽이 아버지였고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시조를 지어 이름을 얻었던 허난설헌이 누이였다는 사실도 흔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에서 우리가 만나는 허균은 조선시대의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라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는 혁명가이다.

그의 소설 '홍길동전'에서 나오는 홍길동처럼 말이다. 10대에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신동으로 이름을 얻고 20대에 임진왜란을 겪어 피난길에서 아내와 아들을 잃고 30대는 방랑과 기행(奇行)으로 삭탈관직을 밥먹듯이 당하며 조선팔도를 떠돌았던 그가 마흔 다섯의 나이에 '칠서의 옥'(무륜당사건)을 계기로 혁명을, 「세상의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하게 된다. 이 소설은 허균이 변산에서 박치의와 함께 혁명을 계획하고 5년 후 혁명을 시작해서 능지처참을 당하기까지의 19일 동안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배고픔과도 같은 희망'을 꿈꾸는 혁명가 허균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신화속의 인물이 있었다.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거대한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을 신들에게 받은 시지프가 바로 그 인물이다. 경련이 인 얼굴로, 진흙으로 뒤덮이 바윗덩어리를 어깨로 떠받치고 아래로 떨어지려는 바위를 고정시키려 다리를 잔뜩 버티고는 마지막 힘을 모아 산꼭대기로 올리지만, 다시 산 아래로 떨어지고야 마는 바윗덩어리를 보며 힘없이 내려와 다시 바윗덩어리를 굴려올려야 하는 신화 속의 인간, 시지프.

카위(A.Camus)는 '시지프의 신화'라는 글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진 후 시지프가 다시 산꼭대기에서 산아래로 내려오는 시간을 의식의 시간이라 부르며 이 순간에 그가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고,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고 얘기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며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자기의 바위를 들어올리는 행위는 도로(徒勞)가 아니라 '고귀한 성실'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이런 점으로 볼때 또 하나의 시지프가 아닐 수 없다. 혁명을 이루려는 거사가 실패로 끝나 처형을 당하기 직전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아들 굉에게 편지를 쓴다. '잘 사는 것보다도 잘 죽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그는 '혁명의 성공'이 아니라 '혁명'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혁명을 향한 그의 노력은 '도로(徒勞)'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성실'로 승화하는 것이다.

「세상의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했던 허균과,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올리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는 시지프! 이 두 명의 혁명가를 만난 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세상의 어디쯤에서 새로움을 꿈꾸는 또 다른 허균과 시지프가 있을 것임을, 그들로 인해서 지금껏 역사의 변혁이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이 세상 어딘선가에서 또 한번의 탈바꿈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400년전, 세상의 탈바꿈을 준비하려 변산바닷가를 질주했던 혁명가 허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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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빵 굽는 시간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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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마을' 얼마전 길을 가다 우연히 본 제과점 이름이다. 체리색 나무간판 아래로 소담스런 바구니에 윤기가 흐르는 빵들이 소담히 담겨있고 노을빛이 나는 꼬마전구가 별처럼 촘촘히 천장에 박혀있는 아담한 빵집이었다.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이 들어가는 과자로 만든 집이 연상되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의 느낌이 입안에 사르르 침을 돌게 만들어 혼자 미소를 지으며 지나친 적이 있다.

<식빵굽는 시간>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생각했던 것은 '빵굽는 마을'의 빵의 이미지였다. 이 책은 아마 아기자기한 연애이야기 이거나 주부의 그렇고 그런 일상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읽어버리고 말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살까말까 망설이며 마티스의 '푸른 나부(裸婦)'가 그려져 있는 겉표지를 넘겼다. 조경란, 1969년 서울생, 이라는 설명과 함께 긴 단발머리를 앞가르마로 내린 채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작가의 얼굴이 보였다. 우울해 보이면서도 많은 고통을 겪고 난 사람의 비어있는 다소 공허해 보이는 눈빛, 그 눈빛을 보고 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카운터로 달려갔다. <식빵굽는 시간>의 '식빵'은 적어도 '빵굽는 마을'의 '빵' 그 이상의 무엇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제 곧 서른 살이 될 거야……'주인공 한여진의 우울한 읊조림으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녀는 삶의 아무런 애착이 없다. 조금씩 죽어 가는 엄마를 보고서도, 엄마의 발병(發病)이후로 엄마 외의 존재에게 전혀 무관심한 아버지에게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정서를 가진' 이모에게도 아무런 애정을 못 느낀다. 낯선 타인처럼 무관심하고 못견뎌한다. 그녀가 오직 소통을 원하는 존재는 단 한 사람,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한익주이다. 그는 여진의 또 다른 자아이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그를 향해, 그와 반대로 자신의 과거를 지워버리려 절규하는 여진은, 혼잣말을 한다. '나는 너라니까. 그러니까 너는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묻지 마.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묻든지.' 라고 말이다.

