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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지연
이서정 지음 / 청어람 / 2016년 3월
평점 :
신비로운 설화 같은 연과 하녹의 이야기.
소개글 때문에 동양설화 느낌이 나는 판타지 시대물인줄 알았다.
하지만 어쩐지 역사서가 떠오르는 시대물이었다.
'월성연화'를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내가 이야기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눈치 채지 않을까 싶다.
처음 월성연화를 읽었을때 역사책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로맨스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골격이나 기초가 되는 바탕들이 '로맨스적'이라기 보다는 '역사적'인 느낌이 강했었으니까.
실존인물을 가져다가 글을 쓸때 그의 생각이나 느낌들은 상상하여 허구로 써내릴 수 있지만
이미 역사적 사료들이 존재하는 그들의 생의 단면, 단면들은 도저히 거짓으로 꾸며낼 수가 없다.
그래서 로설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차용할 때에는 대체로 주변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도서에서 이미 기록이 남아있는 누군가의 생을 작가적인 상상력을 보태어 출간하는 경우 우리는 그 끝을 알고 있기에 글을 읽는 내내 암담함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처절하게 살아낸 그들의 삶의 끝을 바꿔주고 싶은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존재했던 이야기는 결국 그 큰 줄기를 바꿀 수가 없으니까.
결국 그들은 처참하고 서글픈 최후를 맞이하고야 마니까.
전작이었던 '월성연화'도 신작인 '신록지연'도 마치 그런 느낌의 글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들이 실존했기 때문에 도저히 바꿔치기 할 수 없었던 처참한 순간의 기록인것 마냥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쩜 이리도 매번 그들은 안타까울까.
로설에서 수많은 막장과 경악할 만한 스토리가 흔해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인듯 여겨진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두 주인공의 사랑을 빛나게 해줄 어둠이었을 뿐이었다.
그 가시밭과 진흙탕 속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더 영롱해지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그들의 끝을 이미 알고 있기에, 같이 분노하고 화를 내면서도 정작 안타까움은 덜 했던 것 같다.
애초에 그들의 역경은 사랑을 빛나게해줄 도구였을 뿐이니까.
헌데 이서정님의 글은 매번 그 고난과 역경이 현실같기만 하다.
그 시대의 시대상을 너무 잘 표현한 덕분인건지, 배경을 너무 실제같이 써내려서인건지.....여하튼 나는 매번 답답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렇게 살아 낼 수 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삶 때문에.
마음이 저리고 안타깝고 숨이 턱턱 막힌다.
(실제로 이 글 또한 백제 건국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배경도 그 시대 어디쯤인듯 싶고...)
그렇다고 미칠듯한 분노와 눈물을 쏙 빼는 오열은 없다.
애초에 감정줄을 잡고 흔드는 신파적 묘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갑지 않지만 묘하게 시니컬한듯도 여겨지는 문장, 문장이 감정 과잉을 억누르면서도 그들이 처한 상황의 답답함과 처연함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담담한듯 묘한 여운을 주는 그 문장의 느낌이 독특하다.
월성연화를 읽을때도 로맨스적인 양념들이 부족해서 그렇지.... 참 잘 씌여진 글이다 싶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문장이나 어휘들이 감탄을 자아냈다.
어쩌면 이렇게 문장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서 묘사해 낼 수 있는건지.
간만에 참 퀄리티 높은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
오타 없다.
비문 없다.
문장 또한 기가 막히게 정교하다.
이런 글들이 로맨스를 읽는 독자를 으쓱하게 만들어 준다.
허접한 싸구려 글을 읽는 독자가 아니라고. 로맨스라는 장르를 우습게 보지말라고.
내 코가 한뼘쯤은 쑥 자란것 같은 이 기분.
글을 소개하자면
학교 다닐때 배웠던 '소도'와 비슷한 맥락으로 여겨지는 '성도'가 존재하고 거기에서 나고 자란 여주 연과
형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그저 시키는대로 삶을 살아내는 섭제국의 왕 하녹의 이야기다.
두사람 모두 그저 '사람'으로 살고자 했지만
내내 아무것도 아닌채로, 혹은 나자신이 아닌채로 살아내야 했던 처연한 삶 속에서 서로를 만나 '당신의 무엇'이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글을 읽는 내내 하녹이 안타까워 한숨을 골백번은 쉬었던가 보다.
처음 한참동안은 이렇게 남주에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가 있을까 싶을 만큼 나약하고 무능해 보이는 그가 별로였다.
로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인 왕 중에서는 참 찾기 어려운 캐릭터였으니까.
(물론 이런 왕들이 왕왕 등장하기는 했다. 다른 책에서도 간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가장 안타깝고 가장 마음이 씌였던 캐릭터 역시 하녹이었다.
어차피 하늘은 그에게 그런 삶만을 허락했으니 그가 그 속에서 다른 삶을 살아내기란 여간 힘들일이 아니였을테다.
그렇게라도 어머니를 위해 형을 위해 그는 살아 낼 수 밖에 없었을것 같다.
그래서 ... 그런 마음을 알아서....더 안타깝고 아프다.
그도 그의 어머니도.
사실 이 글 속에서 가장 로맨스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단'을 꼽을 것 같다.
그만큼 단의 캐릭터와 분위기와 설정이 마음을 끌었고 혹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천재, 단.
연과는 너무도 다른 단의 모습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 주기엔, 단은 너무 짧게 등장한다.
단의 이야기를 쓴다면 굉장히 로맨스적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지만..... 전작과 이 책을 보건데 애초에 이서정님과 로맨스적인 어떤것은 좀 괴리감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한 발자욱쯤 비켜간 느낌이랄까.
물론
이 책은 로맨스다.
분명한 로맨스가 맞다.
심지어 월성연화보다도 더 로맨스적이다.
그러나 타의 다른 도서들과 비교를 하자면....음....로설스러운 로설은 아닌것 같다.
뭐...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이지만!!^^
'월성연화'를 재밌게 읽은 분에게는 강추!!!!
아주 잘씌인 문장력과 어휘력이 빛나는 책을 원하시는 분에게도 강추!!!!
드라마틱하고 서스펜스한 시대물 로맨스를 기대하시거나
절절해서 폭풍오열을 하고 싶거나 로맨스를 위한 로맨스를 기대하시는 분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취향을 탈 듯 하지만
내게는 콧대를 한뼘씩이나 높여준 멋진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서정님의 다음 글도 기대가 된다.
얼마나 안정되고 탄탄한 문장으로 다시 돌아오실지. 두근두근.
처음보는 한글중에 정말 신기했던.
옰
; 일을 잘못한 것에 대한 갚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