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바턴 ㅣ 시대의 여성 시리즈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최이현 옮김 / 잔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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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0년생 엘리자베스 개스켈이 1848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1848년.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이 한 번 크게 변곡점을 그은 시기. 차티스트 운동은 배운 지 하도 오래라 뭔 운동인 줄 몰랐는데 책 읽어보니 선거법에 관한 거였다. 재산이 일정액 이상 있는 남자 한테만 참정권을 주었단다. 이 구절 읽으니 어렴풋이 생각났다. 신대륙 발견을 기점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부르주아들이 이젠 귀족들을 말아먹을 수준이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 귀족 눈에는 상것들한테도 참정권을 주었는데, 아니지, 줄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까지 부르주아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어서 재산 하한을 설정했던가 보다. 차티스트 운동도 결국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뭘 알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앞뒤를 재보니 그럴 거 같다는 말이다.

  이때 프로레타리아들은 노동문제도 함께 거론한 것처럼 보인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대표작인 문학과지성사의 <남과 북>, 문학동네 <북과 남>에서도 주인공이자 제조공장의 사장 사모님인 마거릿 헤일이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노동조합원에게 동정적인 것과 비슷하게 <메리 바턴>에서도 개스켈의 시각은 무산자 쪽에 더 많이 가 있다.


  첫 장면은 바턴 가족과 윌슨 가족의 소풍.

  존 바턴은 맨체스터 남자다. 없는 사람들이 맨체스터에서 다 그렇듯이 공장 노동자 가정에서 나서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어 자신도 공장 노동자가 된 전형적인 맨체스터 사람. 어릴 적부터 지독하게 가난한 시절을 보내 보통 이하의 다소 왜소한 체구를 가졌지만 무엇이든지 단호하고 결연한 열정을 품은 공산주의자.

  이들이 말하는 가난은 그저 현대의 도시빈민과 비교하지 못한다. 사회적 복지라는 개념이 없어서 공장 노동자들은 최소 임금을 받아야 했고, 더 빈곤한 시골에서 유입되어 오는 새로운 노동자들 때문에 그나마 일자리 하나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없으면 굶어야 한다. 바턴 씨 부부도 첫 아이 톰을 잃었다. 못 먹어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성홍열에 걸려 죽었다. 뒤에서는 굶어죽었다는 표현도 쓴다. 아이가 그렇게 죽어갈 때 돈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이후 고용주에 대한 미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언제나 최소 임금. 경기가 좋으면 그나마 숨은 쉬고 살아가겠지만, 불경기가 닥칠 경우, 고용주들은 오직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가동을 축소하고 남는 인력을 잘라버린다. 이때부터 해당 가족은 굶주림을 견뎌야 한다. 먹을 수 있기만 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별스럽지 않은 질병에라도 걸리면, 이젠 면역체계가 부실해진 환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바턴 씨는 어린 시절부터 밥 굶는 법을 몸소 체험으로 익혀서 하루 이틀 굶는 건 그저 견딜 수 있다. 사흘 굶으면 남의 담장을 넘어가겠지만, 그러기보다 고용주의 대문을 깨부수고 쳐들어가는 걸 바라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분노를 품고 산다. 노동자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죽기까지 하는데 고용주들은 공장을 닫은 시기가 특별 휴가라도 되는 듯 몇 달씩 해변이나 겨울 스포츠를 즐기러 떠난다. 더 심한 불경기가 닥쳐 많은 무산자 가족이 죽어나가도 고용주 가족은 공연 구경 한 번 안/덜 가는 걸로 그친다. 그것도 남의 눈이 있어서 그런 거다.

  이이의 두번째 아이가 주인공 메리 바턴. 오빠가 어려서 죽어 지금은 맏딸, 열세 살짜리 아주 예쁜 소녀다. 엄마 이름도 메리라서 아빠는 딸을 작은 메리로 부른다. 하지만 지금 만삭인 아내는 소풍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 몇 주 후 출산하다 죽고 만다.

  바턴 씨는 메리의 죽음을 처제 에스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딸처럼 키워서 공장 여공으로 보냈다가 에스더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진 장교가 쉬운 얘기로 혼인빙자간음을 하고 아일랜드로 파견된 다음에 인생 망가진 내력을 가질 예정이다. 에스더는 자기가 망가진 후에 몰래 맨체스터로 돌아와 바턴 씨 가족을 살피다가, 이제 성인이 된 메리 바턴이 맨체스터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의 사장 아들 해리 카슨하고 서로 사랑하는 걸 알게 된다. 동시에 해리는 절대로 메리와 혼인할 생각이 없으며 오직 한 번의 엔조이를 바랄 뿐인 것도 알아채 드라마의 진폭을 넓히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함께 소풍을 간 윌슨 씨네는 아내와 개구진 외동아들 제임스, 젬 윌슨, 이렇게 세 가족. 윌슨의 친동생 앨리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산다. 앨리스는 처녀. 그러나 큰언니가 낳은 아들 윌을 자신이 입양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다. 양아들 윌은 초반에 나오지 않지만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외항선원으로 중요한 배역 가운데 한 명인 마거릿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개구쟁이 아들 젬은 머리통이 굵어지자 듬직하고 분별력 있는 청년으로 성장해 젊은 나이에 주물 공장의 주임으로 승진한다. 덕택에 급여가 여유로워 엄마와 고모를 넉넉하게 부양한다.

