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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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리 이틀 동안 마킨의 책 두 권을 읽는다. <어느 삶의 음악>을 읽으며 이야기를 연결하고 분위기를 잡는 방식이 그럴 듯하고, 좀 잦은 듯한 부사의 사용도 읽기 좋을 수 있다는 발견, 그리하여 읽다가 도중에 개가실에 내려가 이 책 <프랑스 유언>을 집어왔다.

  그러나 <어느 삶의 음악> 보다 어렵게 읽힌다.  본문이 371쪽에서 끝나는 보통의 분량이건만 다 읽기 위하여 꼬박 이틀을 썼다. 안드레이 마킨은 말한다.


  “나는 어떤 사람들의 간질을, 또 다른 사람들의 천식과 코르크 붙인 방을, 또 어떤 사람들의 지하묘소보다 더 깊은 유배를 인용했다.” (p.336)


  지하묘소보다 깊은 유해는 모르겠는데, 도스토옙스키와 프루스트의 문장과 분위기를 가져왔다, 적어도 지표로 삼았다, 라는 고백이다. 나는 여기에 한 명을 덧붙이고 싶다. 움베르토 에코. 그가 쓴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로아나 여왕…>에서 고서적상 주인인 주인공 얌보는 1차 뇌졸중에 걸려 이를 회복하기 위해 어린 시절을 보낸 솔라라의 시골집으로 간다. 그곳에는 1930년대와 40년대, 얌보의 유년과 소년 시절에 할아버지가 수집해 놓은 온갖 책, 잡지, 신문, 우표, 과자깡통 같은 것을 발견한다. 이 잡동사니 속에 얌보의 눈에 띄는 것이 만화책 <로아나 여왕…> 등을 비롯한 소년 시절에 읽었던 책, 잡지, 장난감. 뇌졸중 발병 후 아내는 물론이고 자식들과 그들의 배우자, 아이도 못 알아보던 얌보는 새삼스레 이것들을 읽어보며 조금씩 옛 시절을 회상한다.


  <프랑스 유언>의 스토리를 엮어가는 주인공 화자는 학교 친구들이 ‘프란추즈’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30대 작가. 당연히 책을 쓴 안드레이 마킨과 적지 않은 부분이 비슷할 것이다. 마킨의 외할머니가 프랑스 여성이었던 것과 같이 프란추즈의 외할머니도 20세기 초에 노르베르 가문과 알베르틴 르모나 가문의 결합을 통해 프랑스에서 출생해, 어린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다. 샤를로트 르모니에.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이다. 1910년 정도에 태어나 의사 아빠를 따라 러시아에서 소년시대를 보내고, 엄마 알베르틴과 함께 파리에서 10대 시절을 지낼 때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해 소비에트 시대가 개막했다.

  엄마 알베르틴은 딸 샤를로트를 파리에 남겨 놓고 자기 혼자 남편이 있는 러시아 동쪽 타이가 근처로 떠났다. 파리에 홀로 남은 샤를로트 역시 별로 가진 것 없이 무작정 어린 시절을 보낸 동시베리아를 향해 엄마를 찾아간다. 소련 영내로 들어오자마자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많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살인적 밀도의 열차를 타고, 그나마 제때 도착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하염없이 걸어서, 절반, 아니 삼분의 일 정도의 거리는 걸어서 멀고 먼 동시베리아, 그곳에 도착해 엄마를 만났다. 그리하여 책의 서두 부분에, 외할머니는 “러시아의 눈 내리는 광활한 평원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프랑스 여인”이라고 썼다. 그가 파리에서 시베리아까지 가는 동안 두 발로 걸은 거리가 아무리 못해도 할머니 주소지인 볼가강 동쪽에서 파리까지 거리만큼 될 거란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어렵게 만난 엄마 알베르틴은 딸에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서 매일 기도했던 것은, 네가 절대로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는 거였단다.”


  ‘나’, “프랑스 놈”의 소련식 비칭인 프란추즈가 기억하는 것은 할머니 샤를로트가 볼가강 동쪽에 있는 깡촌 중의 깡촌 ‘사란짜’ 마을에 살면서부터. 프란추즈는 누나와 함께 여름이 되면 사란쨔의 할머니 집에서 방학을 보냈다. 이때가 열 살 정도.

  할머니 집에는 아이 눈으로 보기에 보물창고가 있다. 어린 이탈리아 소년 얌보의 옛집에 다락방이란 보물창고가 있었듯이. 할머니와 프랑스에서부터 근 5천km를 함께한 트렁크와 퐁네프 가방.

  작은 퐁네프 가방부터 이야기하자. 그 속에는 몇 개의 기름종이에 싼 봉투가 있었다. 프란추즈와 누나는 할머니의 주의가 소홀한 틈을 타, 어린이들 특유의 호기심으로 ‘페캉’ ‘라로셀’ ‘비욘’ ‘베르됭’이라 겉면에 쓰여 있는 봉투를 풀어본다. 독자는 쓰인 글씨만 보고도 그것들이 프랑스에서 가져온 흙과 자갈, 돌멩이라는 걸 즉각 알지만, 아이들은 이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왜 다른 곳도 아니고 보물상자인 퐁네프 가방에 들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함부로 꺼내 가지고 놀다가 (조금 후에 알게 될)제일 중요한 베르됭의 조약돌을 화단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몇 천km 서쪽으로 가고 또 가야 도착할 샤를로트의 고향 프랑스에서 가져온 돌. 작품 중후반에 알게 되지만, 소련에서 만난 소련인 남편 피오드르 할어버지보다 먼저 만나 사랑한 프랑스인 연인이 건넨 베르됭 기념품.

  큰 여행가방에는 지나간 시절의 신문과 신문 스크랩, 사진첩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오래 묵어 인화지 색깔도 변한 사진 속 인물들. 그 중의 하나.

