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데론다 1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53
조지 엘리엇 지음, 정상준 옮김 / 한국문화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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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5 크기에다 태권도 유단자가 아니면 결코 격파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판자 수준의 양장제본. 그래서 약 350쪽의 책이 500그램 가까이 나간다. 이런 책 네 권으로 모아 19세기, 종이 귀하던 시절에 그랬듯 빡빡하게 써 놓은 1,410여 쪽을 읽어야 조지 엘리엇의 마지막 작품 <다니엘 데론다>를 끝마칠 수 있다. 메리 앤 에반스(Mary Anne Evans)가 왜 필명을 남자 이름 조지George라고 지었느냐 하면, 몇 가지 설이 있는 바, ① 조지 루이스라고 하는 유부남인지, 애 달린 홀아비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아니 좀 묵은 표현으로,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아니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는데 당시가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에 있어서나, 문화적으로나, 지금 기준으로는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지만 하여간 도덕적으로나 절대로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은 황금기의 빅토리아 시대여서, 1854년에 그들의 동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극심해지자 이름을 ‘조지’라고 했다는 얘기와, ② 아무래도 이이가 활동했던 시기가 19세기였던 만큼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자신이 쓴 글을 독자가 보다 신중하게 읽어주기 바라는 입장에서 필명을 남자 이름으로 했다는 얘기가 (구글 검색해보니 나와)있는데, 흠, ②가 보다 사실에 가까운 거 아닐까 싶다.
 하여간 조지 엘리엇이 쓴 네 권, 8부의 소설이자, 그녀의 마지막 소설작품인 <다니엘 데론다>가 세상에 나왔을 때가 1876년, 조선이 개항을 했던 때이니 당시 영국과 유럽 문명과 문화의식을 감안해서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나는 엘리엇의 초기작품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을 읽고 단박에 이이에게 반해버렸다.

 

 

 


 건전하고 (긍정적 의미에서)완고한 영국의 시민계급의 생활과 불행의 극복을 건강하게 서술했던 것이 읽기에 좋았다. 조지 엘리엇의 다른 작품을 알아보니 그의 대표작으로 치는 건 <플로스 강...>이 아니라 <미들 마치>라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에서 ‘천 줄 읽기’ 시리즈로 나와 있다.

 

 

 

 즉 완역본이 아니라 요약본이라는 뜻. 영어로 읽으려면 ‘로즈마리 에쉬톤’이 19세기 영어를 다시 쓴 펭귄 클래식의 페이퍼 북이 있으나, 내 평생에서 징글리쉬를 쓸 일은 이미 끝났으므로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즉, 조지 엘리엇의 대표작인 <미들 마치>는 아직까진 읽을 수 없다는 것.
 이 마당에 숨겨본들 뭐할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미들 마치> 대신, 그래도 명색이 조지 엘리엇을 좋아한다고 얘기하려면 적어도 이이의 작품은 두 개 이상을 읽어보고 그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택한 책이 바로 <다니엘 데론다>였다. 표지가 하도 딱딱해서 옆으로 세워 들고 다니면 치한퇴치 용으로 아주 맞춤할 이 책의 그림은 이렇게 생겼다.

 

 

 

 

