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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사냥
콜린 터너 지음, 이민아 옮김 / 창해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하나의 화두처럼 맴도는 말이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부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남원에 있는 '실상사(實相寺)'에서 주지 도법(道法)스님의 말씀을 듣고 부터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다. 흔히 안하무인이며 독선적인 사람을 일컬어 '유아독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었다.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말에서 <我>는 석존 자신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있는 존재가 모두 <我>의 확장이요 변형이라는 말이다. 다른 존재들과 나는 우주의 그물망에 다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결국은 같은 <我>로서 모두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 제대로 된 해석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여덟음절 속에 이렇게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것 몰랐던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 책을 읽으며 부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지 않은가. <원숭이 사냥>. 숨막히는 경쟁사회에서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선 내가 사냥꾼이 되라? 정도의 처세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별반의 기대나 설레임도 없이 가볍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세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내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기 시작했다.
저자 콜린 터너는 약 2천5백년 전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웨이즈(魏子)의 철학에서 현재 우리-개인이나 기업 모두의 측면에서-가 처한 정체성의 위기와 비전없음의 해답을 찾아낸다. 그는 진정한 깨달음은 자신이 다른 모든 것과 하나라는 인식 즉 우리 모두는 광막한 우주의 한 부분들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현재까지 우리를 지배해왔던 사고방식-모두가 잘사는 관계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사는' 길을 선호하고, 서로 이익이 되는 거래가 아니라 자기에게만 유리한 방법을 모색하며, 먼저 주기보다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얻어보겠다는-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우주적 자아를 망각한채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와 행동을 포기할 때 우리는 타인과 더욱 조화를 이루고, 우주가 물려준 유산- 무한한 생명, 정신력, 지혜-을 함께 누릴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2천년도 더 된 중국의 도가철학과 21세기의 경영철학이 '상생(相生)'이라는 발원지에서 저마다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흘러나오는 물줄기라는 사실을 알고 난 가히 놀라움을 넘어 어떤 경이로움을 느꼈다. 역사의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지혜의 두루마리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같은 야만적인 위협을 피해 동굴과 동굴, 집안의 숨겨둔 벽 속과 벽속으로 이어지며 지혜를 찾는 후세인들에게 전해진다는 역사의 엄연(儼然)함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몸과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타인에게는 숨기고 싶은 내면의 복잡한 갈등과 기억들, 혹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부정적인 습관 등이 책의 갈피갈피에 보여질 때이다. 12장의 두루마리를 넘기면서 현재의 모순투성이인 내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괴로웠다. 하지만 이젠 그런 내 모습을 숨기거나 자학하지 않겠다. 왜냐면 나는 우주라는 태(胎)에서 나온 존재니까. 그래서 아주 귀하고 소중하니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고귀한 존재이며, 그들과 더불어 원래 우주가 내게 준 생명력과 에너지를 다시 찾아나서야 하니까. 이제 비로소 내가 내 인생과 내가 태어난 우주의 주인 노릇을 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