  연미복 남자들과 야회복 여자들 사이에서 두툼한 털모자와 큼지막하고 칙칙한 솜저고리 차림으로 양털 담요에 싸인 아기를 가슴에 안고 선 여자. 처음 보는 사람이다. 프란치즈가 할머니한테, 이 여자가 누구예요, 묻지만, 할머니는 때마침 방안으로 들어온 두 겹의 박각시나방으로 화제를 돌려 프란추즈는 답을 듣지 못한다. 어린아이 답게 금방 호기심이 수그러들기도 했지만. 그 여자의 정체는 결말 부분에 밝혀진다.

  이어서 신문 기사들.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의 화제들. 이 가운데 초점 하나. 1896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초청 방불. 펠릭스 포르 프랑스 대통령과 황제가 나란히 찍은 사진. 2년 조금 지나 강력한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다른 곳도 아닌 엘리제 궁에서 정부 마르가르트 스타네이의 품 속에서 사망한 일 등등.

  중요한 건 가족들 사진과 1910년 파리 대홍수로 파리가 물에 잠긴 사건이었다. 시내에서 이동을 하기 위하여 작은 보트를 타야 했던 시절. 그리하여 파리는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되는 것이고, 저 소련의 끝도 없는 벌판이 시작되는 시베리아 초입 할머니 집에 간 아이한테는 파리가 잠긴 도시 아틀란티스가 될 수 있었다. 이는 프랑스 뇌이-쉬르-센이 고향인 샤를로트 할머니한테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을 의미한다.

  할머지 집에서 자잘한 것들을 찾아내 외가 가문의 흔적을 연상하는 것. 이게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를 연상시켰다는 거다.


  2부는 프란추즈가 조금 더 자라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이때부터 읽기가 쉽지 않다. 건초열에 시달리는 유달리 예민한 청년 마르셀의 사색처럼 길고 긴 문장은 아니지만 앞에서 말한 내용, 전쟁이 끝나고 홀로 시베리아로 떠난 엄마 알베르틴을 쫓아 그 험한 길을 10대 후반의 젊은 샤를로트가 열차도 타고, 지나가는 마차도 얻어 타고, 더 먼 길을 걸어서 도착하는 장면. 알베르틴의 남편이자 샤를로트의 아버지의 불행한 마지막. 하긴 당시를 살던 남자들 가운데 험한 죽음을 맞지 못한 사람이 워낙 흔했지만, 단지 프랑스인, 적국에서 소련으로 침입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씌우지 않으면 안 됐던 시절. 결국 내게 기억에 남는 것은 프루스트처럼 사색의 확장이 아니라 샤를로트의 생애 스토리였던 거다.

  3부는 본격적인 사춘기 속을 헤매는 프란추즈가 핵심이다. 물론 샤를로트의 지난 시절은 여전히 도저하게 흐르지만. 프란추즈는 볼가강변에 정박한 폐선 선창을 통해 생전 처음 사람의 교접 장면을 목격하고, 댄스 파티에서 만난 여자 아이를 만나 동정을 상실한다. 그리고 할머니 댁. 아마도 샤를로트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프란추즈. 그는 4부에서 10년이 지난 후 드디어 소련에서 벗어나 프랑스에 정치망명자로 남는다. 아틀란티스에 온 것. 이제는 여든 살이 넘었을 할머니, 여전히 프랑스를 그리워할 것이 틀림없는. 그러나 프란추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소련의 큰 도시도 아니고 사막의 끝자락이자 키르기스탄을 거쳐 몽골까지 펼쳐진 초원이 시작되는, 오직 적막만 흐르는 외로운 곳에서 결코 떠나고 싶어하지 않은 할머니 마음을.


  이렇게 작품은 쓸쓸한 초원과 사막의 접경지대에서 시작했다가 끝을 맺는다. 프랑스 여인이 굳이 소련의 변방으로 와서 한 평생, 그것도 더 이상 파란만장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이야기. 이것이 어떻게 읽으면 화려한 문장으로, 달리 보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쓰여 있다.

  읽고 나서 보니, <프랑스 유언>이 공쿠르 상과 메디치 상을 동시에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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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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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생 닭띠 아저씨, 안드레이 야로슬라보비치 마킨. 이름 보면 딱 안다. 57년생이니까 소비에트 연방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태어났다. 몽골 위, 훨씬 높은 위도. 예전 같으면 유배형 받아 가는 곳이다. 열 명 가면 여덟 명 죽고 두 명도 유배형이 끝나봤자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이동권이 제한된 주민으로 살다가 죽어야 하는 곳이다. 그래도 안톤 체호프가 자연 경관에 홀딱 반한 도시. 지도 보니까 눈대중해보니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4천km 이상 떨어져 있다.

  그래도 자란 곳은 모스크바 기준 남동쪽으로 7백km 이상 떨어진 펜자 시. 이이의 외할머니가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작품 <프랑스 유언>에 나오는 것과 같이) 프랑스 태생이어서 프랑스어도 러시아어만큼은 아니겠지만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마킨의 능숙한 프랑스어가 문제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교사 교환 프로그램을 명목으로 슬쩍 프랑스로 넘어가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 그곳에서 눌러 산다. 도착하자마자 열나게 소설을 발표, 네번째 작품인 <프랑스 유언>을 발표해, 프랑스 문학사상 처음으로 1995년 한 해에 공쿠르상과 메디시상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검색을 하다가 내가 깜짝 놀란 것은, 안드레이 마킨이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인 아시아 제바르의 자리를 물려 받았다는 거였다. 아니, 제바르가 갔어? 2015년 78세의 나이로 영면했단다. 팬으로서 아쉬운 일이다. 그곳에서 안식하기를.


  <어느 삶의 음악>. 시작은 화자 ‘나’의 조국, ‘나’가 태어난 인구 2억4천만의 나라에 대한 신조어에 관해. 이 신조어新造語는 뮈헨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알렉산더 지노비예프가 만든 말,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일컫는다. 이 용어야말로 러시아 사람과 러시아의 문제를 푸는 진정한 열쇠라고.

