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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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디즈니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는 딸을 극진히 사랑하는 바다의 왕이 등장한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보다 우연히 바다 위에서 만난 왕자를 사랑하게 되어 마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맡기는 조건으로 인간이 된다. 딸이 자신을 배반했는데도 바다의 왕은 오히려 딸을 위해 자신의 왕권마저 마녀에게 맡기고 만다. 원작과 달리 해피엔딩-인어공주와 왕자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미녀와 야수’, ‘뮬란’등 다른 몇몇 디즈니애니메이션처럼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정의 권력구조를 보다 강력하게 표현해내기 위해 딸과의 관계를 비약시켜 표현했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부성애’는 ‘모성애’ 만큼은 아니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끊임없이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발자크는 ‘고리오영감’을 통해 ‘부성애’를 어떻게 그렸는가. 그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

고리오가 딸들을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발자크 자신이 화자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사람! 그는 딸들이 자기에게 가하는 고통까지도 사랑하였다.” 그는 딸들을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인 천사의 반열로 떠받들’었다. 자신을 위해 종신연금을 만든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딸의 멋진 하루저녁을 위해 약값으로 써도 모자랄 돈을 다 주어버리고, 자신의 은기를 팔아버린다. 그는 딸들을 위해서라면 타락도 불사하겠다고 단언한다.

그렇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타락’을 한 것이다. 임종을 앞두고서야 그는 자신의 ‘타락한’ 사랑을 돌아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욕망을 만족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만이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정열의 노예가 되어 그는 끊임없이 채워주려 몸부림지만, 그녀들의 욕망은 무한대로 커져만 갔다. 결국 그는 처참하게 파멸한다. 자신의 두 딸과 함께 말이다. 딸들의 방종하고 타락한 원인이 고약한 사위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너무 뒤늦게 깨닫는다. 그제서야 회한의 눈물을 흘려보지만 딸들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딸들을 위해, 그들의 타락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 ‘자기 딸들의 살롱에 더러운 기름얼룩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딸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방종한 삶 조차도 말이다.

드 보세앙 부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은 보물과 같아서, 단번에 그것을 비워버리면 파멸이예요. 우리는 감정을 온통 드러내 보인 사람을 돈 한푼 없는 사람보다 더 용서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 아버지는 모든 것을 주어버렸어요.…그의 딸들은 레몬을 잘 쥐어짠 다음, 레몬의 겉껍질을 길모퉁이에 내다버린 셈이죠”

단말마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고리오의 처절한 부성애를 보며 프로이트의 일렉트라컴플렉스를 떠올렸다. 일렉트라 콤플렉스는 여성이 자신의 성이 여성(남근이 없기 때문에)이라는 것에 대하여 불만족스러워하며, 이에 기반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미워하고 그것을 소유한 아버지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고리오의 딸들은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했고 자신은 그 대가로 딸들의 애정을 붙들고 싶어했다.

권력, 돈, 도박, 사랑, 사교계……. 이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의 욕망의 대상은 어찌보면 아주 많이 닮아있다. 붙들수록 멀어지고, 결코 채워질 수 없으며, 인간을 타락으로 몰고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으젠느와 드 보세앙부인, 아나스타지와 델핀느, 보트랭, 보케르부인 그리고 우리의 고리오 영감까지 어찌보면 같은 사람으로 읽힌다.

아침 7시, 보케르부인의 고양이가 제 주인보다 먼저 나와, 찬장으로 뛰어 올라가서는 접시가 덮여 있는 몇 개의 사발 속의 우유냄새를 맡으며 ‘가르릉 가르릉’소리를 내는 그 보케르관의 식당, 그 비참하고, 인색하고, 농축되고, 꾀죄죄한 비참이 도사리고 있는 그 곳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과 얼마만큼 다른가? 혹 같은 곳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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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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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막혔을 때 '끊긴 길 앞에서 주저앉는 대신 수렁에 빠지는 쪽을 택한다'는 작가의 말이 가슴을 쳤다.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과 집착…….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그 길을 확신에 차서 정신없이 달려갔는데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길이 뚝, 끊겨있었다. 그 길이 내가 찾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우리에게 '깨달음이란 언제나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게온다.' 그러나, 난 주저앉지 않았다. 마지막 발짝을 마저 내딛었다. 예상대로 수천킬로미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내 의식에 난 상채기에서 쉬지않고 고통의 핏물이 베어나왔다. 하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고통의 임계점(臨界點)을 지나면 자신의 고통을 즐기게 되는 것일까. 체념이나 자포자기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의식의 진공상태가 시작되었고 난 생각보다 담담히 그 시기를 넘겼다.