  윌슨 씨? 아쉽게 급사한다. 아마도 심근경색 아닐까 싶다. 이후 젬이 가장 노릇을 단단히 하는 효자이며 동시에 메리 바턴을 맹렬하게 짝사랑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서 무엇이든 메리를 위하여 결심하고 행동한다. 작중 가장 영웅적인 인물. 부잣집 아들 해리 카슨이 메리를 농락하고 버릴 생각인 것을 알게 되어 해리한테 경고하다가 그의 채찍에 얼굴을 한 대 얻어 맞는다. 열받은 젬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때려 눕히지만 경찰들이 두 사람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는 건 몰랐다. 그리하여 해리가 같은 장소에서 권총에 맞아 피살되었을 때, 하필이면 권총이 젬 윌슨의 것이라 재판에 넘겨지는 곤욕을 치룬다.


  앨리스 윌슨은 간호사와 세탁부, 두 가지 일을 하는 아주 음전한 사람. 보살 비슷하다. 이이가 메리한테 좁 레그 영감의 착한 손녀 마거릿을 연결해주어 둘은 절친 사이로 발전한다. 좁 레그는 직공 계급에 드물게 있는 몇 몇 가운데 한 명으로, 박물학, 곤충이나 파충류, 거미류, 꽃을 비롯한 식물 같은 것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아울러 사회 전반에 관해 발언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도 가지고 있는 현명한 노인.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늙은이 치고 헛소리를 하는 법 없이 똑부러지기 이를 데 없다.

  마가렛은 재봉사였다가 점점 눈이 먼다. 그러나 하나가 나쁘면 (이 당시엔 운이 좋아서) 하나가 좋은 법. 놀라울 정도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 솜씨가 있어서 눈이 보이지 않지만 여기 저기서 공연을 해 메리가 어려울 때마다 금전적 지원과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윌 윌슨은 작품 중간에 원거리 항해에서 돌아와 지내다가 훗날 작품이 좋은 쪽으로 크게 변할 모멘트 역할.

  여기까지는 무산자였고, 부르주아로 카슨 씨가 등장한다. 자신도 직공 출신이지만 자기 직원들처럼 극심한 가난으로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작은 사업을 벌여 성공한 성실한 사람.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듯이 공장을 확장하고, 생산에 박차를 가하다가도 불황이 오기만 하면 그저 생각없이 직원들을 정리해고 한다. 그게 설마 굶주림, 굶어 죽을 정도의 빈곤을 가져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은 지닌 인물이다. 바람둥이 미남이자 노동조합의 파업 기도에 초강력 대처를 주장하다 총 맞아 죽는 금발의 미남자 해리 카슨 때문에 하루 사이에 백발이 될 정도로 상심한다.


  개스켈은 작품 속에 다분히 계급 갈등을 묘사하고 있으며, 굶주림에 허덕이던 1840년대의 노동자 쪽에 선 듯하다. 나는 메리 바턴과 해리 카슨의 연애가 처음 나올 무렵에, 둘의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져 훗날 <남과 북>에서 공장 사장 부부처럼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기대는 초장에 깨졌다. 19세기 중반에 약한 빙하기가 있었다고 하던가? 전 세계적인 기근이 들고, 이를 좇아 당연히 불황이 덮쳐 디킨스의 작품에서 보듯 빈곤한 약자들의 삶이 정말 비참했던 모양이다. 맨체스터라는 거대 공업도시가 그럴 정도였으니 북쪽 시골을 말도 못했겠지. <남과 북>을 읽을 때부터 개스켈이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심정적으로는 동조하지 않았나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다.

  하지마 개스켈의 치명적 약점도 있다. 이이가 목사님 사모님이라는 것. 그리하여 작품 속에 성경 말씀이 말도 못하게 많이 나온다. 여기서 그치면 그나마 괜찮겠는데, 결론이 정말 예수님 말씀이다. 완전히 기독교 오리지네이트된 결말. 재미있게 읽다가 끝장에 가서 김 샜다. 철저하게 스팀 아웃.

  하긴 19세기 초 작품이다. 180년 전 작품이라 현대 소설을 읽는 것 같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작품. 읽으며 종교 측면만 빼면 상당히 진보적이라 이색적이다. 여태 읽은 19세기 영국 작가와 완전히 구별되는 개스켈 만의 특정적 관점을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서도 경험하시면 좋을 듯하다. 이 책이 아니더라도 <남과 북> 또는 <북과 남>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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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외롭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34
김승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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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에 광주에서 나서 서강대 영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마친 문학박사. 이 책이 나온 2012년에는 국문과 교수였고 지금은 명예교수.

  근데 우리나라 위키피디아에 재미있는 게 나오네. 이이의 별호가 “불의 여인” “언어의 테러리스트” 그리고 “초현실주의 무당”이란다. 오. 김승희의 한자 이름이 勝熙, 여자 아이에게 잘 붙이지 않는 이름이다. 이길 승, 밝을 희. 두 자 다 마찬가지. 그래서 그런가?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 어째 좀 으시시하네.

  두 달 있으면 만 스물한 살이 될 스무 살 시절 1973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장원을 해 등단했으니 벌써 57년차 시인이다. 게다가 시작부터 시 영재 수준을 넘었다. 스무 살 등단이 말이 그렇지 어디 쉽게 되는 게 아니다. 하여간 진짜로 김승희를 만났다 하면, 드센 사람일 거 같아서, 아나키스트라니까, 무당이라니까, 나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끼겠다. 이유가 있지. 오늘 독후감이 그리 친절하지 않을 예정이거든. 2012년 당시 이순耳順에 현직 명문 서강대학 국문과 교수님이 쓴 시를 하잘것없는 아마추어 풀때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그건 백에 아흔 여덟의 경우, 독자가 찐따라서 그런 거다. 그러니 아니겠지만 혹시 시인께서 이 어줍짢은 독후감을 보시더라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나이다.