  ‘나’는 저 극동 지역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우랄의 한 도시에 들렀다. 이제 집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한다. 페테르부르크에 가려면 모스크바애서 환승을 해야 할 터. ‘나’는 열차 정거장의 대합실에 앉아 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여성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기차가 여섯 시간 연착할 거라는 방송이 나온다. 여섯 시간. 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 시민이라면 어떻게 여섯 시간 연착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랄 지역 사람들한테는 여섯 시간은커녕 여섯 날, 6주라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대합실의 후줄근한 사람들은 오직 ‘나’ 빼고 아무 불만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게 전형적인 호모 소비에티쿠스. 전쟁이 나면 남자들은 전쟁터에 나가 총 맞아 죽고, 여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도 전쟁이 터진 거니까 그런가보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한 밤중에 잠자리에서 끌려가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즉결처분 당해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는 사람들. 그렇게 만든 유구한 역사. 세계사의 바깥에 자리한 나라. 비잔틴 제국의 뿌리 깊은 유산이며, 두 세기 동안 짊어진 타르타르의 멍에이고, 5세기에 걸친 노예상태와 혁명에 이은 스탈린 치하를 겪으며 저절로 습득하게 된 무념무상의 상태.


  기차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새벽 세시 반. 역사驛舍에 흘러드는 건반 소리에 ‘나’는 설핏 든 잠에서 깬다. 그 소리의 무심함에 이라니. 철학적 분노를 철저히 무용화 하는 소리. 그저 하나의 경계선일 뿐인 것. ‘나’는 그것을 따라 역사에 이어진 복도를 걸어 한 홀hall의 열린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본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남자. 의자 옆에 모서리를 니켈 도금한 짐 가방. 그는 건반을 누르지 않고 그 위를 손가락이 오가기만 한다. 아주 미세하게 손톱이 건반에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군데군데 사이를 두다가 활기를 띠더니 조용한 흐름에 박차를 가하며 종내 열띤 분노의 달음박질을” 펼치는 광음의 열정. 소리 없는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음악. ‘나’는 그것을 들을 수 있고, 노인의 손가락 뼈가 그렇게 투박한 것에 또 놀란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세월이 표백한 깊은 흉터와 그의 눈물을 확인한다. 정말 눈물이 늙은 눈에서 방울졌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 같다.

  ‘나’는 피아노에 앉았던 노인에게 그가 한 타건 없는 피아노 연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여기까지 읽고, 우랄의 한 도시에서 썰렁하기 그지없으며 난방조차 변변하지 않는 강당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모스크바 집으로 가는 늙은 남자 피아니스트 한 명이 떠올랐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아, 이 책이 리히터에 관한 것이구나. 그가 종종 그러했으니까. 러시아의 시골 변방을 다니면서 공연장이 크거나 작거나, 관객의 수준이 높거나 낮거나 관계없이 기꺼이 연주회를 하고 조용히 열차를 타고 돌아온 외로운 노인. 나도 그 시절에 녹음한 음질이 열악한 바흐 음반을 한 장 가지고 있다. 리히터가 작품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면 이제 음악 이야기가 쏟아질 거야. 이렇게 기대했다.

  기차가 도착했다. ‘나’는 대합실에서 여섯 시간 기다렸던 인파와 함께 승강장으로 뛰어갔지만 승객이 많아도 너무 많다. 이 정거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객석은 발 하나 꽂을 곳이 없다. 그래도 호모 소비에티쿠스들은 악다구니를 쓰며 객차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나’도 덩달아 어깨로 힘껏 밀어보지만 곧이어 객차 담당이 와서 이제 더 이상 못 탄다고, 내일 열차를 타라고 악을 쓴다.

  이때 피아노 노인이 그를 소리쳐 부른다. 오랜 연착 후에는 아주 오래되어 거의 고물이기는 하지만 종종 객차 끝에 스페어 객차를 다는 법이라며, 이번에도 그런 것일 뿐이니 자기를 따라오란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노인과 구닥다리 삼등칸에 여유있게 앉아 모스크바까지 편안히 여행한다.

  그리고 이어서 노인의 삶을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그 당시 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오.”


  1920년생의 노인. 아, 리히터 이야기가 아니구나. 여기서 알았다.

  극작가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의 외동 아들. 어머니를 탁했는지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재질을 보여 학교와 음악원을 동시에 다녔다. 스무살이던 1941년, 이이는 5월의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을 무릅쓰고 관청 앞의 게시판에 붙은 벽보를 보고 있었다. 벽보에 자기 이름, ‘알렉세이 베르그’가 들어 있는 것을 머리 속에 사진으로 찍어 놓았을 정도로 골똘하게. 1주일 후에 볼베어링 공장 문화원에서 첫번째 연주회를 연다는 알림.

  그러나 1920년생 소련 사람이 1940년까지 오는 길은 만만하지 않았다. 알렉세이도 마찬가지. 극작가지만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한 대 숙청 기간에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라는 혐의를 받을 것이 두려워 집안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바이올린을 부엌 화덕에 집어넣어 불살라 버렸다. 가족의 친구이자 훌륭한 바이올린 협연자인 투카체프스키 사령관이 처형당해 부모는 극도의 불안에 떨고 있었던 시기.

  대숙청이 1937~38년까지를 말하지만 이후에는 숙청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게다가 군 사령관의 친구이니 언제나 불안했을 터. 1940년 5월이 왔다. 알렉세이가 음악원에서 연주회를 위하여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같은 건물에 사는 노인이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그를 불렀다.

  “집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네. 어디 멀리 떠나.”

  이렇게 알렉세이 베르그의 앞에도 길고 긴 험한 여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디로 도망할 수 있었을까? 들어가기는 쉽지만 결코 나올 수 없는 곳이 소비에트 연방이었는데. 그를 살린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독일군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그는 역사의 폭풍에 자진해서, 고문과 유형을 피해, 살기 위하여 이미 죽은 소련군의 군복과 군화를 신고, 다른 이름으로 살기 시작하며 휩쓸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될 뻔한 노인 알렉세이 베르그의 한 평생을 담은 짧은 소설.

