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반란
피터 애크로이드 지음, 한기찬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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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막 읽기를 마치고 책을 펴보니 2000년 7월 1일 초판 1쇄다. 어이가 없다. 출판사 이름이 ‘도서출판 자작’인데 그동안 창고에서 얼마나 오래 박혀 있었는지 새 책임에도 불구하고 앞표지를 열자마자 반양장 표지가 바짝 마른 자작나무처럼 제본한 본드에서 쩍, 갈라진다. 도서출판 자작에서 마지막 책이 나온 것이 2008년. 회사 망했다는 뜻이다. 쉬운 얘기로 이제 책 가게에서 품절되면 상당한 기간 동안 구입할 방법이 없으니 뜻 있는 분은 이 독후감 읽기를 여기서 잠깐 멈추고, 일단 쇼핑부터 하시라.
 이 책, 다 늙어 공부하느라 허리가 휜 동무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다가 ‘피터 애크로이드’란 이름이 눈에 띄어 얼른 사본 책. 핫따, 내 취향이다. 근데 제일 마지막에 달린 ‘옮긴이의 말’에 뭐라 씌어 있느냐 하면,


 “피터 애크로이드(Peter Ackroyd)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애크로이드는 애크로이드의 소설보다 더 난해한 인물이다. 애크로이드에 대한 평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것은, 그는 물론이고 그의 작품들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인터넷의 amazon.com에 들어가보면 그에 대한 무지에 가까운 비판과 일방적인 찬사를 접할 수 있다.)”


 흠. 기분 별로다. 이걸 읽으니 일방적인 찬사를 보내려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기껏 내 돈 주고 사서 읽고 난 다음 내가 느낀 만큼 쓴 독후감을,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쳐다보며 옮긴이 한기찬이 아주 삐딱한 웃음을 머금을 거 같다. (난 도대체 ‘기찬’이란 이름이, 참 나, 기가 차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서 책 앞날개에 씌어 있는 역자 한기찬 소개를 보면, 얼마나 잘난 인간인가 좀 알고 싶어서 그런 건데, 흠. 명문 사립대학 (국문과)나온 시인이시군 그래. 뭐 별거 아니구먼. 하여간 옮긴이의 말 가운데 저 괄호 안 비아냥거린 것이 영 캥긴다. 좋다, 신경 안 쓴다. 그냥 간다.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면,

 B.C 약 3,500년 ~ B.C 약 300년 : 오르페우스 시대
 B.C 약 300년 ~ A.D 약 1,500년 : 아포슬 시대
 A.D 약 1,500년 ~ A.D 약 2,300년 : 몰드위프 시대
 A.D 약 2,300년 ~ A.D 약 3,400년 : 의트스펠 시대
 A.D 약 3,400년 : 현재


 지금 우리는 몰드위프 시대에 살고 있다. 몰드 위프? 무슨 뜻인지 모른다. 책은 이런 경구로 시작한다.


 전인류적이고 즉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 새로운 시대에 나는 종종 우리 행성이 먼 훗날의 관찰자에게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보곤 한다. 우리 행성은 끊임없이 활동하는 하나의 국가처럼, 아니 오히려 허공에 뜬 둥근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일 게 틀림없다.

- 로날드 코르보, 『신지구론』, 2030년.


 몰드위프 시대의 끝무렵에 로날드 코르보란 인류가 태어나 활동할 예정인가보다. 그는 하여간 이렇게 썼다. 그로부터 약 1,400년 이상이 지난 작 중 현재 시점. 몰드위프 시대의 인간보더 훨씬 큰 인류가 살고 있는데, 좀 이상하다. 성castle 안에 존재하는 인류는 어려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하고, 역할대로 맡은 바 임무를 하며 생활을 한다. 성 안에는 기계도 없고,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타원을 운행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전운동도 하지 않지만 낮과 밤이 있다. 여기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키 작은, 그러나 1,400년 전의 인간과 비교하면 많이 큰 수컷 인간이 바로 플라톤. 이이는 연설가다. 과거의 역사에서 추출한 단편을 보고 그것으로 예전 조상들의 삶과 문명을 유추하는 일종의 인류학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쓴 희극작품 하나를 발견한다. 책의 제목은 『자연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 책의 어딘가에 ‘찰스 지음’이라고 씌어 있어서 일찍이 『위대한 위산』(정말로 ‘위산’이라고 씌어있다. 작가의 실수인지 역자의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실수인지는 모르겠다), 『어려운 시절』 같은 책을 낸 소설가의 자취는 있는데 찰스 다윈이란 작자는 처음 듣는 것이라 그냥 디킨스겠지 싶어 그렇게 규정하는 인류학자적인 모습. 웃기지만 1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인류를 추리하는 21세기 초반의 인류학자와 그리 다르지 않은데, 심지어 35세기에는 과학과 기계도 없는 상황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걸 당당하게 어린 백성에게 연설하는 플라톤.
 여기까지 읽으면서 흥미 있는 환상소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논문에선 작가 애크로이드를 줄리언 반스와 더불어 20세기의 샛별처럼 빛나는 영미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예를 들었다는 것이 번쩍 떠올랐다. 좀 더 읽어보자.
 그래, 주인공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플라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땅 위에서 발바닥에 흙을 묻히고 산다면, 플라톤의 거처는 저 위에 있다는 이데아. 35세기에 인류는 이데아에 거처한다는 말인가? 안 알려드린다. 이데아가 어쨌든지 간에 성벽 밖이 너무 궁금하여 견딜 수 없는 젊은 플라톤, 금기의 선을 넘어 도시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와 도시의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로 기소 당한다.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반역적인 가르침 또는 연설을 했으므로. 반역죄의 유일한 형벌은 뭐?
 여기까지. 얇은 책이다. 도저히 더 이상은 밝힐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내가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 알 것이며, 내가 그랬듯 애크로이드, 이 재미난 이름을 가진 작가가 얼마나 기막힌 상상과 은유의 죄를 범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이 책을 상찬하는 걸 비꼬고 있는 역자의 오만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지 눈이 다 번쩍 뜨일 것이다.
 단, 작품이 나하고 맞고 안 맞고는 전적으로 당신 소관이다. 낚시질에 넘어가 후회를 한다 해도 내 탓은 추호도 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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