  시집의 제목이 “희망이 외롭다”니까 제일 앞에도 희망에 관한 시가 있다. 희망 속에 무엇이 들었나? 그러니까 희망이란 것의 구조식은 어땠을까, 하는 질문일 터. 시인은 제목에서 다 알려준다.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꽃들이 반짝반짝했는데

  그 자리에 가을이 앉아 있다


  꽃이 피어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검붉은 씨가 눈망울처럼 맺혀 있다


  희망이라고……

  희망은 직진하진 않지만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전문. p.14)



  ‘신의 물방울’이 희망의 한 부분집합이라는 말인데, 이 신 님이 하도 변덕이 심한 분이라서 ‘신의 물방울’이 뭔지 모르겠다. 신의 눈물? 이게 제일 무난하지? 좋아도 눈물나게 좋고, 슬프면 당연히 눈물 나는 거고. 나머지 물은 별로 재미없다. ‘용수’라는 이름의 선배가 있었는데, 더 윗 선배가 이 용수 씨를 꼭 “야, 용오줌!” 하고 불렀다. 용한테 나올 물이 오줌밖에 더 있느냐면서. 그렇다고 희망이 신의 오줌이라고 하긴 좀 뭐하잖아? 아무래도 눈물이 좋은데, “수만 광년 먼먼 별에서 이제 막 너의 눈에 닿은 눈물”이 희망일까? 김승희와 같은 나이의 시인 이성복이 쓴 시 <눈물>에 나오듯이. 아니면 진로 소주?

  하지만 눈물에 집착하지 말 것. 정작 희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1연과 2연에 쓰여 있다. 반짝반짝 했던 꽃들이 가을이라 다 지었는데, 반짝반짝 빛날 때는 못 보았던 검붉은 씨, 내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우겠다는 집념이 바로 희망이라는 거다. 그걸 신의 물방울이라 했을 뿐. 에이, 쐬주방울이 아니었네.

  좋아. 첫번째 시는 마음에 들었다. 기대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시.



  반투명한 불투명



  그런 건가? 보이지 않는 건가?

  그런 건가? 들이지 않는 건가?

  그런 건가? 알지 못하는 건가?

  그런 건가? 다 소용없는 건가?

  그런 건가? 해가 또 지는 건가?

  그런 건가? 이렇게 살다 가라는 건가?

  그런 건가? 하루하루 오늘은 괴로움의 나열인데

  그런 건가? 띄어쓰기도 없이 범람하며 밀려오는 나날

  그런 건가? 내일도 오늘과 같다는 건가?   (전문. p.15)



  나 이런 시 안 좋아한다. 앞 대가리에 “그런 건가?” 열라 썼다가 뒷대가리는 결국 오늘도 내일도 뭐 하나 변하지 않는 일상 또는 권태 아니면 기타 등등. 그래서 뭐 어쨌다고. 내용보다 앞에 같은 멜로디가 연속되는 것이 싫다. 이게 음악이라고 가정하면 이런 음악을 누가 들어? 하지만 이 시 이후에도 비슷한 반복으로 구성한 시가 무지 많다.


  말은 울고 있다

  제 무능을 울고 있다

  말은 모든 것이지만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말은 울고 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소리 소리 소리 소리뿐이다

  소리 소리 소리분일까?  (<말은 울고 있다> 부분. p.22)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물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한 줄 띄고)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바람 묻힌 붓으로 바위에 글씨를 쓴다  (<시시포스의 말뚝> p.25)



  <시시포스의 말뚝>은 한 문장이 전부 한 연이다. 그럼 분량이 너무 많아져 그냥 연과 연을 붙여 썼다. 남의 시를 이리 왜곡해 인용하는 건 나쁜 일이다. 시인한테 미안하다.

  하여간 어떤 게 나하고 맞지 않는 줄은 아시겠지? 김승희 명예교수는 절대로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거 읽을 때마다, 시는 안 되고, 쓰긴 써야겠고, 하는 경우에 시도하기 딱 좋은 시창작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인의 고향 광주말로, 영 거시기하다. 사실 이런 건 이상의 <오감도>에서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 싶기도.


  이 시집의 특색 가운데 하나. ‘하물며’ ‘부디’ ‘아직’ ‘이미’ ‘어쨌든’ ‘비로소’ ‘아랑곳없이’ ‘저기요’ ‘아~’ 라는 말들에 관한 시들. 이 가운데 하나만 읽어 보실려우?



  ‘하물며’라는 말



  하물며라는 말이여, 참으로 아름답도다,

  그 말에는 

  슬픔으로 가득한 서광의 눈동자가 들어 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다시 한번 돌아보는 사랑이 들어 있다,

  비천한 것들에 대한 굉장한 비탄이 들어 있다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는

  하물며가 없다,

  마음이 마음이 아닐 때 들려오는 말이여,

  하물며라는 증오를 거부하는 말이여,

  아무것도 아닌 네가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한 번 더 은은히 돌아보는 눈길 같은 말이여

  한없는 바닥에서 굉장히 쟁쟁한 말이여  (전문. p.29)



  시인이니까 당연히 단어에 상당한 관심이 있을 터. 나 같은 범부하고는 차원이 달라 기껏 ‘하물며’ 하나 속에도 온갖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그래 처음엔 그런 가보다 했는데, 이게 연달아 ‘부디’ ‘아직’ ‘이미’ ‘어쨌든’ ‘비로소’ ‘아랑곳없이’ ‘저기요’ ‘아~’까지 나오니 ‘어쨌든’에서 벌써 콱 질려버렸다. 차라리 “서울의 우울” 시리즈처럼 서울 곳곳에서, 서울의 과거와 현재 속에서 우울을 발견하면 조금 나은 데.