  기대했던 것과 달리 단 한 곡의 특정한 음악 이야기도 없었다. 제목 <어느 삶의 음악>은 알렉세이 베르그한테 음악이란 어떤 것인가를 의미한다. 그걸 차마 여기서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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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사월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5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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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르케예의 이스탄불을 유럽의 동남쪽 끝자락으로 본다면, 알바니아는 그리스의 북서쪽에 위치해 내가 알기로 세계사에 단 한 번도 주역으로 등장한 적 없는 변방 가운데서도 변방 국가였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변방국가. 늘 다른 나라한테 침략을 당했고, 다른 나라들의 싸움터가 되었던 나라. 그리하여 알바니아 어느 땅을 파도 주변 열강 군사들의 뼈가 나올 수 있다고 농담하고는 한단다. 이런즉슨, 필연적으로 다민족, 다종교 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러니 별의 별 문화가 지역적으로 다양하게 자리잡았을 것이다.

  카다레는 알바니아의 북쪽 산간지역에 독특한 관습법으로 전통을 이어가는 공동체를 무대로 삼았다. 관습법이라면 흔히 불문법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 산악 공동체의 관습법은 “카눈”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삶의 거의 모든 양식을 일일이 지정해 놓았다. 카다레는 이런 관습법 가운데 특별히 복수 관습에 주목했다. 가족의 일원이 살해당했으면 다른 가족이나 친척이, 원래는 가해자이지만 세월이 가면서 가해 가족의 남자 구성원 한 명을 살해할 수 있다는 관습이다.


  주인공은 베르사가家의 그조르그. 갈등 관계에 있는 가문은 크리예키크가家.

  이 가문이 서로 죽고 죽이는 원한 관계를 먼저 이야기해보자.

  아주 오래 전, 아마도 70년 정도의 세월을 거꾸로 돌리면, 산골 속에 묻힌 브레즈프토호트 마을에 한 나그네가 걸어 들어왔다. 뭔가 불안한 듯 보이는 손님이 문을 두드리고 자신을 객으로 받아주기를 청했다. 그래서 그조르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정도 되는 양반이 기꺼이 손님으로 받았고, 역시 관습법에 의하여 차릴 수 있는 최선의 식사와 잠자리와 기타 모든 수발을 다 들었다. 뒤에 설명하기를 한 번 손님으로 특정 집안에 받아들여졌으면 그 순간부터 손님은 집안의 반half신의 위치 정도가 된다고.

  베르사가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길을 떠날 때, 관습으로 집안의 소년 하나가 그를 마을 끝까지 배웅을 했는데, 이 손님이 뭔가 나쁜 짓을 했는지, 그리예키크가 사람한테 총을 맞아 그자리에서 즉사해버렸다. 바로 마을 경계를 한 발 정도 앞두고. 경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때부터 방문 가족의 손님 신분을 벗어나지만, 경계 안에 있으면 손님 역시 가문의 일원으로 여겨야 하면, 가족의 일원이니 당연히 베르사 가문은 손님을 죽인 그리예키크 가문의 당사자에게 복수, 즉 소총을 이용해 죽여야 했다.

  이때부터 두 가문의 서로 죽고 죽이는 불행한 고리가 만들어져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고 있던 상태. 어이없어 보이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다 납득하고, 당연히 피의 보복을 해야 하는 관습법.

  그렇다고 손님을 가려 받기도 뭐하다. 이슬람 문명도 그렇거니와 북동부 유럽 지역에서도 손님이 찾아오면 일단 최선을 다해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니까 베르사 가문도 그를 문밖에서 안으로 들이지 않고 내칠 수는 없었을 테니 이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싶다.


  피의 복수를 당한 가문은 죽을 때 피가 묻은 셔츠를 굴뚝 꼭대기에 걸어 놓고, 셔츠가 짙은 갈색이 되기 이전에 복수를 해야지 안 그러면 불명예라고 여겼다. 그리예키크 집안의 제프가 그로즈그의 친형을 죽였을 때도 어머니가 굴뚝에 걸어 놓은 셔츠를 가족 모두 하루에 몇 번씩 올려다보며 복수의 마음을 다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많이는 아니고 조금 오해. 그로즈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의하여 경사지에 매복을 하고 있다가 제프가 지나갈 때 한 번 저격을 했으나, 목에 작은 상처를 냈을 뿐이었다.

  이것도 불행 가운데 하나. 죽이지 못하고 부상만 입히면 총알이 지나간 부위에 따라서 목 위는 죽음의 값의 절반, 허리 위는 얼마, 아래는 얼마 하는 식으로 배상금을 피해 가족에게 주어야 했다. 이때 가족이 일년 내내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원수 그리예키크 집에 가져다 준 적이 있어서, 아버지의 두번째 명령을 어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서진 사월>의 막이 오르면, 그로즈그가 덤불이 무성한 경사지 뒤쪽에 매복해 하루 종일 꼼짝하지 않고 해가 떨어지기 직전까지 버티고 앉아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침내 인기척이 나고 아버지가 말 대로 제프가 눈에 보인다. 그래서 살인에 성공한다.

  복수 살인에 관한 관습법. 첫째 반드시 소총으로 살해해야 하며, 둘째로 총을 발사하기 전에 피해자에게 사전 경고를 해야한다. 세번째로 정말 죽었으면 시신을 똑바로 누이고 손도 가지런히 모양을 잡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소총을 시신의 얼굴에 기대 놓아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아직도 관습법은 남아 있다. 살인자가 피해자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매장까지 다 보아야 한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장례식 후 장례식사에 참여해 차려준 음식을 다 먹어야 하는 것까지.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예상도 못하게, 피해 가족이 그로즈그를 보는 눈이 그리 살벌하지 않다. 그 집에서도 알기 때문에. 죽여야 해서 죽였고, 자기들도 그로즈그를 죽여야 되기 때문이다. 하기 싫어도 법을 지키지 않으면 가문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지니까.