자신과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들을 위해 그녀는 빵을 만들고 빵을 건넨다. 그녀에게 빵은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媒介)이다. 하지만 그녀의 빵은 번번히 거절당한다. 한익진의 애인인 한영원에게, 촉촉하고 부드러운 프랑스 빵인 브리오슈를 건네지만 차갑게 거절당한다. '미안해요. 나는 빵을 좋아하지 않아요. 구태여 이걸 가져가고 싶지도 않구요'라고 말하는 한영원에게 여진은 대답한다. '상관없어요.....정말 상관없어요'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 빵을 지하도 바닥에서 신문을 팔고 있는 노파에게 슬며시 내려놓고 도망간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크루와상을 만들어주고 싶어할때는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고 곁에 없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받쳐들고 아버지를 찾아가 빵을 내밀었지만 그는 받지 않고 봉지를 툭 쳐버린다. 그 바람에 바닥으로 쏟아진 빵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피해버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여진은 실연(失戀)의 느낌으로 빗물에 젖어 흐물거리는 빵을 천천히 짓밟는다. 거절당할 것을 미리 예상했던 것처럼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오랜 습관처럼 말이다.

엄마의 죽음에 이어 아버지가 자살하고 이모는 자신이 여진의 생모(生母)임을 알린다. 별 충격도 없이 여진은 다만 자신이 떠날 때임을 예감한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과거의 존재들로부터 말이다. 그녀는 이모에게 줄 빵에 수면제를 잔뜩 섞는다. 정신적 살해. 살해하려고 한 건 이모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일 것이다. 그녀는 또 다른 자아인 한익주에게서도 자유로워진다. 자신과 소통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모두 떠나보낸 후 그녀는 '강여진 베이커리'라는 빵집이름을 짓는다. 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리라. 그리고 그녀는 '나무들의 수많은 이파리 사이로 차츰 푸르게 번져들고 있는 세상을 빛'을 보며 그녀의 주방으로 걸어간다. 이제 오로지 자신을 위한 식빵을 만들기 위해서. 세상과의 온전한 소통을 다시 시도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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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원성 스님 지음 / 이레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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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가 있다. 박하사탕. 동화같은 제목과 달리 영화는 주인공이 기찻길에 서서 '되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하며 기차속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를 만든 이창동감독의 창작동기를 들은 적이 있다.평상시와 다름없는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다가 문득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같은 존재라 믿기 어려운, 초췌한 사십대 남자의 초점 없는 눈동자와 축처진 희멀건 얼굴이 보였다.

어, 저게 누구지? 저게 내 모습이야? 아닌 것 같은 데……왜 내 모습이 이렇게 되었지? 눈빛은 왜 이렇게 공허해졌지? 세상을 다 살아버린 노파같은 표정은 어떻고……원래의 내 모습은 어디로 간 거야? 어떤 시간들을 지내왔기에 지금 내 모습이 이렇게 된거냐구? 그동안 나의 시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갔단 거야? 도대체 원래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던거야...

세면대 위의 거울을 보며 이런 생각들을 한참 하다가 박하사탕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장실 '거울' 속에서 박하사탕이 탄생한 셈이다. 어디 이창동감독 뿐이겠는가. '거울'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만나게 하고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게 하지 않았는가.

이 책 '거울'을 쓴 원성스님도 자신의 책을 보면 자신의 참모습이 비치는 거울을 보는 것 같다고 한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여러 가지 딴 생각 속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자신의 참모습으로 다시금 되돌아가는 느낌을 받는 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느낌이란다. 스님은 자신의 책 '거울'을 통해 속세에 사는 욕심 많고 일상에 갇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거울'을 들여다 보라고 말한다.

원성스님의 그림에는 '호기심과 모험심, 그 싱싱한 생기'가 잔뜩 묻어나는 동자승이 늘 보인다. 어떻게 보면 원성스님의 얼굴같기도 한 동자승들의 해맑은 눈빛과 홍조를 띤 부드러운 볼을 보면, 지리산 깊은 계곡물속으로 투명하게 보이는, 송사리의 몸짓마저 부드럽게 미끄러질 것 같이 동글동글한 조약돌이 생각난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게 닮은 점이다. '거울'처럼 말이다.

내겐 지하철을 탈 때마다 사람이 많건 적건 출입문 옆에 기대어서는 버릇이 있다. 안으로 잘못 들어갔다가는 앞사람의 뒤통수에 코를 붙이게 되거나 빼곡이 둘러싸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눈을 달리 둘 데가 없어 신발 앞꿈치만 쳐다보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출입문쪽을 바라보며 서게 되면 어느새 출입문 유리가 검은 거울이 되어 나의 모습을 비춰준다. 여태 아무 생각 없이 피로에 지친 내 모습만 멀뚱히 쳐다보며 다녔는데 내일 아침엔 나도 원성스님처럼 대화를 한번 해볼 작정이다. 거울 너머의 나와, 그 거울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말이다.

'너는 뭐니?/ 나는 너./ 너는 뭐하니?/ 널 보고 있지./ 왜 날 보고 있지?/ 난 널 보고 있어야만 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진정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까지/ 내 시야에서 너를 놓칠 수 없어' (원성스님의 詩 '거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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