이 소설의 책장을 다 넘겼을 때 온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린 박부길의 고통스런 유년의 모습이 촘촘히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그 모습은 또한 나의 이전의 모습으로도 오버랩되어 의식을 압박해왔다. 부길의 모습에서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눈을 찌르는 오이디프스왕과 광기와 신경증에 에 휩싸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병적인 자의식의 과잉으로 세상과 불화하는 어린 자폐아의 계보를 이어받은 우리의 박부길. 그러나 그가 먼저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아버린 것이 아니다. 세상이 먼저였다. 그 결과로서 그는 더욱더 자신의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습기찬 골방으로 숨어들었을 뿐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정신병에 걸려 차꼬가 채워진채 뒤란 감나무 옆 움막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죽어서야, 그것도 자신이 가져다준 손톱깍기로 자살한 사실을 알게 된 아들. 엄마마저 집안어른들의 무언의 압력으로 집에서 내쫓겨간 아이. '그러면 이제 안녕, 내 치욕의 시간들이여. 다시는 너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아버지의 무덤을 불태우고 집을 나간 아이. 제임스조이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우리가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악몽'이라고 비유한 글 밑에 붉은 밑줄을 그은 아이. 자신에게 유년기가 없다고, 아버지의 매나 어머니의 품을 기억의 층에서 불러내지 못한다고 절규하는 너무 일찍 늙어버린 아이. 그 아이가 박부길이다.

이 소설은 동료작가인 '나'를 화자로 내세운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박부길의 유년시절, 그 속에서 구원을 찾아 헤메다 자신의 고립된 세계-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아버지를 시인하게되는-로 회귀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

어린 부길이는 성장기 내내 자신과 동질의 원형질을 가진, 자신과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다 '그처럼 편안하고 놀랍게 안락'한 종단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감정이라는 바다에 키나 돛도 없이 둥둥 떠 다니는 풍선(風船)과 같았다' 얼토당토 않은 상상과, 엉뚱한 비약, 터무니없는 과잉반응등으로 불같은 집착을 보인다. 싱클레어의 에바부인에 대한 숭배처럼 그에게 종단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신성으로서의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녀를 통해 골방의 어둠을 벗어나지만, 그가 그녀를 택한 것은 실은 그녀 역시 어둠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비춰주는 거울인 그녀에게 거울인 그녀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그는 사랑을 퍼부었다. 그러니까 그의 그녀에 대한 몰두는 나르시스의 자기애일 뿐'이었다.

그녀는 결국 떠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의 골방으로 들어간다. 이제야 그는 아버지의 엄연한 존재를 시인하게 된다. 이제야 자신의 유년시절의 기억의 층위를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그럼 그에게 있어 글쓰기는 무엇일까. 마지막에 화자의 입으로 대답이 주어진다. '지금까지의 그의 글쓰기가 전략적인 드러냄'이며, 그는 사실은 '감추기 위해 드러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동서고금의 작가들이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며 치열하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길이 막혔을 때 우리는 수렁에 빠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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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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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표지에 있는 카프카의 얼굴을 본다.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검푸른 눈, 소년의 호기심과 건장한 젊은이의 절망이 묘하게 섞여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표정이 자꾸 눈을 잡는다. 설명을 보니 카프카의 결핵말기 사진이었다. 죽기 얼마 전의 표정이라고 하니 자못 비장해진다. 누구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의문은 금방 풀린다. 헤르만 카프카, 카프카의 아버지이다. 평생 카프가가 살아야했던 감옥, 카프카의 자학과 자괴감의 원천이자 글쓰기의 원천이 되었던 사람, 바로 그의 아버지이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통해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자립성을 획득하고 도피를 시도하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성과는 무척 형편없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읽는 그의 소설들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탈주하려고 시도한 고통의 몸부림이며 절규이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끝내 아버지의 감옥 속에서 눈을 감고 만다.'어린아이의 능력을 가진 어른'. 카프카는 자신을 이렇게 인식하며 수치심과 역겨움, 무력감과 죄책감에서 평생을 고통받는다. 단편 『판결』에서의 게오르규는 어떤가? 아버지의 조롱에 대꾸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판결대로 강에 빠져 죽는 주인공 게오르규의 모습은 바로 카프카 자신일 것이다. 판결! 판결이라니,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판결할 수 있단 말인가?

카프카는 '거대한 몸집의 남자,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심판자'로 자신의 아버지를 인식한다. 그의 세계는 세 부분으로 분열되었다. 자신이 노예상태로 사는 세계, 명령을 내리고 이행하지 않으면 분노하는 일에 종사하는 아버지가 사는 세계, 명령과 순종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는 타인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 세계 사이에서 카프카는 늘 수치스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그는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여러 번에 약혼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혼에 성공하지 못하는 카프카, 그는 아버지와 대등한 자격을 얻게 되는 일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최종결론안'은 확실하게 하나이다. 그건 바로 '체념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바람처럼 카프카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살다가 한결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을까? 글쓰기가 아버지의 감옥에서 탈주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카프카 검푸른 눈망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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