  이 관습법 카눈의 조항도 문제.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복잡한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마을의 연장자로 구성한 원로들이 회의를 해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원로들이라 하더라도 이 가운데 늘 솔로몬 왕이 끼어있지는 않아, 결정이 애매하고 힘들 때는 공동체에서 가장 지혜롭고 이름 높은 카눈 해석자 알리 비낙 한테 해결을 의뢰한다.

  알리 비낙은 피의 복수뿐만 아니라 마을 간의 경계선 같은 갖가지 소송을 맡기 때문에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의사와 측량사를 대동하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책에서는 지혜로운 알리 비낙이 어떤 공식적인 지위에 있는지, 먹고 사는 건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산악지대의 모든 공동체는 오로시탑塔, 오로시궁에 사는 대공을 마치 작은 군주로 여긴다. 최고 지도자이며 공동체 결속의 중심지이자 지배자. 대공의 밑에 사촌 마르크 우카시에르가 피의 복수를 담당하는 ‘피 관리인’을 맡고 있다. 복수를 위해 피살자의 피를 보았으면 살해 당사자가 직접 큰 돈을 세금으로 바쳐야 한다. 대공은 이것 말고도 농사, 과수원, 기타 소공예품 등으로도 수입을 올리는데, 여태까지 가장 큰 소득은 피의 세금이 맡아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공동체 안에서 정말로 피의 복수를 행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그만큼 세수입도 쪼그라들어 마르크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산악 공동체에 예상하지 않은 인물이 방문한다.

  수도 티라나에서 사는 소설가 베시안 보릅시. 이이가 결혼을 해 신혼여행으로 아내 디안과 함께 이 산악지대로 왔다. 이슬람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신혼이지만 결코 한 침대에서 잘 수 없는 곳. 산악지대 출신이 아닌 베시안은 이 산악지대의 관습법을 많이 알고, 이를 소설의 소재로 삼아 책을 낼 때마다 제법 판매부수를 올리는 부르주아, 적어도 쁘띠부르주아 계급이다. 이이의 소설을 읽어봤는지, 아니면 신문에 난 서평 같은 것을 슬쩍 보았는지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 작가가 기특해 대공이 직접, 아무 때나, 아무 시간에나 방문을 해달라고 청해 신혼여행 삼아 과하게 화려하게 치장한 마차를 대절해 한 달 예정으로 이곳에 온 거다.

  그래서 첫날 묵을 집에 전보를 치고, 전보가 도착했는지 아닌지도 모른채 일단 쳐들어가 하룻밤 제대로 대접을 받았지만 신혼부부가 다른 방에서 자야 하는 불상사를 당했고, 이튿날 드디어 대공을 만나러 오로시탑으로 향했다. 가다가 도중에 주막집에 들러 밥을 먹고 다시 출발하려는 찰나, 아내 디안의 눈에 그조르그의 잿빛 얼굴이 들어온다. 그조르그도 다른 살인자와 마찬가지로 오로스탑에 가서 피의 세금을 바치고 오는 길이었다. 마치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모습. 이제 다음 번에 죽을 사람이 자신이니까 벌써 다 산 거 같았겠지. 그의 표정과 모습이 디안의 마음에 콱 박혀버린다. 연모하고는 다른 독특한 인상. 저지대 사람이 조금 미치광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 와서 약간 휙 돌아버린 듯하게 조금씩 변해버리는 디안.


  이렇게 작품은 산악지대의 피의 복수와, 관습법을 소설의 소재로 했을 뿐 진정한 관심 없이 그저 작품을 위해 관찰 목적으로 방문한 작가 부부가 소설의 두 축을 이룬다.

  아다시피 이스마일 카다레는 오랜 세월 동안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있다가 결국 받지 못하고 세상을 뜬 작가. 유럽, 심지어 아프리카의 많은 작가들이 그가 노벨상을 끝내 받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아쉬워할 정도였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럴 듯하다고 생각이 들긴 한다.

  이런 작가가 2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군, 독일군, 산악지대 사람들로 구성한 자신의 다양한 작품과 달리 관습법으로 대표하는 산골 종족의 문화로 비극을 쓴 것이 색달랐고, 특히 첫 무대, 관습법에 의한 피의 복수와 이어지는 관례가 독특하게 재미있다. 설마 아직도 피의 보복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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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바턴 ㅣ 시대의 여성 시리즈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최이현 옮김 / 잔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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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0년생 엘리자베스 개스켈이 1848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1848년.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이 한 번 크게 변곡점을 그은 시기. 차티스트 운동은 배운 지 하도 오래라 뭔 운동인 줄 몰랐는데 책 읽어보니 선거법에 관한 거였다. 재산이 일정액 이상 있는 남자 한테만 참정권을 주었단다. 이 구절 읽으니 어렴풋이 생각났다. 신대륙 발견을 기점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부르주아들이 이젠 귀족들을 말아먹을 수준이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 귀족 눈에는 상것들한테도 참정권을 주었는데, 아니지, 줄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까지 부르주아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어서 재산 하한을 설정했던가 보다. 차티스트 운동도 결국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뭘 알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앞뒤를 재보니 그럴 거 같다는 말이다.

  이때 프로레타리아들은 노동문제도 함께 거론한 것처럼 보인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대표작인 문학과지성사의 <남과 북>, 문학동네 <북과 남>에서도 주인공이자 제조공장의 사장 사모님인 마거릿 헤일이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노동조합원에게 동정적인 것과 비슷하게 <메리 바턴>에서도 개스켈의 시각은 무산자 쪽에 더 많이 가 있다.


  첫 장면은 바턴 가족과 윌슨 가족의 소풍.

