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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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몇 년이 되고 몇 년이 평생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남은 세월보다 지난 세월이 더 많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P.293

 

 

어느 날 아침 눈 떠보니 나만 두고 세상이 저만치 가버렸다는 게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물론 브릿마리 여사는 60대이고, 자신의 틀 안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부지런히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거기에 비해 나는 턱없이 어리고(어쩌면 턱없이까지는 아닐지도), 수수방관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살아왔다는 게 좀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나버린 시간에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요즘 들어 그렇다.

나만 두고 세월이 흘러가버린 것만 같다.

이십 대 어디 언저리쯤에서 내 나이를 자각했던 게 마지막인 것만 같은데 ... 중년이다.

무엇을 하며 살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사실 딱히 할 말이 없다.

그 사이에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느라 바빴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그마저 열심인 적은 없었다.

그냥 시간이 나를 떠미니까, 떠미는 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걸어온 것만 같다.

 

나에게서 가족을 떼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가끔 그런 질문이 나를 찾아오던 때에 이 책을 만났다.

오랜 시간 가족을 위해 살았던 브릿마리 여사가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 낯선 걸음을 혼자 걷게 된 시간들을 담은 책을.

 

 

 

 

그녀는 그러니까 자기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꼬장꼬장한 강박증 할머니다.

과탄산소다를 거의 신봉하고, 팩신(세제)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심각한 청소 중독자.

마치 그 청소로만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청소에 집착한다.

 

수십 년 동안 집이 그녀 자신인 것처럼 살아왔다.

사회성이 떨어지고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남편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의 성향은 더 굳어져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갔다.

실제로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엔 그녀는 지독한 편견 덩어리였다.

스스로를 편견 없는 사람이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지만, 자기만의 신념을 신봉하는 사람이 편견을 가지지 않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세상이 존재한다.

과탄산소다를 들이부은 깨끗하고 빛나는 그녀만의 평화롭고 온전한 세상이.

 

 

모든 결혼 생활에 단점이 있는 이유는 모든 인간에게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살다 보면 그 사람의 약점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 약점들을 무거운 가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으면 그걸 피해 가며 청소하는 법을 터득한다. 환상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 먼지가 쌓이겠지만 손님들 모르게 지나갈 수 있기만 하면 참고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허락도 없이 가구를 옮겨버리면 모든 게 만천하에 드러난다. 먼지와 긁힌 자국. 쪽매널 마루에 영원히 남음 흠집. 하지만 그쯤 되면 이미 되돌릴 방법이 없다.

P.173

 

어느 날 찾아온 남편의 심장마비가 그녀의 마음속 가구를 옮겨 버렸다.

가구 밑에 쌓인 먼지를 간신히 모른척하며 버티던 일상이 무너져버리자 그녀는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더 이상 이 집에는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으니까.

 

 

 

 

오랜 세월 살림만을 해 온 그녀가 갑자기 일자리를 찾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 특유의 꼬장꼬장함으로 말도 안 되는 일자리를 찾아낸 그녀는 얼마 뒤 폐쇄될 거라는 레크리에이션 센터를 찾아 보르그에 간다.

그녀에게는 일자리가 꼭 필요했다.

그게 말이 되든 안 되든, 보수가 적든 많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해 줄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갑자기 자신이 죽더라도 누군가 알아채 줄 곳이 필요했다.

그녀가 여기 있다는 것을.

 

보르그는 망해가는 도시였다.

경제 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해고됐고, 일자리를 찾아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빈 가게와 매물로 내놓은 집들로 가득 찬 텅 빈 도시.

 

그녀는 그곳에서 남편이 없는 삶을 살기로 한다.

그녀만이 존재하는 시간을.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첫 시작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망해가는 도시라니,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있다면 아마 그곳 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도 변하지 않은 일상을 산다.

과탄산소다와 청소가 있는 일상을.