  열심히 쓴 시 가지고 뭐라 하는 건 참 나쁜 일이다. 지금 내가 시인의 시가 별로라는 건 아니다. 다만 나하고 맞지 않는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을 뿐.

  위에서 말했듯, 같거나 비슷한 시어가 줄창 출현하는 것도 맞지 않고, 마치 독자가 자기 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시 속에서 딱 단정해 말하는 어법도 마음에 안 든다. 하긴 학생들 월사금이나 책값하고 비슷하다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표제 시 <희망이 외롭다>를 소개하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서 다른 시 하나 꽝. 그걸로 독후감 마침.



서울의 우울 13

— 위층 사람



  당신은 지금 나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십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지 마시고

  천상천하 유타공존 하십시오.


  당신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시나

  소리 내지 않는 구분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의 머리통 위의 발바닥을

  당신의 발바닥 아래의 머리통을

  그렇게 그윽이 생각하면서

  함께 물망초 꽃으로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아니요

  아니요

  물망초 꽃이 아니라 아예 나를 잊으라는 망초꽃으로

  조용한 망초꽃으로

  너영나영 아늑히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전문. p.69)



  층간 소음? 이 시도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서울의 우울 시리즈에서 제일 짧아 옮겼다.

  근데 정말 몰라서 묻는데, “너영나영”이 무슨 뜻이여? ‘너하고 나하고’, 공동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사전에 나오지 않아 모르겠다. 사투리?

  유아독존唯我獨尊은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다. 유타공존(유他共存)의 유는 唯일까, 有일까? 오직 유唯라면 오직 너와 나만 함께 살자는 뜻이고, 있을 유有면 다른 사람도 있어서 함께 살자는 말인데, 唯 같기도 하고 有 같기도 해서 헛갈리는 건 내가 시를 쥐뿔도 몰라서 그런 것. 혹시 아무 생각없이 유아독존과 비슷하게 그냥 우리말로 유타공존이라 쓴 거 아니심?

  오늘 이 양반 욘세이가 일흔다섯 개. 이제는 더 이상 “불의 여인”이나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는 아니겠지? 늘 건강하시기 바란다. 건강한 게 대빵이다. 그깟 시보다 훨씬 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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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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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고뉴-프랑슈콩테에서 1951년애 태어나 71년간 그곳에서 살다가 간 시인, 에세이스트, 기독교 작가 그리고 가끔 단편소설가. 제일 중요한 장르는 시와 에세이. 그래서 그런지 소설도 문장이 뭐라 그럴까, 거미줄 같이 아롱져 더욱 화려하다. 섬세함과 화려함. 이게 양극단인 것처럼 들리지만, 햇살이 파르르 떨리는 은빛 새벽 거미줄의 아롱거림도 얼마든지 화려할 수 있다. 그것을 직조하여 화면을 만들 수 있다면. 아무나 이렇게 쓰는 것은 아니겠지? 그걸 할 수 있는 작가도 꽤 있다. 우리나라에선 많고 많은 작가들이 그렇게 쓰려고 애쓰는 게 짠하기도 하지만. 보뱅의 문장에는 칼날이 없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섬세하고, 화려하고, 부드럽다. 작품의 내용과 관계없이 문장이 그렇다는 말이다. 소설이라는 게 문장이 반은 먹고 들어가는 장르이니 이 또한 얼마나 막강한 무기랴.


  주인공인 화자 ‘나’는 하도 여러 개의 가명을 써서 독자가 진짜 이름이 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 이를 프랑스 말로 ‘나’ 즉 ‘moi’라고 하자.

  나는 작품의 첫 문장부터 깜짝 놀랐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 거 참 취향도 별나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것을 왜 “이빨”이라고 할까? “이”라고 하는 훨씬 듣기 좋을 우리말이 있는데. 치과에 가도 이젠 ‘이’라고 하지 않는다. 꼭 ‘치아’라고 한다. ‘이’라고 쓸 경우엔 꼭 앞에 뭐가 붙는다. 누렁니, 뻐드렁니 등등. 아름답지 아니한 것.


  moi가 사는 곳은 서커스단 트레일러. 공연단의 모든 설비관리를 하는 아버지와 매표소에서 표를 파는 엄마를 따라 프랑스 전국을 정해진 코스로 일주하는 삶. 그리하여 moi는 인류를 유랑민, 정착민, 그리고 아이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눈다. 두 살 때부터 사랑을 했으니 이 정도쯤이야 뭐.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첫사랑이 등장한다. 늑대. 진짜 늑대다. 그러니까 ‘누런 이빨’이라 번역한 거다. 폴란드 중남부의 크라쿠프 지역에서 살다가 사람들한테 생포되어 서커스 단장이 비싼 돈을 들여 직수입한 늑대. 늑대는 길들지 않는다. 그래서 코끼리, 사자, 범, 말 같은 짐승들이 전부 쇼를 할 때, 늑대는 여전히 우리에 갇혀 서커스 천막 매표소 앞에 전시되어 지나가던 꼬맹이들과 동네 양아치들한테 돌을 얻어맞기 십상이다.

  어느 한밤. 전립선이 뒤숭숭한 아빠가 자다가 오줌 마려워 깨 보니 글쎄 moi가 없다. 아빠는 갑자기 잠이 확 깨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moi를 찾기 시작했다. 다른 트레일러 여기저기서 전부 등불을 켜고 어릿광대, 곡마사, 곡예사, 여자들, 아이들이 몽땅 잠옷 바람으로 나와 moi를 찾아 일대를 싹싹 뒤진다. 영낙없이 아이를 잃어버린 줄 알았겠지. 결국 고모가 moi를 찾았다. 늑대 우리, 말이 ‘우리’지 어떻게 열었는지 철창을 열고 들어가 털이 부얼부얼하고 그만큼 따뜻한 늑대의 배에 작은 머리를 대고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랬다는 거다. 픽션이니까 가능하지. 절대 길들지 않는 늑대의 배를 베고 자는 거. 늑대는 moi가 여덟 살 때 죽는다. 서커스단이 다음 공연장 아를에 도착하기 직전에.

