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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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만 260쪽인데 무려 스물네 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첫 번째 <늙은 죄수의 이야기>가 9쪽부터 시작하니까 사실 252쪽. 평균 하나의 이야기가 열 쪽 반의 분량으로 되어 있으니 이걸 뭐라 해야 하나. 단편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짧다. 심지어 순 본문 252쪽 가운데도 12쪽은 삽화가 실려 있으니 소설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이야기 묶음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한때 손바닥 장掌 자를 써서 장편소설掌篇小說입네, 하고 책을 만든 기억이 새록하니 나는데, 정말로 손바닥 소설이란 장르가 있다면 딱 이런 작품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겠다.
 눈에 들어온 차페크의 작품에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가 있다. 일단 두 권 다 사고, 어느 것부터 읽을까, 하다가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왼쪽……>부터 골라잡았다. 다 읽고 붉은 색으로 씌어있는 영어 제목을 보니까 <Tales from the Other Pocket>. 아, <오른쪽……>부터 읽었어야 했구나, 알았지만 그게 뭐 그리 큰 대수랴. 올해 초에 차페크가 쓴 동화책 <작은 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을 읽으면서 이이가 짧은 글도 많이 썼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왼쪽……>와 <오른쪽……> 둘 다 성인成人(왜 여기서 난데없이 성인聖人으로 읽힐 수 있을까를 걱정했지?)을 위한 짧은 이야기일 것이라고는 조금도 궁리하지 못했다. 책 읽기 전에 정보를 소홀히 한 탓이다.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짧은 이야기는? 맞다. <이솝 우화집>. 차페크의 <왼쪽……> 역시 우화적인 측면이 강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예를 들어볼까? 첫 번째 이야기에 ‘얀데라’라는 이름의 작가가 등장한다. 이이가 전에 작품을 한 편 썼는데 프린터로 출력해 읽어보니(1929년 출간한 책이니 프린터 출력이란 인쇄 초고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어디선가 비슷한 내용을 본 것 같다는 아주 언짢은 생각이 드는 거다. 다시 읽어보면 오히려 더 그러해서 자기도 모르게 분명히 누군가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어 고민을 하다가, 오랜 친구를 만나 사정을 얘기하기에 이른다.
 “여봐, 이거 좀 읽어봐. 최근 작품인데 어째 남의 것을 베꼈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그랬더니 친구 왈, “한 눈에 알아봤는데 뭐. 체호프 작품을 베낀 거구만.”
 작가 얀데라가 아주 깨끗한 사람이라 이런 지적을 받자 마음도 가벼워지고 기분도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한테 또 비슷한 얘기를 하기에 이른다.
 “믿지 못하겠지만 때로 작가는 표절을 하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거든. 예를 들어 내가 쓴 최근 작품도 남의 것을 베꼈다는 걸 알아챘어.”
 이 말을 듣자마자 이 친구는 이렇게 대답을 하는 거였다.
 “알고 있어. 분명히 모파상에게서 훔친 거지.”
 어? 그리하여 얀데라는 자기하고 가까운 모든 친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기에 이르고, 그래서 자기가 쓴 작품이 고트프리트 켈러, 찰스 디킨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천일야화>, 샤를르 루이 필립, 크누트 함순, 테오도르 슈토름, 토머스 하디,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마테오 반델로, 페터 로제거,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등을 표절했다는 다양한 의견을 접한다. 그래서 (놀랍게도 작가 얀데라를 가장한 차페크가 스스로) 내린 결론은, “한 사람이 사악한 길로 얼마나 깊숙이 빠져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글을 쓰는 일이라나? 뒷통수 한 방 쾅!
 이건 그냥 첫 번째 이야기 가운데서도 초반에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는 대목일 뿐이다. 짧은 이야기가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읽기에 이 책에는 다양한 새옹지마 스토리가 들어 있다고 하고 싶다. 새옹지마는 새옹지마인데, 차페크 주변에 프라하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친구나 친척이 있었는지 아주 다양한 범죄자들과 경찰, 판사를 비롯한 사법기관 종사원, 배심원들이 등장하고, 흥미롭게도 스파이와 유사(흉내뿐인) 스파이, 암호해독 전문가 등,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국제적인 간첩활동도 다양하게 소재로 삼는다.
 19세기 적 신사 숙녀 이야기를 연속해서 읽다가 별 부담 없는 우화적 이야기책을 읽는 재미도 괜찮은데, 문제는 아직 읽지 않은 <오른쪽……>도 마저 읽어야 한다는 것. 재미있는 책도 연속해 읽기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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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2-24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오른쪽부터 읽고 연달아 읽기는 뭐해서 왼쪽은 말씀하신 첫 번째 작품까지만 읽고 아직 안 읽었어요. 연달아 읽지 않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요... ㅎㅎ

Falstaff 2018-02-24 14:29   좋아요 0 | URL
연달아 읽어도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