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이울다
이영희 지음 / 청어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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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같은 글이다.

달리 뭘 덧붙일 것도 없이, 말 그래도 배꽃으로 가득 찬 글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봄인 글.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무한한 도돌이표를 세기며 다시 그 4월에 돌아오고야 마는 글.

마치 배꽃이 흩날리는 흙길 어딘가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글.

단정하고 잔잔한 글이다.

 

시골에서 자랐던 나에게는 그 모든 풍경들이 익숙해서 영상을 보는듯 눈앞에 펼쳐졌지만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또 어떤 느낌을 줄지는 모르겠다.

어릴적 거닐었던 오솔길과 온갖 들꽃과 배꽃들이 떠올라서 글을 읽는 시간 동안 향수에 젖었었다.

맞아 그 봄, 그 배꽃이 참 예뻤었지.

하얗고 순하던 배꽃이 참 고왔었지.

그 곁을 지키던 복사꽃도 어여뻤는데.... 배꽃을 닮은 앵두꽃도 앙증맞았는데....

책을 읽으며 나도 어릴적 그 시간들을 함께 더듬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좀 힘들었던 글.

감정 과잉의 글을 잘 소화시키지 못한다.

매번 감정이 과해 넘쳐흐르는 글을 읽으면 체증이 인다.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가며 조금씩 젖어드는 감정을 좋아하는데, 종종 시작부터 나는 모르는 그들의 감정이 절절한 경우가 있다.

이 책도 내겐 그러했다.

시작부터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절절했다.

그들의 사연을 알 수 없는 나는 가득찬 감정들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 안에 같이 녹아들고 싶은데.....그들을 이해하기엔 나는 완벽한 타인일 뿐.

글의 문체는 시종일관 담담했고 담백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 감정의 넘침이 부담스러웠나 보다.

특히 두 주인공은 유난히도 감정이 정갈한 사람들임에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하나까지 애절하고 절절하기 그지 없다보니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그 절절함을 이해시키기엔 그들의 사연이 너무 단조롭고 짧았기에 ......... 사랑이라는게 찰나에 불과한 감정의 공유로 시작되기도 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마음한켠에선 '부족'을 느꼈나 보다.

어쩌면 내내 겉돌게 여겨졌던 그 감정과 눈빛들을 너무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열한살, 어느 배꽃 흩날리는 봄에 마주친 남자를 가슴속 연정으로 깊이 품고서 결국은 그와 결혼하게 된 지안.

계몽 운동을 하는 아버지의 딸로 친일파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강행할 만큼 그녀의 마음은 깊었으나

그 모든 마음의 길은 오해로 부터 시작되어 어긋난 인연의 실을 이어놓고 만다.

사랑하는 이가 천하다는 이유로 결국 잃고야 말았던 두현은 명문가 규수인 지안에게 못되게 굴며 상처를 주는데....

오해속에 숨겨져버린 또다른 인연 은 그것을 지켜보느라 내내 마음이 아프다.

다른곳을 바라보는 셋,

또한 서로를 외면 할 수 밖에 없었던 셋.

마음속에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배꽃이 지천인 이곡리의 4월을 살아낸다.


경성에서도 내내 단이 그리워했던 이곡리의 배꽃.

만주에서도 내내 단을 살게했던 이곡리의 배꽃.

단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그 곳의 봄, 배꽃, 그리고 지안.


그 작은 동네까지 찾아든 나라잃은 설움은 내내 그렇게 희게 피어났나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거라고.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하얗게 하얗게 피어났나보다.

그래서 이곡리에는 내내 봄만 있나 보다.

나라를 잃어도 사랑을 잃을 수는 없었다는 작가님의 후기처럼, 배꽃 흐드러지는 이곡리의 봄은 그렇게 사랑이었나 보다.


배꽃이 감춰준 사랑의 서성임들이 다시 찾아온 봄을 따라 너울너울 아지랑이처럼 피어난다.

그 시절을 살아냈던 누구의 가슴에도.

반드시.



 


사실은 지나친 배꽃 타령에 좀 질리기도 했다.

제목을 먼저 정해두고 쓴 글이 아닐까 싶을 만큼, '배꽃 이울다' 라는 표현이 지칠정도로 많이 나온다.

문장 마디마디 마다 등장하는 표현이 처음엔 신선했다가 그다음엔 과해서 부담스러웠다가 나중엔 원래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나보다 하는 체념에 이르기까지 ..... 좀 과하다 싶었다.

물론 그런 표현들이 글을 서정적이고 예쁘게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이나, 뭐든 넘치는 것은 모자란만 못하다는 옛말은 그른게 없다.