 

그렇지만 그녀는 남편이 아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시간을 선물하고, 새로운 시간은 새로운 삶을 이끌어 낸다.

변할 것 같지 않은 그녀의 일상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무엇이든 사라지고, 저물어 끝나버릴 것만 같던 마을에도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어떤 곳에서도 저물 수가 없다.

존재만으로도 그들은 이제 막 피어나고 있고, 여전히 떠오르고 있는 해였으니까.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인 브릿마리와 축구를 하는 아이들.

그들은 그렇게 만나,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브릿마리가 브릿마리를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자꾸만 어두워지는 브리스에 아침 해가 떠오를 수 있도록.

아이들은 브릿마리를 끈질기게 노크하고, 브릿마리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침으로 걸어간다.

 

브릿마리는 그렇게 하나의 세상을 깨트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왔다.

 

그녀는 우리의 현재 모습을 결정하는 게 개개인의 선택인지 아니면 환경인지, 새미는 어쩌다 모든 일에 관여하는 성격이 되었는지 자문해본다. 뛰어내리는 성격으로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성격으로 사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최대한 값진 삶이 될지 궁금해한다.

P.413

 

 

 

 

"브릿마리 씨가 저의 눈부신 이야기예요."

P.405

 

책을 읽다가 정말 울컥해서 눈물이 났던 한 줄이다.

이 문장에 나처럼 코 끝이 시큰해진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서로의 삶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삶을 쓰다듬어 주는 순간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나도 그런 아름다운 손을 갖고 싶다. 또한 받고 싶다.

 

 

 

나는 브릿마리 여사와는 다르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같다.

뛰어내리는 삶을 살아보지 못했고, 매번 늘 거기에서 멈추는 삶을 살아왔다.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더 컸고, 낯섦보다 익숙함을 더 사랑했다.

끝없이 바다로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한곳에 고요히 멈춘 연못 같은 삶이 익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가끔 이 연못이 썩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브릿마리 여사는 60대가 넘어서 기어코 그 삶을 깨고 나왔다.

나는 나를 깨고 나오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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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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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디 아더 피플'은 당신이 증오하는 사람을 죽여드립니다.

단, 당신은 다른 살인 계획에 협조해야 합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들 알고 있다.

견딜만한 억울한 일과 견디지 못할 만큼 크나큰 억울함을 겪으며 삶이 이어진다.

늘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조차도 세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견딜 수 없는 불행이 자신을 덮칠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는다.

도저히 견뎌지지 않는 슬픔 앞에, 분노와 절망 앞에 '디 아더 피플'이 손을 내민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누군가를 앗아간 그 사람에게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지금 당신이 겪는 그런 지옥의 고통을 그 사람도 똑같이 겪게 해주겠다고.

 

그것은 악마의 속삭임일까?

아니면 우리를 간신히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한 가닥 희망의 메시지일까?

 

 

 

 

 

하지만 결국에는 똑같아질 것이다. 남들처럼 그렇게 될 것이다. 시간이 그들 없이 흘러가버릴 것이다. 나머지 세상은 계속 목적지를 향해 갈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던 사람들만 승강장에 남을 것이다. 떠나지 못하고, 불침번을 접지 못하고.

실종은 죽음과 다르다. 어떻게 보면 더 나쁘다. 죽음에는 끝이 있다. 죽음에는 슬퍼하는 시간이 허락된다. 추모하고 촛불을 켜고 꽃을 놓는 시간이. 떠나보내는 시간이.

실종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림보다. 당신은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이 잡힌다. 지평선 위로 희망이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절망이 콘도르처럼 맴을 도는 낯설고 암울한 세상에서.

_ P.27

 

 

 

게이브에게 그날은 그냥 흔한 많은 날들 중 하루였다.

도로 위였고, 짜증 날 만큼 차가 막혔다.

막히는 도로 위에서 할 일이라고는 앞차를 쳐다보는 것 밖에 없었다.

그때, 앞 차의 뒷 유리창에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바로 게이브의 딸 이지의 얼굴이.