  아를에 천막을 친 날 밤. 또 moi는 사라졌다. 잠옷을 입은 채 늑대 묻은 곳을 찾아. 아를에서 8~15km 떨어졌다고 썼는데 여덟 살 아이가 깜깜한 밤에 밤새도록 걸어가면 도착할까 말까 할 거리. 결국 도저히 어디에 묻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근처 작은 마을에서 멈췄다. 여기서 만난 뚱뚱하고 선한 사마리아 여인. moi는 자기 이름이 프륀 아망동이라 거짓말한다. 프륀, 자두. 사마리아 여인은 moi를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이곳에서 moi는 평생 즐기게 될 음악을 처음 만난다. 슈베르트. 여인은 간호사. 동네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주사를 놔주고 돈을 얻어 바그너, 라벨, 슈베르트의 음반을 산다. 하루 종일 제법 크게 틀어놓고 음의 물결 속에서 거니는 걸 좋아한다. 음악은 방에서 자고 있는 은퇴한 남편 파티시예 때문에 듣기 시작했다.

  이후 moi도 음악을 듣는다. 알파와 오메가는 역시 바흐. 바흐의 사진을 보면 뚱뚱하다. 그래서 moi는 바흐를 ‘뚱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제일 마지막도 뚱보가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악보로 끝낼 정도로. 알파와 오메가.


  이후, 그러니까 늑대가 죽은 다음부터 moi는 거의 상습적으로 가출을 시도한다. 이건 부모 생각이고 자기가 가출로 치는 건 훨씬 이전 부터다. 단지 그들 눈에 띄지 않았을 뿐.

  moi를 안도하게 할 수 있는 남자를 구하고 있다. 바로 늑대. 늑대 같은 남자. 할머니가 해준 1940~45년에 폴란드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었다. 유대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moi 같은 집시에게 늑대라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저지른 것이 바로 인간. 할머니는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푸른 수염이 있는 거라고. 여기서 ‘푸른 수염’은 어여쁜 유디트의 새신랑, 푸른 수염의 영주, 사이코 패스이자 괴물을 말한다. 근데 그렇다는 거다. 푸른 수염을 던지긴 했는데 끝날 때까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

  유랑민인 아빠는 moi를 기숙학교에 보낸다.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moi는 라틴어, 국어, 작문에는 따라올 아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받아내지만 수학, 과학은 젬병이다. 국어와 작문? 그러면 훗날 책을 쓰겠지? 맞다. 그러나 자기 글을 쓰기 전에는 언제나 문청인 남편 로망을 만난다. 이 때가 열일곱 살. 이제 케르보크 여사가 된 moi는 십년이 넘도록 함께 사는 데 성공한다.

  moi의 최고 가치는 자유. 결혼이라는 약한 고리는 moi로 하여금 진정으로 사랑하기에는 과도하게 타인을 모방하는 삶을 살게 한다. 자유는 책임을 담보로 하는 것. moi는 그럼에도 거침이 없다. 부모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moi와 결혼한 로망은 시간이 갈수록 감당하기 힘든다. 작품도 안 되고, moi는 제멋대로이고, 돈은 쪼들리고, 부모한테 손 벌리기는 죽어도 싫고, 싫지만 어쩔 수 없어서 훗날, 바로 옆집에 사는 오케스트라 수석인지 부수석 첼리스트와 밤이면 밤마다 자고 새벽에 기어들어오는 moi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갈라설 때까지. moi는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절대 가치는 자유이기 때문에. 전형적인 프랑스 소설이다.

  건조하게 독후감을 스토리 위주로 썼지만, 이 작품은 결코 스토리를 읽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제일 앞에서 이야기했듯, 문장, 문장, 오직 문장을, 영롱한 화려함, 그리고 부드러움을 감각하기 위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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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걸작선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37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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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년 전에 현대문학사에서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의 7번으로 나온 《러브크래프트 걸작선》을 읽었다. 이번에는 “을유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137번으로 나온 《러브크래프트 걸작선》. 모두 다섯 개의 중∙단편이 실렸는데, 이 가운데 세 편이 현대문학사 책과 겹친다.

  목차를 보자.


  1. 외부자

  2. 벽속의 쥐들

  3. 크툴루의 부름

  4.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

  5. 우주로부터의 색


  이 가운데 2, 3, 5번이 겹치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6년 전에 읽은 소설집이 그 당시에는 충격적이면서도 엽기발랄한 것이 재미있게 읽었지만, 지난 시간 동안 싹 잊어버려 아예 처음 읽는 것 같았다. 게다가 3, 4, 5번은 “크툴루”라는 생명체, 아마도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외계 생명체로 신비롭고 악마 같은 초자연적 힘을 가진 존재이다. 5번에서는 크툴루와 그의 동족이 해왕성 너머 태양의 아홉 번째 행성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때 인류는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이 해왕성인 줄 알았거나, 막 명왕성의 존재를 발견한 시점이다.

  하워드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생몰이 1890~1937. 당시 유럽과 아메리카를 휩쓸고 있던 반유대주의의 편을 들었으며, 이이의 반유대주의는 우월형질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당연히 히틀러를 지지하기도 했다. 즉 그때는 극단적 보수주의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미국인.