애초에 배경뿐 아니라 여주의 모습을 배꽃에 비유할꺼라고 예상을 했음에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 표현들 덕분에 지쳤다.

여주도 배꽃, 배경도 배꽃, 감정의 흐름도 배꽃..... 모든 곳곳에 배꽃 뿐이다.

아 남주를 표현했던 자운영꽃도 물론 여러번 등장하기는 하지만...;;;;;;

여튼 책 전체가 배꽃 잔치다.

작가님이 꽃을 몹시도 사랑하신다니....그 마음이 과하게 책에 투영되었던 모양이다.

 

몹시도 서정적이고 분위기있는 문장들이 자주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내내 구구절절 설명을 하다보니 (그게 감정이던 배경이던...) 묘하게 집중력이 흐트러지곤 했다.

첫 작이라서 그런건지 강약조절이 좀 모자랐던 것 같기도 하고, 최대한 멋지고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했던 욕심이 지나쳤던것 같기도 하고....;;;

여튼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꽤 있었는데 그 부분들이 좀 더 부곽되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다.


온천지에 다 고만고만한 색깔들을 모아두면 그 색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다.

적당히 낮추고 적당히 감추면서 반짝일 부분들은 좀더 드러내고 배경이 되어줄 부분들은 채도를 낮춰주었다면 훨씬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글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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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지연
이서정 지음 / 청어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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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설화 같은 연과 하녹의 이야기.

소개글 때문에 동양설화 느낌이 나는 판타지 시대물인줄 알았다.

하지만 어쩐지 역사서가 떠오르는 시대물이었다.

'월성연화'를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내가 이야기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눈치 채지 않을까 싶다.

처음 월성연화를 읽었을때 역사책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로맨스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골격이나 기초가 되는 바탕들이 '로맨스적'이라기 보다는 '역사적'인 느낌이 강했었으니까.

실존인물을 가져다가 글을 쓸때 그의 생각이나 느낌들은 상상하여 허구로 써내릴 수 있지만

이미 역사적 사료들이 존재하는 그들의 생의 단면, 단면들은 도저히 거짓으로 꾸며낼 수가 없다.

그래서 로설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차용할 때에는 대체로 주변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도서에서 이미 기록이 남아있는 누군가의 생을 작가적인 상상력을 보태어 출간하는 경우 우리는 그 끝을 알고 있기에 글을 읽는 내내 암담함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처절하게 살아낸 그들의 삶의 끝을 바꿔주고 싶은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존재했던 이야기는 결국 그 큰 줄기를 바꿀 수가 없으니까.

결국 그들은 처참하고 서글픈 최후를 맞이하고야 마니까.

 

전작이었던 '월성연화'도 신작인 '신록지연'도 마치 그런 느낌의 글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들이 실존했기 때문에 도저히 바꿔치기 할 수 없었던 처참한 순간의 기록인것 마냥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쩜 이리도 매번 그들은 안타까울까.

로설에서 수많은 막장과 경악할 만한 스토리가 흔해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인듯 여겨진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두 주인공의 사랑을 빛나게 해줄 어둠이었을 뿐이었다.

그 가시밭과 진흙탕 속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더 영롱해지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그들의 끝을 이미 알고 있기에, 같이 분노하고 화를 내면서도 정작 안타까움은 덜 했던 것 같다.

애초에 그들의 역경은 사랑을 빛나게해줄 도구였을 뿐이니까.

헌데 이서정님의 글은 매번 그 고난과 역경이 현실같기만 하다.

그 시대의 시대상을 너무 잘 표현한 덕분인건지, 배경을 너무 실제같이 써내려서인건지.....여하튼 나는 매번 답답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렇게 살아 낼 수 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삶 때문에.

마음이 저리고 안타깝고 숨이 턱턱 막힌다.

(실제로 이 글 또한 백제 건국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배경도 그 시대 어디쯤인듯 싶고...)

 

그렇다고  미칠듯한 분노와 눈물을 쏙 빼는 오열은 없다.

애초에 감정줄을 잡고 흔드는 신파적 묘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갑지 않지만 묘하게 시니컬한듯도 여겨지는 문장, 문장이 감정 과잉을 억누르면서도 그들이 처한 상황의 답답함과 처연함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담담한듯 묘한 여운을 주는 그 문장의 느낌이 독특하다.

월성연화를 읽을때도 로맨스적인 양념들이 부족해서 그렇지.... 참 잘 씌여진 글이다 싶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문장이나 어휘들이 감탄을 자아냈다.