  존 바턴은 맨체스터 남자다. 없는 사람들이 맨체스터에서 다 그렇듯이 공장 노동자 가정에서 나서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어 자신도 공장 노동자가 된 전형적인 맨체스터 사람. 어릴 적부터 지독하게 가난한 시절을 보내 보통 이하의 다소 왜소한 체구를 가졌지만 무엇이든지 단호하고 결연한 열정을 품은 공산주의자.

  이들이 말하는 가난은 그저 현대의 도시빈민과 비교하지 못한다. 사회적 복지라는 개념이 없어서 공장 노동자들은 최소 임금을 받아야 했고, 더 빈곤한 시골에서 유입되어 오는 새로운 노동자들 때문에 그나마 일자리 하나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없으면 굶어야 한다. 바턴 씨 부부도 첫 아이 톰을 잃었다. 못 먹어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성홍열에 걸려 죽었다. 뒤에서는 굶어죽었다는 표현도 쓴다. 아이가 그렇게 죽어갈 때 돈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이후 고용주에 대한 미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언제나 최소 임금. 경기가 좋으면 그나마 숨은 쉬고 살아가겠지만, 불경기가 닥칠 경우, 고용주들은 오직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가동을 축소하고 남는 인력을 잘라버린다. 이때부터 해당 가족은 굶주림을 견뎌야 한다. 먹을 수 있기만 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별스럽지 않은 질병에라도 걸리면, 이젠 면역체계가 부실해진 환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바턴 씨는 어린 시절부터 밥 굶는 법을 몸소 체험으로 익혀서 하루 이틀 굶는 건 그저 견딜 수 있다. 사흘 굶으면 남의 담장을 넘어가겠지만, 그러기보다 고용주의 대문을 깨부수고 쳐들어가는 걸 바라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분노를 품고 산다. 노동자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죽기까지 하는데 고용주들은 공장을 닫은 시기가 특별 휴가라도 되는 듯 몇 달씩 해변이나 겨울 스포츠를 즐기러 떠난다. 더 심한 불경기가 닥쳐 많은 무산자 가족이 죽어나가도 고용주 가족은 공연 구경 한 번 안/덜 가는 걸로 그친다. 그것도 남의 눈이 있어서 그런 거다.

  이이의 두번째 아이가 주인공 메리 바턴. 오빠가 어려서 죽어 지금은 맏딸, 열세 살짜리 아주 예쁜 소녀다. 엄마 이름도 메리라서 아빠는 딸을 작은 메리로 부른다. 하지만 지금 만삭인 아내는 소풍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 몇 주 후 출산하다 죽고 만다.

  바턴 씨는 메리의 죽음을 처제 에스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딸처럼 키워서 공장 여공으로 보냈다가 에스더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진 장교가 쉬운 얘기로 혼인빙자간음을 하고 아일랜드로 파견된 다음에 인생 망가진 내력을 가질 예정이다. 에스더는 자기가 망가진 후에 몰래 맨체스터로 돌아와 바턴 씨 가족을 살피다가, 이제 성인이 된 메리 바턴이 맨체스터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의 사장 아들 해리 카슨하고 서로 사랑하는 걸 알게 된다. 동시에 해리는 절대로 메리와 혼인할 생각이 없으며 오직 한 번의 엔조이를 바랄 뿐인 것도 알아채 드라마의 진폭을 넓히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함께 소풍을 간 윌슨 씨네는 아내와 개구진 외동아들 제임스, 젬 윌슨, 이렇게 세 가족. 윌슨의 친동생 앨리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산다. 앨리스는 처녀. 그러나 큰언니가 낳은 아들 윌을 자신이 입양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다. 양아들 윌은 초반에 나오지 않지만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외항선원으로 중요한 배역 가운데 한 명인 마거릿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개구쟁이 아들 젬은 머리통이 굵어지자 듬직하고 분별력 있는 청년으로 성장해 젊은 나이에 주물 공장의 주임으로 승진한다. 덕택에 급여가 여유로워 엄마와 고모를 넉넉하게 부양한다.

  윌슨 씨? 아쉽게 급사한다. 아마도 심근경색 아닐까 싶다. 이후 젬이 가장 노릇을 단단히 하는 효자이며 동시에 메리 바턴을 맹렬하게 짝사랑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서 무엇이든 메리를 위하여 결심하고 행동한다. 작중 가장 영웅적인 인물. 부잣집 아들 해리 카슨이 메리를 농락하고 버릴 생각인 것을 알게 되어 해리한테 경고하다가 그의 채찍에 얼굴을 한 대 얻어 맞는다. 열받은 젬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때려 눕히지만 경찰들이 두 사람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는 건 몰랐다. 그리하여 해리가 같은 장소에서 권총에 맞아 피살되었을 때, 하필이면 권총이 젬 윌슨의 것이라 재판에 넘겨지는 곤욕을 치룬다.


  앨리스 윌슨은 간호사와 세탁부, 두 가지 일을 하는 아주 음전한 사람. 보살 비슷하다. 이이가 메리한테 좁 레그 영감의 착한 손녀 마거릿을 연결해주어 둘은 절친 사이로 발전한다. 좁 레그는 직공 계급에 드물게 있는 몇 몇 가운데 한 명으로, 박물학, 곤충이나 파충류, 거미류, 꽃을 비롯한 식물 같은 것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아울러 사회 전반에 관해 발언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도 가지고 있는 현명한 노인.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늙은이 치고 헛소리를 하는 법 없이 똑부러지기 이를 데 없다.

  마가렛은 재봉사였다가 점점 눈이 먼다. 그러나 하나가 나쁘면 (이 당시엔 운이 좋아서) 하나가 좋은 법. 놀라울 정도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 솜씨가 있어서 눈이 보이지 않지만 여기 저기서 공연을 해 메리가 어려울 때마다 금전적 지원과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윌 윌슨은 작품 중간에 원거리 항해에서 돌아와 지내다가 훗날 작품이 좋은 쪽으로 크게 변할 모멘트 역할.