'아빠'라고 부르는 입모양을 분명히 봤는데 순식간에 아이는 사라졌다.

잘못 본 걸까.

지금 엄마와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딸이 꽉 막힌 고속도로 위 처음 보는 낡은 차 뒷좌석에 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게이브는 그 차를 따라간다. 너무 많은 차의 범람 속에서 결국 놓쳐버리고 말았지만.

 

휴대폰은 방전되었고, 불안은 자꾸만 몸피를 키우며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간신히 휴게소에 들러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그의 아내가 아닌 경찰이었다.

 

그렇게 그는 그날, 가족을 잃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사람들이 말하길 인간을 망가뜨리는 건 증오와 가슴에 맺힌 응어리라고 한다. 아니다. 인간을 망가뜨리는 건 희망이다. 기생충처럼 안에서부터 갉아먹는다. 상어 위에 매달린 미끼처럼 만든다. 하지만 희망이 인간을 죽이지는 않는다. 희망이 그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다.

_ P.22

 

 

 

불행은 그렇게 찾아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얼굴로.

 

평범했던 어느 날, 집안으로 들어온 강도에게 아내와 딸이 살해당하는 일상을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가 생각했던 그 어떤 불행도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았었다.

기껏해야 이혼을 하게 되지 않을까, 같은 불행의 얼굴을 짐작했을 뿐.

 

그런데 더 절망적인 것은, 그는 그날 분명 도로 위 낯선 차의 뒷좌석에서 그의 딸 이지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 희망이 그를 더 절망적이게 만들었다.

어쩌면 죽음보다 더 잔인한 실종의 이름으로 그의 세상을 멈추게 만들었으니까.

 

아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실낱같은 희망 하나로 그는 시간을 견뎠다.

아이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 도로 위에서 끊임없이 달리고 달리며 아이를 찾아다니길 몇 년째, 이지는 정말 살아있을까?

그가 그날 본 것은 정말 이지의 얼굴이었을까?

착각은 아니었을까?

 

살아있다면 아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이가 살아있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아빠의 절망으로부터.

제목인 '디 아더 피플'과 맞닿는 지점은 어디쯤일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이야기는 이어진다.

그의 절망의 발걸음을 함께 걸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사건의 추이만큼이나 이 앞부분의 이야기가 더 마음을 끌어당겼다.

상상하지 못했던 불행과 마주했을 때, 절망보다 잔인한 희망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견딘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문장들이 오랜 여운을 남겼다.

 

추리 스릴러 장르를 읽으면서 문장이 너무 좋아서 감탄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특히나 번역서는 더더욱이.

그런데 이 책은 까마득히 깊은 마음이 담긴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서 스토리뿐 아니라 문장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매력적인 책이었다.

C.J. 튜더가 이미 유명하고 인기 있는 작가였던지라 읽지 않아도 익숙한 작가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 또한 그 사람들 틈에 이름을 올려야겠다.

 

 

 

 

 

 

"하지만 죽이지는 못하겠지. 너는 살인범이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너는 화가 나고, 무력하고 속수무책인 사람이 된 것 같겠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분을 느끼거든. 어떤 놈이 네 딸을 성폭행했는데 경찰에서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고 해. 어떤 운전자가 네 엄마를 뭉개고 지나갔는데 운전면허가 취소되고 그만이야. 의사의 과실로 네 아이가 죽었는데 그 의사는 경고를 받고 끝이야. 인생은 공평하지가 않지. 평범한 사람들이 항상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런데 누가 와서 그걸 바로잡아주겠다고 해. 그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너와 같은 고통을 안기겠다고. 네 손은 더럽힐 필요 없어. 너는 절대 엮일 일이 없어."