어쩌면 이렇게 문장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서 묘사해 낼 수 있는건지.

간만에 참 퀄리티 높은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

오타 없다.

비문 없다.

문장 또한 기가 막히게 정교하다.

이런 글들이 로맨스를 읽는 독자를 으쓱하게 만들어 준다.

허접한 싸구려 글을 읽는 독자가 아니라고. 로맨스라는 장르를 우습게 보지말라고.

내 코가 한뼘쯤은 쑥 자란것 같은 이 기분.


 


글을 소개하자면

학교 다닐때 배웠던 '소도'와 비슷한 맥락으로 여겨지는 '성도'가 존재하고 거기에서 나고 자란 여주 연과

형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그저 시키는대로 삶을 살아내는 섭제국의 왕 하녹의 이야기다.

두사람 모두 그저 '사람'으로 살고자 했지만

내내 아무것도 아닌채로, 혹은 나자신이 아닌채로 살아내야 했던 처연한 삶 속에서 서로를 만나 '당신의 무엇'이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글을 읽는 내내 하녹이 안타까워 한숨을 골백번은 쉬었던가 보다.

처음 한참동안은 이렇게 남주에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가 있을까 싶을 만큼 나약하고 무능해 보이는 그가 별로였다.

로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인 왕 중에서는 참 찾기 어려운 캐릭터였으니까.

(물론 이런 왕들이 왕왕 등장하기는 했다. 다른 책에서도 간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가장 안타깝고 가장 마음이 씌였던 캐릭터 역시 하녹이었다.

어차피 하늘은 그에게 그런 삶만을 허락했으니 그가 그 속에서 다른 삶을 살아내기란 여간 힘들일이 아니였을테다.

그렇게라도 어머니를 위해 형을 위해 그는 살아 낼 수 밖에 없었을것 같다.

그래서 ... 그런 마음을 알아서....더 안타깝고 아프다.

그도 그의 어머니도.

사실 이 글 속에서 가장 로맨스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단'을 꼽을 것 같다.

그만큼 단의 캐릭터와 분위기와 설정이 마음을 끌었고 혹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천재, 단.

연과는 너무도 다른 단의 모습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 주기엔, 단은 너무 짧게 등장한다.

단의 이야기를 쓴다면 굉장히 로맨스적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지만..... 전작과 이 책을 보건데 애초에 이서정님과 로맨스적인 어떤것은 좀 괴리감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한 발자욱쯤 비켜간 느낌이랄까.

 

물론

이 책은 로맨스다.

분명한 로맨스가 맞다.

심지어 월성연화보다도 더 로맨스적이다.

그러나 타의 다른 도서들과 비교를 하자면....음....로설스러운 로설은 아닌것 같다.

뭐...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이지만!!^^

 

 


'월성연화'를 재밌게 읽은 분에게는 강추!!!!

아주 잘씌인 문장력과 어휘력이 빛나는 책을 원하시는 분에게도 강추!!!!

 

드라마틱하고 서스펜스한 시대물 로맨스를 기대하시거나

절절해서 폭풍오열을 하고 싶거나 로맨스를 위한 로맨스를 기대하시는 분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취향을 탈 듯 하지만

내게는 콧대를 한뼘씩이나 높여준 멋진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서정님의 다음 글도 기대가 된다.

얼마나 안정되고 탄탄한 문장으로 다시 돌아오실지. 두근두근.

 


 


처음보는 한글중에 정말 신기했던.

; 일을 잘못한 것에 대한 갚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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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남자
임경선 지음 / 예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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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사랑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부디 우리 두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해주길 바란다'

작가의 말에 씌인 이 두줄의 문장 때문에 마지막 순간 머릿속이 뒤엉켜버렸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타인의 사랑이기 때문에 내가 함부로 재단하면 안되는 것인가.
그저 묵묵히 바라봐주기만 해야하는 것인가.
다른이들은 ‘지운’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가정이 있고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는
한 가정의 아내이고 엄마이던 소설가 지운은 어느날 느닷없이 사랑에 '빠져'버렸다.
불가항력적으로. 어쩔수 없이.