  미국인 보수주의자라면 외계인은 당연히 지구 점령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맞서 싸울 상대. 그런데 조금 다르다. 러브크래프트의 외계인은 어쩌면 인류가 탄생하기 전부터 와 있으면서 지구인에게 정체만 밝혀지지 않으면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대신 자기들이 필요한 물질을 채취/채광해간다. 

  이런 것이 소설이 되려면, 어쩌다 인간의 눈에 외계인이 띄는 아주 드문 경우. 그런 일이 있었다.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전, 원주민의 토속 종교 속에서 외계문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들어온 부두교 예식에서도 그렇다.

  이들은 비단 육지에만 있는 게 아니라 바다 속에서도 있다. 아틀란티스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때 섬과 함께 있었고, 섬과 함께 바다로 내려가 그곳에서 터를 잡기도 했다.

  육지에 있건, 바다에 있건 크툴루는 자신의 흔적을 인류에게 들키지 않으려 전력을 다하기 때문에 그들과 접촉한 사람들은 대개 행방불명되거나, 상당한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이상이 되거나, 자살해버린다. 어쩌면 그들이 죽였을 지도. 간혹 그들과 관계를 맺어 가까워지면, 크툴루에게 설득당해 놀라운 의과학으로 신체에서 뇌만 절묘하게 빼내, 신체는 그들이 싱싱하게 보관하고, 뇌는 시각, 청각, 말하는 장치 등을 연결한 후 금속함에 담아 크툴루의 별까지 여행하기도 한다. 정말 거기까지 갔다 온 사람은 나오지 않고, 뇌만 살아 생각하고, 주인공을 설득해 뇌를 뽑아 함께 제9 행성에 가자고 하기도 한다.

  그러니 어쨌건 외계인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지만 애초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그들이 있는 곳에 접근하지 않는 것. 지구에서 특정한 물질을 채취해 간다 하지만, 오랜 세월 그렇게 했어도 지구인이 사는 데 불편함이나 모자람은 여태 없었으니 어쩌면 최선일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그저 그렇구나, 이런 생각 하지시? 하지만 읽어보시라. 곳곳에서 섬뜩한 장면이 등장해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미 현대문학에서 나온 책으로 읽어본 전력이 있더라도 어떤 작품에 무슨 장면이 나오는 지는 다 잊었어도, 결코 밤 늦게 나 홀로 있는 방에서 읽지는 않겠다고 작심해, 딱 해 있을 때 다 읽었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러브크래프트를 검색하다가, 오랜만에 나무위키에 가 보았더니 첫 문장이 이렇게 쓰여 있다.

  “크툴루 신화의 창조자이자, 현대 호러 문학과 서브컬처 전반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작가.”

  러브크래프트 한테 크툴루가 이만큼 중요한 (아씨, 이걸 뭐라 해야 하는 거야? 등장인물도 아니고, 소재라고 하면 빵점이고, 장치는 말도 안 되고) 하여간 그런 거다. 그러니 을유문화사 책이 “걸작선”일 수는 있겠다.


  첫번째 순서로 실린 <외부자>는 괴물 이야기. 성에 사는 ‘나’. 나는 성의 까마득한 탑의 꼭대기로 올라간다. 그곳에는 또 더 위로 갈 수 있는 듯한 입구가 있다. 테드 창의 데뷔 단편 <바빌론의 탑>하고 비슷하지? 탑 위에 더 위로 향하는 뚜껑. 두 작품의 주인공 다 어렵게 뚜껑을 열어젖힌다.

  <외부자>의 ‘나’가 그곳으로 기어 올라가니 완전한 어둠. 앞이 보이지 않지만 편평한 것이 큰 방 같기도 하다. 그래 더듬더듬 짚어가며 더 깊숙이 들어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펼쳐지는 광경. 무도회. 온갖 선남선녀가 즐겁게 춤을 추고 있어 ‘나’도 한 자리 끼려고 냅다 달려가니, 그곳의 신사 숙녀들이 화들짝 놀라, 숙녀들의 혼절하기도 하고, 신사들도 아이구 깜짝이야, 혼비백산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이 외치는 말이 ‘나’를 보고 “괴물”이라고. ‘나’는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거울을 보니,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할 괴상망측하고 끔찍한 모습의 괴물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거.

  이 작품 속에 괴물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그건 독자가 생각하는 거, 그게 맞다. 독자 자신일 수도 있고, 누구나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 같은 모습일 수도 있고, 크툴루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나를 차버리고 떠난 마음 속의 악마인 그새끼 또는 그년일 수도 있겠지. 이런 거 아니더라도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 것이라도 괴물이 될 수 있으니 그건 알아서 하시고.


  두번째 실린 <벽속의 쥐들>은 현대문학 책에도 나오는 작품이다. 쥐들의 습격. 영화에서도 쥐가 습격해 사람들을 쪼아먹어 죽이는 게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이없게도 베를린 필 최초의 여성 상임지휘자, 즉 마에스트라를 그린 영화 <더 컨덕터>에서 마에스트라의 이름이 Tar. 거꾸로 하면 Rat, 바로 “쥐”다. 이것도 뭔가 있겠지?

  종과 관련없이 우생학 적으로 센 놈이 이기는 거. 지하 묘지에서 이번에 바닥 뚜껑을 열고 더 지하로 들어가면 그동안 교회의 벽에서 찍찍거리는 소리의 주인공들을 만난다. 무시무시한 숫자의 쥐들.

  아휴, 내 취향 아니다. 큰 아이 어렸을 때 둘이 손잡고 <주라기 공원 II> 보러 갔다가, 음산한 음악이 깔리면서 쥐만큼 작은 공룡이 앉아 쉬는 인간 앞에 나타나, 곧 작은 공룡들이 무수하게 몰려들어 그 뚱뚱한 인간을 마구 쪼아 먹을 거 같아서, 아이한테, 갈래? 했더니 걔도 응, 그래서 부자가 손잡고 영화 보다가 나왔다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이런 작품이 마음에 들겠어?


