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면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가 과자 상자를 선물 받는 것이었다. 유행이 지난 과자나 껌, 사탕들이 들어있던 과자 상자를 받는 날을 동생과 나는 손꼽아 기다렸다. 아버지의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과자 상자를 몇 통씩 품에 안을 수 있었는데 상자를 안기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두툼한 월급봉투를 작업복 안쪽에 넣은 채로 아버지를 따라 현관문을 들어서던, 내가 삼촌들이라 부르던, 아버지의 아래 직원들이었다.

 

월급날이면 우리 집에는 과자 상자를 든 삼촌들이 우르르 몰려와 판을 벌이곤 했다. 나는 구석방에서 동생과 과자를 오물거리다가 아버지나 삼촌들이 혁아하고 부르면 재빨리 달려나가서 재떨이 비우는 일을 했다. 그 순간 보았던 거실을 가득 채운 뿌연 담배 연기와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삼촌들 앞에 놓인 흰색 월급봉투, 그리고 시커멓고 눈에는 핏대가 올랐었던 삼촌들의 얼굴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폐가 든 월급봉투가 있었고 일에 지친 활황기 조선소 사내들이 할 수 있는 놀이가 월급날 판을 벌이는 것이 유일하던 시절이었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삼촌들의 저녁 밥상이나 술상을 봐주었고, 밤이 깊어 삼촌 집에서 전화가 오면 어머니는 삼촌들을 닦달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마도 삼촌들은 어머니께 등을 꽤나 맞았을 것이다. 지금은 잘 상상되지 않는 광경이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익숙하고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 말했다고 한다.

 

혁이도 중학생이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이제 그만하면 안되겠는교?”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절반쯤 사정하는 말투로 우리 만날 뼈 빠지게 일하다가 이래 하루 노는 게 낙인데 좀 놀면 안 되나? 그라고 애들이 놀고 싶다는데 같이 놀아야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 과자 박스를 받지 못했다. 그건 판이 벌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고등학생이 됐기 때문이었다.

 

삼촌들은 꼭 월급날이 아니라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집으로 무턱대고 찾아와 결혼할 사람을 소개했고 아내가 집을 나갔다며 한참을 울다 돌아가기도 했으며 술에 거나하게 취해 쳐들어와 밤늦도록 주정을 하다 가기도 했다. 삼촌들 아내 중 한 명은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이 있는 곳을 안다며 아버지께 동행을 부탁했다. 아버지는 삼촌들에게 큰 형님과 다름없었다. 삼촌은 동행한 아버지께 술집에서 멱살이 잡혀 나왔다고 했었으니까. 삼촌이나 숙모들이 우리 집에 올 때 들고 온 신문지를 둘둘 말은 소고기나 담배 한 보루에 대한 답례를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난 그 관계들을 생각한다. 함께 판을 만들어 어울리고 모든 것을 내보여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스스럼이 없었던 관계. 세련되지 않아 더 깊었던 관계들.

 

그러한 관계가 가능했던 시대의 가치들은 낡았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저의를 애써 파악하지 않아도 되고 그대로의 모습을 상대에게 내보일 수 있었던 그 관계들의 가치만은 낡지도 녹슬지도 않았다 말하고 싶다.

 

향수가 주는 판타지일까? 아니라 믿고 싶다. 아니, 아니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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