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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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시작하기 쉽지 않다. 읽은 다음 느낌이 그냥 먹먹하면서도 해야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 무척 많은 말을 도무지 시작도 하지 못하고 화면만 바라보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좋다, 얘기해보자.
 초반에 책을 읽다가 참지 못하고 아일랜드 독립에 관한 짧은 내용을 검색해 읽었다. 1921년 12월,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지만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 혁명을 완수한 잉글랜드의 신교도 정권은 거의 대부분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었던 아일랜드인의 땅을 몰수해 신교를 믿는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양도해버려, 아일랜드 인들은 거의 다 소작농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1801년 정치적으로 완전하게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병합하자 꾸준하게 현지 소작농들이 잉글랜드 출신 지주에 대한 항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 꾸준하게 탄압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1년 12월, 아일랜드에 자치권을 허여하였으나, 여전히 원주민들은 소작농으로 기아선상을 헤맬 수밖에 없었단다. 3일 굶어서 남의 담장 넘지 않는 사람 없다고 했음에, 무려 120년간을 유럽 최악의 빈곤상태로 지내던 아일랜드 인들은 자치권 획득에도 불구하고, 자치권 획득 앞뒤로, 먼 조상이 잉글랜드에서 넘어와 아직도 지주계급으로 장원과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에 노골적인 테러를 감행하곤 했나보다.
 이 책의 앞부분도 소작인들에 의한 지주계급의 저택과 농지에 대한 방화를 당했거나 위협을 견디지 못해 나름대로 누 백년 살아온 지주 가문이 차례로 아일랜드의 토지와 저택을 처분하고 잉글랜드나 아메리카로 떠나는 분위기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자그마한 과수원과 목장을 가진 골트 가에도 세 명의 아일랜드 소작인 계급의 젊은이들이 지주의 저택에 불을 지르기 위해 한 밤에 침입한다. 대위 출신 상이군인 골트 씨는, 굳이 이들을 쏴 죽이기 위해서라기보다 방화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어적 위협사격의 의미로 그들을 향해 소총을 한 발 발사했지만, 한밤이라서 그랬는지 그 중 ‘호라한’이라는 청년(과 소년의 중간 가량)의 어깨를 맞추고 만다. 자신의 땅에 휘발유를 갖고 명백하게 방화를 위해 한밤중에 침입한 범죄자를 적법하게 총으로 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출신 지주를 향한 험악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골트 씨는 총을 맞아 삼각건으로 팔을 고정시키고 다니는 아이의 집을 방문해서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고 보상을 제의할 수밖에 없었으며, 총을 맞은 소년 호라한은 소영웅으로 읍내에서 칭송을 받을 정도의 사회 분위기. 골트 씨의 가문이 벌써 아일랜드로 넘어와 살기를 수백 년, 스스로도 잉글랜드가 아닌 아일랜드 사람으로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아내 헬로이즈 골트 여사가 완전한 잉글랜드 여성이라는 것이 부각되어, 언제 가족이 불에 타 죽을지 모른다는 집단적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족 전부가 다 그렇지는 않아서 무남독녀 외동딸 루시는 결코 자기가 사랑하는 바닷가 라하단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가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부모, 특히 가장인 에버라드 골트 씨는 루시가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자신도 가기 싫지만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다중의 힘을 과시하는 소작인을 향해 총까지 쏴서 하마터면 죽일 뻔했는데 그들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더구나 아일랜드의 목장과 저택은 그냥 놔두고(원래 부동산 좋은 점이 그냥 내버려둬도 절대 없어지지도, 닳지도 않는 것이니까), 아내가 철도회사의 주식에 박아 놓은 재산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다른 곳, 거기가 세상 어디든 간에, 불편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임에야 굳이 불안하게 라하단을 고집할 수도 없었다.
 모든 복잡한 수속을 다 마치고 떠나기 며칠 전 저녁 즈음. 아홉 살 루시는 결심한다. 집을 나가기로. 그리하여 예전 이층 다락방에 살던 하녀의 말을 기억해내고 숲속으로, 숲속으로 샛길을 따라 도로가 나올 때까지 걷다가 그만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부상으로 인해 평생 동안 다리를 가볍게 절어야 했지만), 몇 주일 동안이나 숲 속의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홀로 생존하는 데 성공한다. 그 동안, 가족들은 바닷가에서 루시가 예전에 잃어버린 슬리퍼와 겉옷을 발견하고는, 루시가 썰물 때 멱을 감으러 나갔다가 난바다로 쓸려가 익사한 것으로 단정을 해버려, 며칠 동안 바닷가 벼랑 위에서 먼 바다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골트 부부는 그동안 살았던 라하단에 정이 똑 떨어져, 남아 있는 어떤 사람도 이들을 찾을 수 없는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작은 도시에서 남은 삶을 소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부부가 파리에서 잠깐 연락을 하고 곧바로 종적을 감추자마자, 딱 그 순간에, 저택의 관리인 헨리에 의해 루시가 숲 속 외딴 곳에서 발견되는데. 여기까지.
 루시는 어떨까. 집에서 도망했다는 죄의식. 처음엔 그랬다가 점점 부모가 자신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는 미움과 한 편으로의 그리움. 돌아오지 않는 부모에 대한 서운함. 감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서 그러다가 애초에 부모와 자신을 이별하게 만든 근원인 방화미수범에 대한 분노와 끝내 돌아오지 않는 부모에 대한 고의적 무의식 적 미움. 기타 등등. 부모 입장에선, 첫 번째가 딸이 바다에 빠져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죄책감. 조금 지나면 상실감. 이어지는 우울증. 조금 더 거시적으로 생각하면, 아일랜드의 역사가 개인 가정에 끼친 영향. 작가 트레버는 전적으로 부르주아 출신인 골트 가족의 입장에서 작품을 만들어간다. 그러니 거시적으로는 생각하고 말고가 없다. 거시 역사적 배경은 그냥 1920년대 골트 가족의 이산의 불가피함을 설명하고 지금 독후감에선 밝히지 않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또 한 번 사용하기 위한 기재로 작용할 목적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루시와 골트 부부가 이산 이후 오랜 세월을 고요히 지내는 그림. 기껏해야 인간의 가슴에 상실감을 산 같은 부채로 담고 사는 세월을,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엮어가는 윌리엄 트레버. 20세기 중요한 단계를 옆으로 비껴가며 극도의 주변이었던 아일랜드의 라하단에서 칩거하는 루시와, 역시 급변의 현장을 피해 결코 눈에 띄지 않게 묻어 살 수밖에 없던 골트 부부의, 이런 단어가 어울린다면, 쓸쓸한 그림자. 그래, 이것도 이쯤에서 그만하자.

 

 


 

* 알라딘의 빅 데이터를 보면, 나는 2017년에 정영목 씨가 번역한 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고 한다. 연휴 잘 때려 놀고 난 다음에 피곤한 상태에서 읽어서 그런가, 어째 정영목의 번역문장과 단어들이 와 닿지가 않고 읽기가 매우 불편했다. 나만 그런지 그건 모르겠다. 당연히 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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