  아직 러브크래프트를 읽지 않은 독자들한테는 권할 만하다. 책을 읽으며 이이를 놓친다면 여간 아까운 게 아니다. 더구나 이 책은 서울대 영문과에서 SF문학을 강의하는 이동신 교수가 번역하고, 특히 오랜만에 괜찮은 역자 해설이 들어있어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기이한 소설, 즉 “위어드 픽션”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돈내산 하실 독자는 이 책 말고 현대문학을 사셔도 나쁘지 않겠다. 12년 전에 나온 책이라 13편의 단편소설에 역자해설 및 연표 포함 380쪽이 10퍼센트 할인가 14,400원. 을유는 같은 조건으로 5편에 292쪽, 같은 가격이라 가성비가 좋다. 해설 및 번역의 품질 대비에 관해서는 노코멘트. 어떤 책을 고르든지 후회할 일은 별로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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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ㅣ 문지 스펙트럼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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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전적으로 프랑시스 뿔랑이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 원작이라는 이유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은 책이다. 베르나노스가 소설가인 줄 알았는데 희곡도 썼구나. 어째 오페라를 들으면서 원작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거 참. 하긴 그거 가장 최근에 들은 게 못해도 15년은 됐겠다.

  작품을 읽어보면 이건 연극 공연을 위한 희곡이 아니라, 희곡은 희곡인데 희곡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대본 비슷하게 쓴 거 같다. 그렇다고 시나리오라고 보기 힘든 중간 정도.

  조르주 베르나노스를 읽기 위해 내게는 진입장벽이 있으니 바로 종교의 벽. 내가 읽은 두 권의 베르나노스가 <사탄의 태양 아래>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두 권. 제목부터 척 보면 독실한 천주교인이 쓴 작품이다. 유물론자인 나는 읽기가 그리 즐겁지 않다. 성서를 읽으면서도 성서는 오직 신자, 교인들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을 한 종자라서 여간해 베르나노스하고 친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읽는 것은 뭐 작품이 매력이 있어서 그렇다.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도 영상이나 극, 딱 그것만 보고 읽으면 감동, 감화 가득한 작품이다.

  사실상 프랑스 혁명이 시작하는 1789년 4월 27일과 28일, “부자들에게 죽음을!”이란 기치를 든 과격 시민들이 직공들의 임금을 대책 없이 깎아버린 벽지 공장 사장 장-밥티스트 레베용과 초석공장 소유주 사장 앙리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화형에 처하고 그들과 다른 악덕기업의 사장 집을 차례로 약탈하기 바로 직전인 4월 26일에 이 드라마는 시작한다. 혁명 시작이 7월 14일이라고? 그건 시민군이 바스티유 감옥을 깨버린 상징적인 날짜이고 사실상 상퀴로트들의 폭발은 레베용과 앙리오를 비롯해 최고의 부자 동네 폴리 티통으로 쳐들어가 부잣집을 싸그리 약탈한 것으로 시작한다.

  1789년으로 말하자면 가뭄이 극심해 시민들은 밀가루 구경도 못할 처지, 농사를 망친 농민들은 먹고 살자고 파리로 몰려들어 인구가 갑자기 많아지니까, 제조업 사장들이 임금을 후려쳐 대부분의 시민은 먹고 죽으려고 해도 하루에 수제비 한 그릇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빵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다가 그래도 멍청했던 루이 16세가 모른 척하자 약탈을 시작했고, 그제서야 출동한 기마병들이 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해 본격적으로 뇌관을 터뜨려 버린다. 그게 1789년 4월 27일과 28일. 근데 솔직히 정확하다고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지금 역사책 보고 베끼는 것이 아니고, 전에 썼던 프랑스 혁명 시기의 소설책 <7월 14일> 독후감 보고 쓰는 중이라서. 앗, 독후감 업로드 하는 오늘이 혹시 7월 14일 아녀? 이거 백퍼 우연이다. 그것 참.


  시작은 비록 “부자들에게 죽음을!”로 했건만, 부르주아만 부자가 아니고, 귀족들도 당연히 부자인 동시에 대지주였다. 농업 부르주아인 귀족에서 천천히 상공업 부르주아인 신계급으로 사실상의 권력이 이동하던 시기. 상퀼로트들은 귀족 집안 역시 그간의 호의호식한 대가를 물어야 했다.

  그리하여 첫 무대는 이런 정황을 밝히기 위해 들라포르스 후작의 저택에서 후작과 그의 아들이자 기사이자 주인공 블랑슈의 오빠가 어지러운 파리의 치안, 그리고 예민하고 겁이 많은 블랑슈가 하필 오늘 마차를 타고 나간 것을 걱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자는 지금의 동요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하고 싶어한다. 대부분의 귀족, 부르주아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조금 지나 블랑슈가 외출에서 돌아와 함께 이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자신은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들어간다. 무대극은 원래 쓸데없이 이야기를 길게 끌지 않는다.