<나는 세상의 모든 형태의 사랑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그 어떤 잣대나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랑은 '하는'게 아니라 '빠지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이 있었다.
배우자가 있음에도 연애를 하는 것은 감기에 걸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감기니까 처음부터 계산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들의 '의도하진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라는 부분은 그렇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에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담긴 문제였다. 그들은 그 관계를 지속하기로 직접 '선택'한 것이고 그것은 전혀 '불가항력'이 아니였다.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연애하기로 했으면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다.> ________ p. 146


사실 나는 책의 절반을 읽는 동안 내내 이게 왜 사랑인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한 여자가 남편이 아닌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였다.
그녀가 사랑이라고 느끼고 있는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카페의 주인과 단골손님.
그 남자의 어느 부분에서도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저 여자 혼자 착각속에 도취되어 스스로의 감정에 북받쳐 미쳐있는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행동, 웃음, 눈빛 하나하나를 스스로 유리한대로 재단하고 각색해서 우쭐해졌다가 분노했다가 질투를 하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처럼 여겨졌다.
이 글의 스토리가 자아도취에 빠진 여자의 외사랑인건가 싶은 의심이 들었을 정도였으니.

그녀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도 일상을 벗어난 일탈 그 자체를 더 즐기고 원하는것 같아 보였다.
정체되어 있는 일상을 지겨워하고 답답해하고 벗어나고 싶어했다.
출렁대는 감정의 일렁임을, 죄책감과 희열이 뒤범벅이된 자극적인 쾌락을 그녀는 분명 원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꼭 그사람이여야 하는 '사랑'이 아닌, 그날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해도 그녀는 분명 타인인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것만 같아 보였다.
내게 주어진 뚜렷한 현실이 아닌, 아득한 저곳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었으니까.

후에 결국, 단정하고 올바르게 보였던 남자마저 흔들림을 보였을때
나는 아마도 절망 했던 것 같다.
그냥 여자 혼자 미쳐있었던게 차라리 나았다.
감정의 일렁임을 참지 못하고 마지막 선을 넘어서 버린 그들을 보면서, 애처로움이나 안타까움을 느끼기보다 질퍽한 불편함을 느꼈다.
사랑의 절정의 순간
그것은 아름답고 빛나는 오르가즘이 아닌 질척이고 추한 욕정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동시에 두 남자를 공유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고 건강한 관계는 아닐테니까.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만을 쫓고있는 그녀를 응원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사랑이 꼭 도덕적이여야 하는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덕한 사랑을 칭송하지는 못하겠다.

현실의 모든것을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인 것인가.
죄책감도 책임감도 가족도 아이도.... 어떤 것도 잊어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인 것인가.
사랑이라는건 도데체 어떻게 생겨먹은 감정인 것인가.


<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다 못해 잔인한 것은 자신의 외도 사실을 배우자에게 고백하는 일이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의 미덕은 이때만큼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상대를 깊은 혼란과 좌절 상태에 빠지게 만들 뿐이었다. >


놀랍게도 그녀는 결국 모두를 가졌다.
그토록 원하던 이상적이고 충족된 사랑도 손에 쥐었고 (심지어 정신뿐아니라 몸까지 전부)
안정되고 번드르르해 보이는 가정도 지켜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현숙한 아내의 가면을 뒤집어 쓴 채로 어떤것도 잃지 않았다.

내가 불륜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로인해 가정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단지 당사자인 두사람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보호받아야할 아이와 아무것도 몰랐던 배우자와 결혼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가족들이 모두 깨어지고 상처받게 되기 때문에.
그토록 이기적이고 날카로운 칼날같은 감정을 도저히 사랑이라고 명명해 주고 싶지 않았다.
불륜 말고도 수많은 이유들로 가정이 깨어지고 부부는 너무 쉽게 남이 되어버리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적어도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의는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조각나버린 가족보다 더 잔인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가정을 버린 사람들은 이기적일지언정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그들이 더 나은 사람이었다.
가족을 버리고 욕망을 쫒은 사람들을 인정하는 순간이 올 줄이야.
그만큼 그녀의 이중성이 내겐 충격이었다.
모든 관계에서 내내 이중적이었던 그녀는 앞으로 삶 또한 철저하게 포장된 채 살아 갈것이다.
끝까지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내 배우자가 다른 곳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충족된 애정을 가득 채운 채 집으로 돌아와
그 충만한 만족감으로 인해 내게 자상하고 다정한 남편 혹은 아내의 모습으로 곁을 지켜준다면...
나는 차라리 죽겠다.
그냥 죽어버리고 말겠다.
내곁에 껍데기만 뉘어놓고 내내 허기진 마음과 정신으로 죽어가다가, 다른곳 다른이에게 삶의 의미를 인공호흡하듯 들이키며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기만과 소름끼치는 살인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인지 모르고 있다.
정말 나쁜게 무엇인지, 진짜 그녀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 나에게 정신적 불륜과 육체적 불륜 중 꼭 하나를 선택해 어느것을 더 참을 수 없느냐 묻는다면
나는 두번 생각하지 않고 정신적 불륜이라고 단언하겠다.
두개 중 어느 것도 싫지만,
나는 마음 없는 삶을 살 수 없다.
애초에 그럴수 없게 프로그래밍 된 사람이다.
마음으로 나를 기만한 사람만큼은 절대 용서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이입이 되어버린 상대 배우자가 아니라
지운 그녀라면, 그녀의 입장에 내가 던져졌다면...
나는 아마도 불가항력적으로 사랑에 빠져버렸지만, 연애를 선택하지는 못할것 같다.
남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는데 그사랑이 식어버리고 또다른 사랑에 '빠져' 버린 내자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물론 책 속 그녀보다 내가 더 심각한 사랑예찬론자이고, 누구보다 더 열열히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의 내 생각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처럼 유치하고 충동적인 행동들을 저질러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닥치지 않으면 절대 알수 없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다.
오래되고 익숙하고 손때묻은 것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나는
관계의 믿음과 신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철썩같이 믿는 나는
아마도 그 선을 넘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음에 바람이 불어오면, 그냥 그렇게 훑고 지나가 버리기를 잠자코 기다리지 않을까.