_ P.164~16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인간다운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짐작조차도 불가능한 고통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이런 제안이 가닿는다면 그들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을 과연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우리가 함부로 재단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

범죄가 무엇인지, 죄를 짓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가끔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너무 끔찍한 범죄가 시시때때로 일어나고 있고, 남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다움을 잃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일 뿐, 우리가 당사자가 되었을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짐작조차 불가능한 끔찍한 범죄 앞에서 우리의 정신은 온전할 수 있을까.

 

옳음을 끝끝내 지켜낼 수 있을까.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들어 주는 스릴러였고,

스릴러에 충실하게 반전의 묘미도 꽉꽉 눌러 담은 책이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스릴러가 꼭 챙겨야만 하는 기본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재미와 반전일 것이다.

거기에 깊이와 문장력까지 플러스가 되었으니 재미없기가 더 힘들 것 같다.

 

C.J. 튜더의 전작들 또한 읽어보고 싶어졌다.

앞으로 출간될 신작들 또한 열심히 챙겨 읽게 될 것 같다.

 

묵직하게 남는 게 있는 스릴러를 원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비극의 포인트는 말이 안 된다는 데 있는데, 사람들은 비극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냥 벌어진 일인데.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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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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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마시는 술은 잘 취하지도 않았다. 새벽은 밝아올 줄을 몰랐다. 밤은 까맣고 고즈넉했다. 마침내 새벽이 올 때 즈음에, 갑자기 마음의 가장자리가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P.190 _ 부장님 죄송해요

 

 

그러니까 이 책은, 어느 밤 갑자기 와장창 무너져내린 마음의 가장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단단하고 온전하게 잘 붙어 있다고 믿었던 마음이 쩌억하고 갈라져버린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하거나 놀라운 신화가 아닐뿐더러 특별한 소수의 이야기도 아닌 너무 흔해서 돌처럼 함부로 굴러다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점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정아의 이야기는 오직 정아의 이야기가 아니고, 책 속 누구의 삶도 오직 책 속의 삶이 아닌,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한 '걔는 그랬다더라'는 이야기와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누군가의 끝난 연애사는 책보다 더 험한 경우가 많았다.

아름답게 시작해 아름답게 끝난 '연애'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이유로 시작된 연애는 각자의 이유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럽게' 끝나고는 했다.

 

슬픈 건, 그 누구도 진창을 밟게 될 것을 알고 그 길로 걸어가진 않는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보이는 그 발걸음에 사회의 강요는 정말 조금도 없었는지 의문이 든다.

 

선택은 매번 스스로 하는 것 같지만,

그 선택을 하기까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부도덕하고 배덕해 보이는 그녀들의 어떤 시간들에 대해 그녀들을 둘러싼 우리의 책임은 정말 없는 것일까.

 

 

 

책 속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삶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해를 끌어낼 것이다.

도덕의 스펙트럼을 통과한 그녀들의 이야기는 명백히 부도덕하고 배덕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거의 범죄 수준으로 멍청했던' 그녀들의 선택에 비웃음을 짓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누구의 삶도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은 그렇다.

여전히 조선시대에서 멈춘 것만 같은 여성을 향한 도덕적 잣대 앞에서 살아남는 법은 배덕을 모르는 얼굴을 짓는 것이다.

'노브라'를 향한 날선 댓글은 실제로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달았다고 한다.

함께 틀을 깨트리기 보다 비난하는 쪽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이 정해놓은 도덕적 여성의 기준에서 엇나가는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나는 세상이 원하는 도덕적이고 현숙한 여자'라는 것을 반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누구도 자신 속의 배덕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들키고 싶지 않은 얼굴을 감추느라 그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아닐까.

세상이 정해놓은 틀에 자신을 짜 맞추느라 안간힘을 쓰는 동안 우리는 더한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들 모두 가슴속에 배덕의 얼굴 몇쯤은 가지고 산다고 생각한다.

배덕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상처의 얼굴이 된다.

내가 잘못한 것인지 당신들의 잣대가 잘못된 것인지 따져보기도 전에 감춰야만 했던 상처의 자국들.