  처음이니까 견습수녀. 쉬운 얘기로 하면 새끼수녀. 다른 수녀들은 검은 캡을 쓰지만 견습은 흰 캡을 쓴다든가 하여간 그렇다. 수녀원에서도 귀족, 평민의 계급은 존재한다. 물론 천주의 관할 아래 평등하다고 주장하지만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알게 모르게 다 그런 거지. 블랑슈는 후작 아빠가 특별하게 부탁해 일찌감치, 그걸 뭐라 그러나? 일종의 수계 같은 거, 정확한 말은 아니지만 수녀 수계를 받을 수 있게 조정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원장 수녀가 오늘 내일 한다. 그러다가 진짜로 죽는다. 죽으면서 사실상 수녀원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마리아 수녀에게 블랑슈 들라포르스를 공적公的으로 의탁한다. 이게 수녀원에서는 무서운 건가 보다. 한 번 의탁하고, 그러겠다고 했으면 정말로 돌봐야 하는 모양이다. 저 뒤로 가면 하여간 이 일 때문에 마리아 수녀가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목숨? 수녀들의 죽음이 프랑스 혁명하고 관련이 없을 거 같은데, 천만의 말씀. 날짜가 조금 더 지나 혁명이 성공하는 쪽으로 접어들자, 주변 국가들이 왕실을 지켜주기 위하여 군대를 파병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걸 눈치챈 시민군들, 그들 입장에서, 우두머리가 부르봉 왕가와 친밀해도 너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로마 교황청. 그리고 교황청의 졸개인 신부, 수녀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 시민들이 그간 교회한테 고난을 받았지만 교육을 받지 못해 좀 무식한 시민군들은 교회가 그간 잘 먹고 잘 산 걸 무겁지 않게 징벌하는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간혹 겉으로 왕따 당하기 싫으니 비슷하게 교회에 대고 지랄은 했지만 속으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도 있었으니, 이런 자가 교회나 수도원에 밀려들어온 시민군에 속했으면 그나마 팔이 안으로 굽었겠지? 말하면 뭐해. 당연하지. 사는 일이 다 그래.


  가르멜 수녀원을 보면, 원장이 죽고 새 원장으로 당연히 마리아 신부가 될 줄 알았는데, 이 와중에 귀족의 딸인 마리아 수녀가 원장을 하는 것보다 마리아는 마리아지만 시민의 딸인 성 아우수스티노의 마리아가 원장 자리에 오른다. 새 원장이 자신도, 자기가 시민 출신이라 아무래도 많이 배운 귀족의 딸, 강생의 마리아가 원장이 되어야 했다는 걸 새 이해하고 안다. 그래서 극을 진행하며 생기는 많은 일을 마리아 수녀와 상의하는 절차를 거치고, 가끔가다 새 원장 자신이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경우에는 마리아 수녀 역시 기꺼이 순종의 의무를 따른다.

  당연히 블랑슈가 제일 어린 수녀. 바로 위에 콩스탕스 수녀. 덩치 좋고, 발랄하고, 늘 즐겁고, 낙천적인 성경이라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앞으로 블랑슈 앞에 닥치는 많고 많은 겁나는 일, 우유부단, 어려움으로부터의 회피 같은 것을 하려할 때마다 자주 도와준다. 자주, 언제나. 물론 콩스탕스의 뜻대로 블랑슈가 늘 따르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수녀들. 이 가운데 호호 할머니 수녀도 있다. 세상 경험이 많고 이제 곧 이미 죽은 원장 수녀를 따라가야 하는 이. 어린 수녀들을 포용하는 그릇이 크다. 이이를 뺀 기타 수녀들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이, 이런 수녀도 있고, 저런 수녀도 있다.

  이들이 혁명기의 곤란을 겪으면서, 결국 기요틴 아래에서 목이 떨어지는 스토리.


  따라서 수녀원이 배경으로 깔리는 순간, 천주의 뜻, 원장에 대한 순명, 순교에 관한 “대화”가 무진장 쏟아진다. 무식한 독자인 내가 도무지 모르겠는 것은, 수녀들의 아버지인 천주께서 시민, 상퀼로트들로 하여금 수녀원을 약탈할지언정 수녀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판결을 하게 하면 될 것을, 왜 수녀들로 하여금 순교를 하게 만들었을까?

  그게 우습더라니까? 구약성서를 보면, 기껏 자기 아들 딸을 만들어 놓고, 틈만 나면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해서 자식 가운데 제일 큰 아들을 칼로 후벼 죽여 자신한테 바치라고 하지 않나, 애굽의 모든 장자를 하룻밤 사이에 몰살시키고 애굽을 떠난 모세 무리를 광야에서 몇 십 년 헤매게 하지를 않나.

  근데 이게 나 같은 집 나간 불쌍한 검은 양의 생각이지 독실한 가톨릭 환자인 막내 외삼촌네 식구들은 그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하니 뭐 그런가보다 할 수밖에. 그건 이해하더군. 신자가 아닌 사람이 성서를 읽으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흠. 난 당연한 사람이야. 뭘 이해해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성서는 이해해서 읽는 게 아니라며? 그냥 무조건 믿는 자에게 복이 온다며?


  이 책을 읽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뿔랑의 오페라였다는 건 제일 앞에 썼다.

  오페라 전부 다 감명 깊다, 이렇게 말하면 이건 생 구라고, 지루함을 참고 참으면 드디어 반가운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가르멜 수녀 열여섯 명이 ‘성모 찬양 Salve Regina’를 부르며 기요틴 아래 대기하고 있다가 한 명씩 처형대를 향해 걷어 무대에서 사라지고 잠깐 후, 써~억, 하는 살 떨리는 소리가 날 때의 섬뜩함. 그럼 소름이 쫙 끼치는데, 그걸 듣기 위해 두 시간 동안 스피커 앞에 앉아 있는 거다. 제일 처음에 DVD로 당시 유행하던 홈 씨어터라는 장치로 봤는데 써~억, 하는 기요틴 도끼날이 자유낙하 하는 음향이, 아이구, 죽여줬다니까. 그래 곧바로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버진 클래식 레이블 CD를 사서 듣기 시작했다.

  듣다, 듣다 그렇게 소름끼치는 피날레는 처음 들어봐서. 당신도 한 번 경험해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튜브 한 장면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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