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순수 박물관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취향에 꼭 맞는 것도 아니면서 눈에 띄면 읽게 되는 작가, 오르한 파묵. <순수 박물관>은 그의 작품 가운데 일곱 번째 읽은 책이다. 1998년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을 제일 먼저 읽었고, 그 전 까지는 왠지 모르게 손이 가지 않는, 그러나 언젠가 읽어봐야 할 작가로만 생각했었다. 막상 직접 보니, 강렬한 제목을 단 <내 이름은 빨강>, 첫 장면부터 대단히 쇼킹한 것이 단박에 작품에 집중하게 만드는 놀라운 흡인력으로 그간 파묵을 읽지 않았다는 게 참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반성하게 만들어, 비록 그의 작품을 검색해 특별히 챙기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족족 사서 읽게 되더란 것. 그 후 다른 작품에서도 무수하게 재출연하는(파묵 읽어보신 분들은 뭔 얘긴지 아실 것이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새로운 인생>, <하얀 성>, <고요한 집>, <검은 책>을 연이어 찾았는데 좋은 것도 있었고 별로인 것도 있었고, 한국어 번역이 괜찮은 것도 있었던 반면, 교정 교열이 개떡인 책도 있었다. 일곱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번역을 한 이난아 선생의 노고는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이의 한국어 문장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거. 물론 파묵, 나아가 터키 문학을 우리나라에 거의 처음으로 소개하는 ‘앞 선 이’의 애로사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거, 참고로 할 텍스트가 없다는 점은 이해한다. 이난아가 비문을 만들었다는 얘긴 아니다. 주어 술어 분명하고 확실한 문장을 사용하였지만 아쉬운 점을 두 개만 들자하면, ① 주어 술어가 확실하나, 확실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기 위해 같은 문장을 서너 번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자주(‘자주’라는 주관적 서술이 애매하다. ‘일반 번역서에 비해’도 마찬가지고. 흠,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흔하지는 않게’ 정도라고 짐작하시라) 발견된다는 점. ② 우리나라 문장의 특수성 가운데 중요한 하나, ‘주어 생략’. 주격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더 잘 읽힐 경우임에도 원문에 (과도하게) 충실하여 주어 및/또는 주격대명사 ‘그’를 남발함으로 해서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더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는 것. 이 두 가지 아쉬운 점을 비단 이난아 씨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어떤 문장인지 꼭 집어서 얘기해야 하는지 좀 생각해봤는데,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해서 인용하지는 않겠다. 저·역자가 오탈자, 그러니까 교정, 교열에도 책임이 있느냐는 문제는, 내게는 좀 지루한 얘긴데, 당연하다. 책의 모든 책임은 저·역자와 출판사가 공동으로 져야 하는 법. 그러나 출판사는 개인이 아니라 법인이라서 한 객체에 대한 비난은 대개 저·역자에게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하여, 내가 주장하는 바는 모든 저·역자가 무엇보다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바로 ‘퇴고’. 내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는 책인데, 세상에 나온 다음에 출판사 교정, 교열 책임자 탓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나라의 모든 저·역자들, 제발 퇴고 좀 목숨 걸고 했으면 좋겠다.
서론이 길었다. 내가 읽은 파묵 중에서 거의 유일한 연애 소설. 베드 씬도 나오지만 불륜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파묵은 주장한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 제법 큰 회사의 사장 자리에 앉아있는 주인공 케말. 소르본 유학을 다녀온 약혼녀와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차가 멈춘 곳이 하필이면 유럽 소비재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샹젤리제 부티크’ 윈도우 앞이었다. 어여쁜 약혼녀 시벨이, 윈도우 안에 걸려있는 제니 콜롱 가방을 보더니, “아, 무슨 가방이 저렇게 예쁘지!”라고 감탄한 것이 1975년 4월 27일이었으며, 앞으로 30년 이상을 더 끌고나갈 사건도 딱 이 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많은 일도,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시작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데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걸 우린 ‘인생’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며칠 후 ‘샹젤리제 부티크’에 들른 케말은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여섯 달 동안 받은 봉급과 유사한 금액인 1,500리라를 주고, 부티크의 점원이자 케말의 먼 친척이자 며칠 있으면 케말의 애인이 될 퓌순으로부터 아, 무슨 가방이 저렇게 예쁘지! 라는 감탄을 받아 마땅한, 프랑스 수입산과 대단히 비슷한 터키 산 짝퉁 제니 콜롱을 구입해 약혼녀 시벨에게 선물로 주었으나, 시벨이 누군가, 프랑스 유학생이라 한 눈에 짝퉁임을 알아본다.