  여기까지는 무산자였고, 부르주아로 카슨 씨가 등장한다. 자신도 직공 출신이지만 자기 직원들처럼 극심한 가난으로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작은 사업을 벌여 성공한 성실한 사람.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듯이 공장을 확장하고, 생산에 박차를 가하다가도 불황이 오기만 하면 그저 생각없이 직원들을 정리해고 한다. 그게 설마 굶주림, 굶어 죽을 정도의 빈곤을 가져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은 지닌 인물이다. 바람둥이 미남이자 노동조합의 파업 기도에 초강력 대처를 주장하다 총 맞아 죽는 금발의 미남자 해리 카슨 때문에 하루 사이에 백발이 될 정도로 상심한다.


  개스켈은 작품 속에 다분히 계급 갈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굶주림에 허덕이던 1840년대의 노동자 쪽에 선 듯하다. 나는 메리 바턴과 해리 카슨의 연애가 처음 나올 무렵에, 둘의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져 훗날 <남과 북>에서 공장 사장 부부처럼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기대는 초장에 깨졌다. 19세기 중반에 약한 빙하기가 있었다고 하던가? 전 세계적인 기근이 들고, 이를 좇아 당연히 불황이 덮쳐 디킨스의 작품에서 보듯 빈곤한 약자들의 삶이 정말 비참했던 모양이다. 맨체스터라는 거대 공업도시가 그럴 정도였으니 북쪽 시골을 말도 못했겠지. <남과 북>을 읽을 때부터 개스켈이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심정적으로는 동조하지 않았나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다.

  하지마 개스켈의 치명적 약점도 있다. 이이가 목사님 사모님이라는 것. 그리하여 작품 속에 성경 말씀이 말도 못하게 많이 나온다. 여기서 그치면 그나마 괜찮겠는데, 결론이 정말 예수님 말씀이다. 완전히 기독교 오리지네이트된 결말. 재미있게 읽다가 끝장에 가서 김 샜다. 철저하게 스팀 아웃.

  하긴 19세기 초 작품이다. 180년 전 작품이라 현대 소설을 읽는 것 같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작품. 읽으며 종교 측면만 빼면 상당히 진보적이라 이색적이다. 여태 읽은 19세기 영국 작가와 완전히 구별되는 개스켈 만의 특정적 관점을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서도 경험하시면 좋을 듯하다. 이 책이 아니더라도 <남과 북> 또는 <북과 남>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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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외롭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34
김승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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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에 광주에서 나서 서강대 영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마친 문학박사. 이 책이 나온 2012년에는 국문과 교수였고 지금은 명예교수.

  근데 우리나라 위키피디아에 재미있는 게 나오네. 이이의 별호가 “불의 여인” “언어의 테러리스트” 그리고 “초현실주의 무당”이란다. 오. 김승희의 한자 이름이 勝熙, 여자 아이에게 잘 붙이지 않는 이름이다. 이길 승, 밝을 희. 두 자 다 마찬가지. 그래서 그런가?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 어째 좀 으시시하네.

  두 달 있으면 만 스물한 살이 될 스무 살 시절 1973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장원을 해 등단했으니 벌써 57년차 시인이다. 게다가 시작부터 시 영재 수준을 넘었다. 스무 살 등단이 말이 그렇지 어디 쉽게 되는 게 아니다. 하여간 진짜로 김승희를 만났다 하면, 드센 사람일 거 같아서, 아나키스트라니까, 무당이라니까, 나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끼겠다. 이유가 있지. 오늘 독후감이 그리 친절하지 않을 예정이거든. 2012년 당시 이순耳順에 현직 명문 서강대학 국문과 교수님이 쓴 시를 하잘것없는 아마추어 풀때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그건 백에 아흔 여덟의 경우, 독자가 찐따라서 그런 거다. 그러니 아니겠지만 혹시 시인께서 이 어줍짢은 독후감을 보시더라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나이다.


  시집의 제목이 “희망이 외롭다”니까 제일 앞에도 희망에 관한 시가 있다. 희망 속에 무엇이 들었나? 그러니까 희망이란 것의 구조식은 어땠을까, 하는 질문일 터. 시인은 제목에서 다 알려준다.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꽃들이 반짝반짝했는데

  그 자리에 가을이 앉아 있다


  꽃이 피어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검붉은 씨가 눈망울처럼 맺혀 있다


  희망이라고……

  희망은 직진하진 않지만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전문. p.14)



  ‘신의 물방울’이 희망의 한 부분집합이라는 말인데, 이 신 님이 하도 변덕이 심한 분이라서 ‘신의 물방울’이 뭔지 모르겠다. 신의 눈물? 이게 제일 무난하지? 좋아도 눈물나게 좋고, 슬프면 당연히 눈물 나는 거고. 나머지 물은 별로 재미없다. ‘용수’라는 이름의 선배가 있었는데, 더 윗 선배가 이 용수 씨를 꼭 “야, 용오줌!” 하고 불렀다. 용한테 나올 물이 오줌밖에 더 있느냐면서. 그렇다고 희망이 신의 오줌이라고 하긴 좀 뭐하잖아? 아무래도 눈물이 좋은데, “수만 광년 먼먼 별에서 이제 막 너의 눈에 닿은 눈물”이 희망일까? 김승희와 같은 나이의 시인 이성복이 쓴 시 <눈물>에 나오듯이. 아니면 진로 소주?

  하지만 눈물에 집착하지 말 것. 정작 희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1연과 2연에 쓰여 있다. 반짝반짝 했던 꽃들이 가을이라 다 지었는데, 반짝반짝 빛날 때는 못 보았던 검붉은 씨, 내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우겠다는 집념이 바로 희망이라는 거다. 그걸 신의 물방울이라 했을 뿐. 에이, 쐬주방울이 아니었네.

