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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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리 이틀 동안 마킨의 책 두 권을 읽는다. <어느 삶의 음악>을 읽으며 이야기를 연결하고 분위기를 잡는 방식이 그럴 듯하고, 좀 잦은 듯한 부사의 사용도 읽기 좋을 수 있다는 발견, 그리하여 읽다가 도중에 개가실에 내려가 이 책 <프랑스 유언>을 집어왔다.

  그러나 <어느 삶의 음악> 보다 어렵게 읽힌다.  본문이 371쪽에서 끝나는 보통의 분량이건만 다 읽기 위하여 꼬박 이틀을 썼다. 안드레이 마킨은 말한다.


  “나는 어떤 사람들의 간질을, 또 다른 사람들의 천식과 코르크 붙인 방을, 또 어떤 사람들의 지하묘소보다 더 깊은 유배를 인용했다.” (p.336)


  지하묘소보다 깊은 유해는 모르겠는데, 도스토옙스키와 프루스트의 문장과 분위기를 가져왔다, 적어도 지표로 삼았다, 라는 고백이다. 나는 여기에 한 명을 덧붙이고 싶다. 움베르토 에코. 그가 쓴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로아나 여왕…>에서 고서적상 주인인 주인공 얌보는 1차 뇌졸중에 걸려 이를 회복하기 위해 어린 시절을 보낸 솔라라의 시골집으로 간다. 그곳에는 1930년대와 40년대, 얌보의 유년과 소년 시절에 할아버지가 수집해 놓은 온갖 책, 잡지, 신문, 우표, 과자깡통 같은 것을 발견한다. 이 잡동사니 속에 얌보의 눈에 띄는 것이 만화책 <로아나 여왕…> 등을 비롯한 소년 시절에 읽었던 책, 잡지, 장난감. 뇌졸중 발병 후 아내는 물론이고 자식들과 그들의 배우자, 아이도 못 알아보던 얌보는 새삼스레 이것들을 읽어보며 조금씩 옛 시절을 회상한다.


  <프랑스 유언>의 스토리를 엮어가는 주인공 화자는 학교 친구들이 ‘프란추즈’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30대 작가. 당연히 책을 쓴 안드레이 마킨과 적지 않은 부분이 비슷할 것이다. 마킨의 외할머니가 프랑스 여성이었던 것과 같이 프란추즈의 외할머니도 20세기 초에 노르베르 가문과 알베르틴 르모나 가문의 결합을 통해 프랑스에서 출생해, 어린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다. 샤를로트 르모니에.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이다. 1910년 정도에 태어나 의사 아빠를 따라 러시아에서 소년시대를 보내고, 엄마 알베르틴과 함께 파리에서 10대 시절을 지낼 때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해 소비에트 시대가 개막했다.

  엄마 알베르틴은 딸 샤를로트를 파리에 남겨 놓고 자기 혼자 남편이 있는 러시아 동쪽 타이가 근처로 떠났다. 파리에 홀로 남은 샤를로트 역시 별로 가진 것 없이 무작정 어린 시절을 보낸 동시베리아를 향해 엄마를 찾아간다. 소련 영내로 들어오자마자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많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살인적 밀도의 열차를 타고, 그나마 제때 도착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하염없이 걸어서, 절반, 아니 삼분의 일 정도의 거리는 걸어서 멀고 먼 동시베리아, 그곳에 도착해 엄마를 만났다. 그리하여 책의 서두 부분에, 외할머니는 “러시아의 눈 내리는 광활한 평원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프랑스 여인”이라고 썼다. 그가 파리에서 시베리아까지 가는 동안 두 발로 걸은 거리가 아무리 못해도 할머니 주소지인 볼가강 동쪽에서 파리까지 거리만큼 될 거란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어렵게 만난 엄마 알베르틴은 딸에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서 매일 기도했던 것은, 네가 절대로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는 거였단다.”


  ‘나’, “프랑스 놈”의 소련식 비칭인 프란추즈가 기억하는 것은 할머니 샤를로트가 볼가강 동쪽에 있는 깡촌 중의 깡촌 ‘사란짜’ 마을에 살면서부터. 프란추즈는 누나와 함께 여름이 되면 사란쨔의 할머니 집에서 방학을 보냈다. 이때가 열 살 정도.

  할머니 집에는 아이 눈으로 보기에 보물창고가 있다. 어린 이탈리아 소년 얌보의 옛집에 다락방이란 보물창고가 있었듯이. 할머니와 프랑스에서부터 근 5천km를 함께한 트렁크와 퐁네프 가방.