우리가 숨겨둔 그 얼굴들이 이 책 속에서 우리를 응시한다.

 

그녀들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비난보다 더 먼저 튀어나와버린 내 속의 상처받은 얼굴이 서로의 텅 빈 눈동자 너머 무너진 가슴 언저리를 들여다보고야 말았다.

당신도 나도 괜찮은 듯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이제 그만 세상이 강제로 씌운 '도덕적 여자'의 얼굴을 벗어버리기로 하자.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그녀들의 삶'보다도 마지막 '작가의 말'이었다.

여자로 태어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겠다는 태아들의 선택보다도 더 치명타를 입혔던 것은 '엄마 결혼하지 마'였다.

'나를 낳지 않아도 되니까, 결혼하지 말고 엄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나를 때리는 둔탁한 통증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엄마의 세상에서 '여자'라는 이름은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요구했는지 세상의 딸들은 모두 알고 있어서, 시간을 거슬러 젊은 시절 엄마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는 질문에 압도적 1위의 답이 바로 '엄마 결혼하지 마'였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누군가의 삶이 어쩌고저쩌고, 도덕적이다 아니다 같은 것들이 너무 가벼워서 웃음이 났다.

 

바로 저 한 문장이 모든 말을 했다.

여성으로 사는 일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엄마 결혼하지 마, 나를 낳지 않아도 되니까, 결혼하지 말고 엄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이 문장에 그 답이 있다.

 

 

 

 

나는 차라리 '82년생 김지영'보다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이 훨씬 더 오늘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늘 피해를 받으며 삶을 지탱해 온 김지영보다, 그것이 과연 잘못인지 아닌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삐걱삐걱 삶의 걸음을 걷는 정아들(다른 이름의 여러 삶이 담겨있지만 통칭해서)의 이야기가 훨씬 와닿는다.

꼭 우리가 피해자의 얼굴만을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가해자였다가, 때로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사실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게 진짜 삶의 얼굴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가해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정아의 모습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고작 캐러멜 모카 프라푸치노 한 잔에, 사치라고 부르기도 너무 서글퍼서 눈물이 찔끔 날 것만 같은 6800원에 얼마든지 삶이 진창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아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맘충이보다 훨씬 더 아프고 독한 진짜 현실이 정아에게 있다.

그래서 나는 김지영의 얼굴보다 이 책 속의 정아들의 민낯에 훨씬 더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조금도 꾸미지 않은 진짜 민낯은 때로는 불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세상 여자들을 향한 진한 응원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너도 살아.'라는.

 

 

세상이 내게 드리운 마리오네트의 실을 끊어버리고 온전히 내 의지대로 춤추고 싶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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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 - 고생대부터 현대까지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
마루야마 다카시 지음, 사토 마사노리 외 그림, 허영은 옮김, 이마이즈미 다다아키 외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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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종의 생물이 들려주는 안타까운 멸종의 이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안타까운 멸종과 진화의 역사

 

 

전작인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를 아이에게 사줬었다.

정말 너무 재밌어하며 읽고 또 읽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뿌듯했던지.

 

초등학생이 읽기에 전혀 어렵지 않으면서도 흥미롭고, 새롭고, 놀라운 책이었다.

놀라운 건 성인인 내가 읽어도 너무 재밌다는 사실.^^

몰랐던 동물들의 멸종과 살아남은 동물들의 이유를 읽으며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다음 시리즈가 나오면 너무 좋겠다고 한참 기다렸는데, 비슷한 제목의 책이 출간되어 얼른 주문했더니 작가가 달랐다.

출판사도 작가도 달라서 약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드디어~ 같은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소리 질러~~~!! 꺄~~~악~~~!!!! >_<

 

 

 

전작은 '멸종의 이유'를 바탕으로 분류가 되어있다.