  좋아. 첫번째 시는 마음에 들었다. 기대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시.



  반투명한 불투명



  그런 건가? 보이지 않는 건가?

  그런 건가? 들이지 않는 건가?

  그런 건가? 알지 못하는 건가?

  그런 건가? 다 소용없는 건가?

  그런 건가? 해가 또 지는 건가?

  그런 건가? 이렇게 살다 가라는 건가?

  그런 건가? 하루하루 오늘은 괴로움의 나열인데

  그런 건가? 띄어쓰기도 없이 범람하며 밀려오는 나날

  그런 건가? 내일도 오늘과 같다는 건가?   (전문. p.15)



  나 이런 시 안 좋아한다. 앞 대가리에 “그런 건가?” 열라 썼다가 뒷대가리는 결국 오늘도 내일도 뭐 하나 변하지 않는 일상 또는 권태 아니면 기타 등등. 그래서 뭐 어쨌다고. 내용보다 앞에 같은 멜로디가 연속되는 것이 싫다. 이게 음악이라고 가정하면 이런 음악을 누가 들어? 하지만 이 시 이후에도 비슷한 반복으로 구성한 시가 무지 많다.


  말은 울고 있다

  제 무능을 울고 있다

  말은 모든 것이지만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말은 울고 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소리 소리 소리 소리뿐이다

  소리 소리 소리분일까?  (<말은 울고 있다> 부분. p.22)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한 줄 띄고)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시시포스의 말뚝> p.25)



  <시시포스의 말뚝>은 한 문장이 전부 한 연이다. 그럼 분량이 너무 많아져 그냥 연과 연을 붙여 썼다. 남의 시를 이리 왜곡해 인용하는 건 나쁜 일이다. 시인한테 미안하다.

  하여간 어떤 게 나하고 맞지 않는 줄은 아시겠지? 김승희 명예교수는 절대로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거 읽을 때마다, 시는 안 되고, 쓰긴 써야겠고, 하는 경우에 시도하기 딱 좋은 시창작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인의 고향 광주말로, 영 거시기하다. 사실 이런 건 이상의 <오감도>에서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 싶기도.


  이 시집의 특색 가운데 하나. ‘하물며’ ‘부디’ ‘아직’ ‘이미’ ‘어쨌든’ ‘비로소’ ‘아랑곳없이’ ‘저기요’ ‘아~’ 라는 말들에 관한 시들. 이 가운데 하나만 읽어 보실려우?



  ‘하물며’라는 말



  하물며라는 말이여, 참으로 아름답도다,

  그 말에는 

  슬픔으로 가득한 서광의 눈동자가 들어 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다시 한번 돌아보는 사랑이 들어 있다,

  비천한 것들에 대한 굉장한 비탄이 들어 있다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는

  하물며가 없다,

  마음이 마음이 아닐 때 들려오는 말이여,

  하물며라는 증오를 거부하는 말이여,

  아무것도 아닌 네가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한 번 더 은은히 돌아보는 눈길 같은 말이여

  한없는 바닥에서 굉장히 쟁쟁한 말이여  (전문. p.29)



  시인이니까 당연히 단어에 상당한 관심이 있을 터. 나 같은 범부하고는 차원이 달라 기껏 ‘하물며’ 하나 속에도 온갖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그래 처음엔 그런 가보다 했는데, 이게 연달아 ‘부디’ ‘아직’ ‘이미’ ‘어쨌든’ ‘비로소’ ‘아랑곳없이’ ‘저기요’ ‘아~’까지 나오니 ‘어쨌든’에서 벌써 콱 질려버렸다. 차라리 “서울의 우울” 시리즈처럼 서울 곳곳에서, 서울의 과거와 현재 속에서 우울을 발견하면 조금 나은 데.

  열심히 쓴 시 가지고 뭐라 하는 건 참 나쁜 일이다. 지금 내가 시인의 시가 별로라는 건 아니다. 다만 나하고 맞지 않는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을 뿐.

  위에서 말했듯, 같거나 비슷한 시어가 줄창 출현하는 것도 맞지 않고, 마치 독자가 자기 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시 속에서 딱 단정해 말하는 어법도 마음에 안 든다. 하긴 학생들 월사금이나 책값하고 비슷하다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표제 시 <희망이 외롭다>를 소개하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서 다른 시 하나 꽝. 그걸로 독후감 마침.



서울의 우울 13

— 위층 사람



  당신은 지금 나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십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지 마시고

  천상천하 유타공존 하십시오.


  당신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시나

  소리 내지 않는 구분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의 머리통 위의 발바닥을

  당신의 발바닥 아래의 머리통을

  그렇게 그윽이 생각하면서

  함께 물망초 꽃으로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아니요

  아니요

  물망초 꽃이 아니라 아예 나를 잊으라는 망초꽃으로

  조용한 망초꽃으로

  너영나영 아늑히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전문. p.69)



  층간 소음? 이 시도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서울의 우울 시리즈에서 제일 짧아 옮겼다.

  근데 정말 몰라서 묻는데, “너영나영”이 무슨 뜻이여? ‘너하고 나하고’, 공동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사전에 나오지 않아 모르겠다. 사투리?

  유아독존唯我獨尊은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다. 유타공존(유他共存)의 유는 唯일까, 有일까? 오직 유唯라면 오직 너와 나만 함께 살자는 뜻이고, 있을 유有면 다른 사람도 있어서 함께 살자는 말인데, 唯 같기도 하고 有 같기도 해서 헛갈리는 건 내가 시를 쥐뿔도 몰라서 그런 것. 혹시 아무 생각없이 유아독존과 비슷하게 그냥 우리말로 유타공존이라 쓴 거 아니심?

  오늘 이 양반 욘세이가 일흔다섯 개. 이제는 더 이상 “불의 여인”이나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는 아니겠지? 늘 건강하시기 바란다. 건강한 게 대빵이다. 그깟 시보다 훨씬 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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