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되었다.
어젯밤에는 책을 읽다가 언젠가 노안이 와서 책 읽는 게 힘들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식구들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에게는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엄청난 불행이 될 거다.
의식과 시력만큼은 나를 저버리지 않기를.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면 보다 더 관대해지고 포용력이 넓어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꼭 그렇진 않다.
도리어 생각이 바뀌었다.
더욱 더 나답게 살아야 한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포용하기 힘든 것까지 굳이 받아들이려 애쓰지 말자고.
이전의 나는 선도, 경계도, 벽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픈하고, 받아들이고를 반복하며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되었다.
어떤 학생이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이란 말을 했다.
어느 가을날, 그 아이와 마주앉아 서로가 서로를 안쓰러워하며 함께 울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좀 다르게 살아볼까 싶은 호기심으로, 끝에는 좋은 것이 기다릴 것만 같은 맹목적인 순진함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망각하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노력해야만 하는 관계와 사람이 아주 소수에 불과하며 그 소수조차 때로는 버겁고, 이따금 나 자신조차 단단히 추스를 수 없는 순간들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남편은 말했다. 당신 책 좋아하지. 배우고 느끼고 감동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어떤 책이 의미가 있듯,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거야. 그렇다. 적절한 비유다.
돌아보니 좋은 데에는 좋은 이유가 있었고 싫은 데에는 싫은 이유가 있었다.
좋은 데 싫은 척 하거나 싫은 데 좋은 척 할 필요는 없다.
상대도 알고, 나도 알고, 결국엔 양쪽 다 안 좋아지거나 더 깊이, 더 오래 생각한 쪽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다.
힘이 넘칠 땐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의 심신이 상관이 있고 무엇보다 그러기 싫어졌다.
깔끔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