1. 방심해서 멸종

2. 해도 너무해서 멸종

3. 솜씨가 영 꽝이라서 멸종

4. 운이 나빠서 멸종

 

그리고 5번에서는 '멸종할 것 같았지만 멸종하지 않은 동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책에서는 '시대순'으로 멸종 동물들이 나뉘어 있다.

1. 고생대에 멸종 - 어중간한 진화는 힘들어!

2. 중생대에 멸종 - 무한 생존 경쟁은 힘들어!

3. 신생대에 멸종 - 엉터리 진화는 힘들어!

4. 현대에 멸종 - 사람 때문에 힘들어!

 

자연적 진화에 따른 멸종을 시작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저지른 멸종의 역사가 담겨있다.

저자는 이를 '자연스러운 멸종과 슬픈 멸종'이라고 불렀는데,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슬픈 멸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얼마 전 읽었던 '깃털 도둑'에서 새가 사람의 욕심 때문에 멸종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봤기에 더더욱 '현대에 멸종' 부분이 슬펐다.

이 챕터 뒤에는 '긴급 특집'이라는 페이지가 있는데, 인간 때문에 멸종한 동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변명과 이에 대한 찬반 의견이 담겨있어 아이들의 생각의 폭을 더 넓혀주는 시간이 되어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쉬어가기 페이지를 통해 멸종 동물뿐 아니라 좀 더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다양한 지식이 노래로 담겨있어 위트 있게 느껴졌다.

음을 알 수 없으니 읽으면서 래퍼가 된 기분.^^

 

 

 

 

사실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챕터는 바로 5,6번 챕터였다.

 

5. 멸종할 줄 알았는데 멸종하지 않은 생물 - 살아남았지만 힘들어!

6. 이유가 있어서 번성했습니다 - 힘들지만 살아가고 있어!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멸종된 동물의 이야기보다도 더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멸종된 동물들 중 몇몇은 알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잘 모르던 동물들이었는데, 바로 이 챕터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 등장한다.

하루살이나 모기는 너무 흔하게 보고 살아가는 아이들이라 그토록 오랜 시간 살아남아 존재하는 아이들인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귀찮게만 여기던 곤충이었는데 그들의 생존의 역사를 만나니 갑자기 새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쉬우면서도 알짜배기 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동물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화체를 빌리기도 하고, 심지어 인스타그램을 흉내 내기까지 한다.

쭉 같은 형태로 쓰여진 글은 내용에 상관없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라면 흥미를 잃기 쉽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의 흥미를 다양한 방법으로 끌어내는 저자의 솜씨에 절로 박수가 나온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지식 또한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림으로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눈에 확 들어오게 알려주고 있어서 놀다가 덤으로 공부까지 되는 멀티태스킹을 거저 얻을 수 있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신경 쓴 모습이 느껴져서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글뿐 아니라 그림과 책의 색감 또한 눈을 사로잡는다.

유머러스한 글을 읽으면서도 재밌지만, 그림을 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알록달록한 색감이 '나 재밌는 친구야'라고 미리 알려주는 느낌이다.

이왕이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으니까!^^

 

 

 

 

함께 들어있는 포스터도 뒷면에 엄청난 미로가 담겨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ㅎㅎ

우리 둘째는 아직도 제대로 된 길을 못 찾았다고. ㅋㅋㅋㅋ

나도 시간 날 때 도전해 봐야겠다.

누가 먼저 찾나 시합이라도 해야 될까?

 

 

아이들에겐 정말 너무너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전작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었지만, 두 번째 출간된 '또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라는 더더더더욱 추천하고 싶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둘째 녀석이 읽고 또 읽고, 또또 또 읽는 책이라서 누구라도 재밌게 읽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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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건조하고 바스락 거리는 문장, 삭막하고 황폐한 사람들, 그 속에 우리들의 민낯이 담겨있다. 살인자의 축제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침묵하는 사람들 속에서 말하려는 자의 몸부림이 어쩐지 서글펐다. 정유정작가의 7년의 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압도감이 이 책를 읽는 동안 느껴졌다! 무조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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