결국 나는 그녀는 책망해야겠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연애를 '선택'했기 때문에.
혹은
단한번도 남편 앞에 솔직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내내 남편과 집에서 가면을 쓰고 살았다.
현숙하고 자애로운 부인의 가면을 쓰고, 다정하고 모성애 넘치는 엄마의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다.
가장 솔직하고 민낯같아야할 가족앞에서 내내 연기를 하며 사는 인생이 답답할 수 밖에.
남편에게 충분히 싫다, 좋다, 말할 수 있었을텐데.
거절을 해도 되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됐을텐데.
저 부부는 내내 서로 가면 쓴 모습만 보여주며 살고 있으니 허허로울수 밖에.
현실에서 내동댕이 쳐지는 순간 그녀는 눈을 감은채 꿈 속 세상만을 동경하고 열망했다.
그녀가 지금 가진 그 꿈같은 세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녀는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나설테다.

자신의 욕망앞에서만 유일하게 솔직했던 그녀를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내가 결혼했다'를 아직까지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여러번 봤지만)
내사람에 대한 독점욕이 강한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나와는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여자를 이해해보려고 애쓴것만으로도 대견스럽다 할만 하다.
모든 불륜 드라마나 책속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 안타깝게도 이 글 속 지운은 내 이해의 범위를 비켜갔다.


이미 무언가를 들고 있는 사람이 새로운 무언가를 가지려면 가지고 있는 하나는 내려놓아야 하는게 세상의 이치다.
그녀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원하는 모두를 손에 쥔채 끝났지만
그 이야기 너머의 그녀는 진창같은 현실 구르다가 모든것을 놓쳐버리지 않았을까.
아니, 그러했기를 못된마음으로 바라본다.






결혼 12년차가 곧 시작되는 내게
여자로서의 삶이라던지, 잊고지냈던 설렘이라던지, 새로운 어떤 관계에 대한 떨림 같은것들을 환기시켜주고 공감하게 해줄꺼라고 기대했었는데
내 속에 숨어 있는 ‘여자’는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고루한 옛날 사람인 모양이다.
읽는 내내 가해자가 되지 못하고 피해자의 역할에 충실했고, 단 한순간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채 그 언저리 어디쯤을 비켜지나듯 걷는 조연이었다.
내가 솔직하지 못한걸까...내 삶의 주체가 온전히 ‘나’여야 하는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해서 일까.
나는 내가 솔직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내 속의 나는 겁많고 보수적이며 타인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였던가 보다.

욕망에 충실한 그녀와 사랑을 서로에 대한 신의라고 생각하는 나.
옳고 그름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저 나는 내 시선과 신념으로 그녀를 재단하는 오류를 범할밖에.

애초에 인간은 누구나 나 아닌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때론 나도 나를 잘 모르는 순간 허다하니.
내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미안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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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잡문
안도현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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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에는 따뜻한 마음과 소박한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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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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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이야기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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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2015-12-13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십니까.. 혹시 태왕사신기3권 (완결) 책을 중고로 구매를 하고싶어서 그런데 혹시 아직 책을 보유하고 있으시면 연락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01056384556 으로 연락한번만 부탁드립니다.ㅠㅠ 관련없는 댓글 달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소장하고싶은데 책을 구할 방법이 없어서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연락드립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