 각 권의 정가가 21,000원. 책 뒤표지에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는 우리 시대 기초학문의 부흥을 위해 한국연구재단과 한국문화사가 공동으로 펼치는 서양고전 번역간행사업입니다.”라고 씌어 있다. 마지막 단어 “번역간행사업입니다.”는 정말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인용한 그대로 썼다. 궁금해서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흠, 진짜 세금 많이 쓰는 곳이다. 한국문화사는 주로 어문학 분야에 집중하는 출판사 이름. 세금 많이 쓰는 재단과 한국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공동으로 번역해 판매해서 그런지 할인율이 0%. 그래서 위 그림 네 권을 다 읽으려면 무려 84,000원을 들여야 한다. 좋다. 작품만 좋다면야.
 <다니엘 데론다>를 읽으면서, 19세기에 이런 책을 쓴 ‘여류’작가, 조지 엘리엇의 깡다구는 정말 알아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면 당시 영국인들의 작품 속(예컨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등장하는 상속제도, 즉 아들에게만 상속권이 주어지는 한사限嗣상속 문제의 불합리성이 부각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여인에 대한 사회적 구속, 그리고 무엇보다 방랑하는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그들의 도덕, 철학적 우위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주요 등장인물을 보자.
 궨덜린. 발음하기 참 까다롭다. 그래서 다시 써보면, 그웬덜린. 훨씬 수월하다. 여자 주인공. 놀랍도록 아름다운 결혼 적령기의 여자. 첫 장면이 도박장의 룰렛에서 돈을 엄청 따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행의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감지하면서 갑자기 도박의 자신감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아니나 달라, 그간 딴 돈을 몽땅 다시 잃는다. 이어서 어머니로부터의 전보. 집안이(19세기 중반 영국의 일시적인 공황 때문에) 거덜이 났으니 즉각 집으로 돌아 오거라. 별로 돈이 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목걸이를 전당포에 팔아 여비를 마련해 출발하려는데 누군가가 목걸이를 다시 사서, 그걸 돌려받는다. 물론 치명적인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받고.
 다니엘. 이이의 정체는 직접 알아내시라. 4권, 7부에 이르러야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어찌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께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타이틀 롤을 맡은 주인공답게 전혀 돈에 구애받지 않는 부르주아에다가 학식 또한 뛰어나고, 남 안 되는 걸 눈 뜨고 보지 못해하는 인정 많은 젊은이. 백부이자 속으로는 자신의 친부일 것이라 짐작하는 준남작準男爵이 우리 나이로 세 살 때부터 키워 멀쩡한 신사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정작 준남작은 슬하에 딸만 셋을 두어 자신이 죽으면 한사상속으로 인해 모든 영지는 부도덕하고 심리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사디즘 적, 비정상적으로 비정한 조카 그랜코트에게 넘어가게 예정되어 있는 인물.
 미라. 유대인 처녀. 일찍이 부부싸움 끝에 아버지 손에 위탁되어 어머니와 오빠를 여의고 미국, 헝가리, 체코, 독일 등지로 떠돌아다니며 연극, 노래 등을 익힌 어린 아가씨. 도박에 중독된 아빠가 자신을 팔아버리려 하자 돈 몇 푼 쥐고 독일에서 탈출, 엄마와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런던으로 오긴 왔지만 완전히 괴멸. 이렇게 사느니 죽자, 싶어 치마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템즈 강에 빠져 죽을 찰라 보트를 젓고 있던 다니엘에 의하여 짧은 목숨 버리지 못해 질긴 삶을 이어가는 아주아주 예쁜 아가씨. 소설에선, 특히 19세기 소설에선 예쁜 아가씨는 대부분 마음씨도 곱다는 건 다들 아시지? 물론 발음하기 힘든 궨덜린 아가씨는 너무나 높은 콧대와 쥐뿔도 아는 거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게 몸에 밴 숙녀가 돼서 가히 재수 없는 수준이긴 하다.
 얼핏 보면 이들이 만들어가는 삼각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단순화시키기엔 조지 엘리엇의 필력이 너무 막강하다. 내 경우에 국한해 얘기하자면, 난 4권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래서 조지 엘리엇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꾸로 얘기하면? 앞부분이 읽기 쉽지 않았다. 특히 권 별로, 더욱 특별하게 제2 권에서, 조지 엘리엇이 또는 번역한 정상준 서울대 영문과 교수가 문장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균일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은 예를 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유 없이 까탈을 잡는다고 꾸중을 들을 수 있겠다.
 먼저 여러 번 읽어야 했던 문장의 예를 든다.


 “온갖 논란을 벌이는 와중에, 그녀가 그랜코트를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맺어질 사람으로가 아니라 결혼하기 편리한 남자로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자신의 결혼을 변호할 수 없는 이유에 포함되지 않는가 하는 물음으로 고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특징적인 점이었다.” (2권 224~225쪽).


 지금 다시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세기 대단히 수사적인 작가들은 이런 문장을 많이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만(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하여 귀하의 이해를 요구하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런 식), 인용한 문장은 읽기가 매우 힘들어서 그렇지 비문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문장은 더욱 아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3권과 4권도 같은 작가, 같은 역자가 썼을 것이 분명한데도 이런 모호한, 또는 난해한, 마치 n차 함수를 푸는 듯한 문장이 별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다가 아니라, 무려 열 번 이상 읽어야 했던 것도 있다. 보시라.


 “이런 상태에서는 행동에 대한 요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막연한 이미지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또한 환영의 세계에서 충동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덧없는 충족조차 거부하며 끊어진다. 이런 상태는 머리털이 희끗희끗하게 세어갈 때 종종 찾아온다. 때로는 젊은 시절의 다양한 감수성이 벗겨져 나가면서 두드러지는 엄청난 이기심의 몸통처럼 맹렬한 완고함과 집요한 습성과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랜코트는 숱이 많지는 않아도 밝고 가느다란 금발을 갖고 있고, 그의 기분이 순전히 기운이 빠져 쇠잔해진 탓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신의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나태하게 침체되거나 솜털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상태라도 뭔지 모를 부식성 물질이나 폭발성 물질이 마련될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난 어떤 인부가 아무 원한도 없이 아직 자고 있는 동료의 생명을 짓뭉개려고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린다면, 그에게는 인간의 행동을 어지간히 예상할 수 있게 해주는 습득된 동기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신사도 간접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위험인물로 만들어 그가 다음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슬프게도 동료애를 깨뜨릴 수 있다.” (2권 198~199쪽)


 특히 2권에 수 없이 등장하는 추상명사들. 몹시 많이 배운 분들은 혹시 이렇게 주장할지 모르겠다. “은유를 이해해야 한다.”고. 기억해주시라. 넘쳐, 넘쳐흐르는 은유의 강물에 독자는 드디어 빠져 죽었던 거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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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4-02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번역한 우리말 번역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