됐지? 유럽의 변방 터키와, 짝퉁 명품과, 수입 유럽 소비재 부티크의 판매원과 16세 때 18세라 거짓말하고 미인대회에 나간 전력이 있는 퓌순. 반대편에 프랑스 유학생과 진품 여부를 한 눈에 알아채는 터키의 지배적 부르주아 계급의 딸인 시벨. 이 사이에 낀 우리의 케말. 이러면 본격적인 삼각관계가 형성됐다. 케말은 시간 날 때마다 사무실을 방문한 시벨과 가죽소파 위에서 사랑을 나누었는데, 터키에선 결혼 전에 여자가 순결을 상실하는 것이 가끔가다가는 살인의 직접적 계기가 되기도 하는 사회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의식은 프랑스 유학을 한 시벨에게는 많이 완화되었겠지만 그래도 인식 속에선 여전히 혼전 순결, 혼전 경험, 혼전 동거 같은 나름의 문화흔적에 민감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물론 이런 의식에 있어서는 도시 서민으로 고등학교 졸업 학력, 판매원 출신의 퓌순에겐 더욱, 아니면 훨씬 중요한 일이었던 건 물론이겠지. 그런데 이 케말은 시벨의 처녀성을 결혼이란 얼핏 타당한 이유로 훼손한 것과 같이, 별 의식 없이 퓌순의 것도 훼손시키고 만다. 참나. 섹스라는 것이. 어떤 이들은 사랑을 해서 섹스를 하고, 어떤 이들은 섹스를 해서 사랑을 하는데, 정확한 비교는 아니지만 굳이 구분을 하면, 시벨과는 사랑을 해서 결혼을 약속한 다음 섹스를 했고, 퓌순과는 (당연히 마음은 끌렸지만) 일단 저지른 다음에 점점 사랑하는 마음이 강도를 높였다고 해야 할까. 이런 구분이 터무니없다면, 누구에게라도 운명적 만남 혹은 필연이 있어, 운명이 점찍은 사랑을 위해 평생을 걸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케말은 시벨과 퓌순 사이에서 44일 동안, 힘도 좋지, 양다리를 걸쳤고, 이스탄불의 힐튼 호텔에서 퓌순에게도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서 오라 해놓고 거창하게 시벨과 약혼식을 올린다. 행복한 모습을 연출하는 케말과 시벨을 바라보며 젊은이들과 춤을 추고는, 내일 오후 두시에, 그동안 하루도 안 빼고 만나 정을 나누던 아파트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퓌순은 처음으로 약속을 어기고 다음날부터 홀연히 행방을 감춰버린다.
퓌순이 행방을 감춘 다음에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던 여자는 시벨이 아니라 퓌순이었다는 걸 온전히 알아버린 케말. 이제부터 진짜 이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되니 더 이상의 스토리 소개는 안 될 소리다. 아, 이 말은 해야겠다. 진정한 사랑을 잃은 케말이 퓌순을 찾아 헤매며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모든 소품들, 예컨대 귀걸이 한 쪽, 담배꽁초, 석고로 만든 개 인형, 머리핀, 칫솔 등을 모아 박물관을 짓고 그 박물관에 보관을 한다는 것은 알려도 무방할 거 같다.
진짜로 2012년 4월 27일, 소설책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한지 꼭 39년 되는 날 이스탄불 추쿠르주마 대로와 달그츠 가街가 만나는 곳에 오르한 파묵은 소설에서 나오는 소품들, 예를 들어 퓌순이 피운 담배꽁초 4,213개와 그녀의 귀고리 등을 진열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순수 박물관>이 혹시 오르한 파묵의 경험담 아냐? 라고 하는 거 같은데, 내 의견을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들은 파묵한테 낚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