  작은 퐁네프 가방부터 이야기하자. 그 속에는 몇 개의 기름종이에 싼 봉투가 있었다. 프란추즈와 누나는 할머니의 주의가 소홀한 틈을 타, 어린이들 특유의 호기심으로 ‘페캉’ ‘라로셀’ ‘비욘’ ‘베르됭’이라 겉면에 쓰여 있는 봉투를 풀어본다. 독자는 쓰인 글씨만 보고도 그것들이 프랑스에서 가져온 흙과 자갈, 돌멩이라는 걸 즉각 알지만, 아이들은 이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왜 다른 곳도 아니고 보물상자인 퐁네프 가방에 들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함부로 꺼내 가지고 놀다가 (조금 후에 알게 될)제일 중요한 베르됭의 조약돌을 화단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몇 천km 서쪽으로 가고 또 가야 도착할 샤를로트의 고향 프랑스에서 가져온 돌. 작품 중후반에 알게 되지만, 소련에서 만난 소련인 남편 피오드르 할어버지보다 먼저 만나 사랑한 프랑스인 연인이 건넨 베르됭 기념품.

  큰 여행가방에는 지나간 시절의 신문과 신문 스크랩, 사진첩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오래 묵어 인화지 색깔도 변한 사진 속 인물들. 그 중의 하나.

  연미복 남자들과 야회복 여자들 사이에서 두툼한 털모자와 큼지막하고 칙칙한 솜저고리 차림으로 양털 담요에 싸인 아기를 가슴에 안고 선 여자. 처음 보는 사람이다. 프란치즈가 할머니한테, 이 여자가 누구예요, 묻지만, 할머니는 때마침 방안으로 들어온 두 겹의 박각시나방으로 화제를 돌려 프란추즈는 답을 듣지 못한다. 어린아이 답게 금방 호기심이 수그러들기도 했지만. 그 여자의 정체는 결말 부분에 밝혀진다.

  이어서 신문 기사들.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의 화제들. 이 가운데 초점 하나. 1896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초청 방불. 펠릭스 포르 프랑스 대통령과 황제가 나란히 찍은 사진. 2년 조금 지나 강력한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다른 곳도 아닌 엘리제 궁에서 정부 마르가르트 스타네이의 품 속에서 사망한 일 등등.

  중요한 건 가족들 사진과 1910년 파리 대홍수로 파리가 물에 잠긴 사건이었다. 시내에서 이동을 하기 위하여 작은 보트를 타야 했던 시절. 그리하여 파리는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되는 것이고, 저 소련의 끝도 없는 벌판이 시작되는 시베리아 초입 할머니 집에 간 아이한테는 파리가 잠긴 도시 아틀란티스가 될 수 있었다. 이는 프랑스 뇌이-쉬르-센이 고향인 샤를로트 할머니한테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을 의미한다.

  할머지 집에서 자잘한 것들을 찾아내 외가 가문의 흔적을 연상하는 것. 이게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를 연상시켰다는 거다.


  2부는 프란추즈가 조금 더 자라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이때부터 읽기가 쉽지 않다. 건초열에 시달리는 유달리 예민한 청년 마르셀의 사색처럼 길고 긴 문장은 아니지만 앞에서 말한 내용, 전쟁이 끝나고 홀로 시베리아로 떠난 엄마 알베르틴을 쫓아 그 험한 길을 10대 후반의 젊은 샤를로트가 열차도 타고, 지나가는 마차도 얻어 타고, 더 먼 길을 걸어서 도착하는 장면. 알베르틴의 남편이자 샤를로트의 아버지의 불행한 마지막. 하긴 당시를 살던 남자들 가운데 험한 죽음을 맞지 못한 사람이 워낙 흔했지만, 단지 프랑스인, 적국에서 소련으로 침입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씌우지 않으면 안 됐던 시절. 결국 내게 기억에 남는 것은 프루스트처럼 사색의 확장이 아니라 샤를로트의 생애 스토리였던 거다.

  3부는 본격적인 사춘기 속을 헤매는 프란추즈가 핵심이다. 물론 샤를로트의 지난 시절은 여전히 도저하게 흐르지만. 프란추즈는 볼가강변에 정박한 폐선 선창을 통해 생전 처음 사람의 교접 장면을 목격하고, 댄스 파티에서 만난 여자 아이를 만나 동정을 상실한다. 그리고 할머니 댁. 아마도 샤를로트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프란추즈. 그는 4부에서 10년이 지난 후 드디어 소련에서 벗어나 프랑스에 정치망명자로 남는다. 아틀란티스에 온 것. 이제는 여든 살이 넘었을 할머니, 여전히 프랑스를 그리워할 것이 틀림없는. 그러나 프란추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소련의 큰 도시도 아니고 사막의 끝자락이자 키르기스탄을 거쳐 몽골까지 펼쳐진 초원이 시작되는, 오직 적막만 흐르는 외로운 곳에서 결코 떠나고 싶어하지 않은 할머니 마음을.


  이렇게 작품은 쓸쓸한 초원과 사막의 접경지대에서 시작했다가 끝을 맺는다. 프랑스 여인이 굳이 소련의 변방으로 와서 한 평생, 그것도 더 이상 파란만장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이야기. 이것이 어떻게 읽으면 화려한 문장으로, 달리 보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쓰여 있다.

  읽고 나서 보니, <프랑스 유언>이 공쿠르 상과 메디치 상을 동시에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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