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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평점 :

혼자 마시는 술은 잘 취하지도 않았다. 새벽은 밝아올 줄을 몰랐다. 밤은 까맣고 고즈넉했다. 마침내 새벽이 올 때 즈음에, 갑자기 마음의 가장자리가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P.190 _ 부장님 죄송해요
그러니까 이 책은, 어느 밤 갑자기 와장창 무너져내린 마음의 가장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단단하고 온전하게 잘 붙어 있다고 믿었던 마음이 쩌억하고 갈라져버린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하거나 놀라운 신화가 아닐뿐더러 특별한 소수의 이야기도 아닌 너무 흔해서 돌처럼 함부로 굴러다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점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정아의 이야기는 오직 정아의 이야기가 아니고, 책 속 누구의 삶도 오직 책 속의 삶이 아닌,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한 '걔는 그랬다더라'는 이야기와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누군가의 끝난 연애사는 책보다 더 험한 경우가 많았다.
아름답게 시작해 아름답게 끝난 '연애'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이유로 시작된 연애는 각자의 이유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럽게' 끝나고는 했다.
슬픈 건, 그 누구도 진창을 밟게 될 것을 알고 그 길로 걸어가진 않는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보이는 그 발걸음에 사회의 강요는 정말 조금도 없었는지 의문이 든다.
선택은 매번 스스로 하는 것 같지만,
그 선택을 하기까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부도덕하고 배덕해 보이는 그녀들의 어떤 시간들에 대해 그녀들을 둘러싼 우리의 책임은 정말 없는 것일까.

책 속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삶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해를 끌어낼 것이다.
도덕의 스펙트럼을 통과한 그녀들의 이야기는 명백히 부도덕하고 배덕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거의 범죄 수준으로 멍청했던' 그녀들의 선택에 비웃음을 짓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누구의 삶도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은 그렇다.
여전히 조선시대에서 멈춘 것만 같은 여성을 향한 도덕적 잣대 앞에서 살아남는 법은 배덕을 모르는 얼굴을 짓는 것이다.
'노브라'를 향한 날선 댓글은 실제로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달았다고 한다.
함께 틀을 깨트리기 보다 비난하는 쪽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이 정해놓은 도덕적 여성의 기준에서 엇나가는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나는 세상이 원하는 도덕적이고 현숙한 여자'라는 것을 반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누구도 자신 속의 배덕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들키고 싶지 않은 얼굴을 감추느라 그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아닐까.
세상이 정해놓은 틀에 자신을 짜 맞추느라 안간힘을 쓰는 동안 우리는 더한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들 모두 가슴속에 배덕의 얼굴 몇쯤은 가지고 산다고 생각한다.
배덕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상처의 얼굴이 된다.
내가 잘못한 것인지 당신들의 잣대가 잘못된 것인지 따져보기도 전에 감춰야만 했던 상처의 자국들.
우리가 숨겨둔 그 얼굴들이 이 책 속에서 우리를 응시한다.
그녀들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비난보다 더 먼저 튀어나와버린 내 속의 상처받은 얼굴이 서로의 텅 빈 눈동자 너머 무너진 가슴 언저리를 들여다보고야 말았다.
당신도 나도 괜찮은 듯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이제 그만 세상이 강제로 씌운 '도덕적 여자'의 얼굴을 벗어버리기로 하자.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그녀들의 삶'보다도 마지막 '작가의 말'이었다.
여자로 태어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겠다는 태아들의 선택보다도 더 치명타를 입혔던 것은 '엄마 결혼하지 마'였다.
'나를 낳지 않아도 되니까, 결혼하지 말고 엄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나를 때리는 둔탁한 통증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엄마의 세상에서 '여자'라는 이름은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요구했는지 세상의 딸들은 모두 알고 있어서, 시간을 거슬러 젊은 시절 엄마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는 질문에 압도적 1위의 답이 바로 '엄마 결혼하지 마'였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누군가의 삶이 어쩌고저쩌고, 도덕적이다 아니다 같은 것들이 너무 가벼워서 웃음이 났다.
바로 저 한 문장이 모든 말을 했다.
여성으로 사는 일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엄마 결혼하지 마, 나를 낳지 않아도 되니까, 결혼하지 말고 엄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이 문장에 그 답이 있다.

나는 차라리 '82년생 김지영'보다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이 훨씬 더 오늘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늘 피해를 받으며 삶을 지탱해 온 김지영보다, 그것이 과연 잘못인지 아닌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삐걱삐걱 삶의 걸음을 걷는 정아들(다른 이름의 여러 삶이 담겨있지만 통칭해서)의 이야기가 훨씬 와닿는다.
꼭 우리가 피해자의 얼굴만을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가해자였다가, 때로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사실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게 진짜 삶의 얼굴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가해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정아의 모습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고작 캐러멜 모카 프라푸치노 한 잔에, 사치라고 부르기도 너무 서글퍼서 눈물이 찔끔 날 것만 같은 6800원에 얼마든지 삶이 진창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아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맘충이보다 훨씬 더 아프고 독한 진짜 현실이 정아에게 있다.
그래서 나는 김지영의 얼굴보다 이 책 속의 정아들의 민낯에 훨씬 더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조금도 꾸미지 않은 진짜 민낯은 때로는 불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세상 여자들을 향한 진한 응원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너도 살아.'라는.
세상이 내게 드리운 마리오네트의 실을 끊어버리고 온전히 내 의지대로 춤추고 싶어지는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