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5
에밀 졸라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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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의 샤펠 대로에서 푸아소니에르 시문市門 왼쪽에 위치한 다 찌그러진 3층짜리 봉쾨르 호텔의 2층, 대로를 면한 그나마 좀 나은 방에서 제르베즈와 랑티에 부부가 여덟 살 먹은 클로드, 네 살 박이 에티엔을 데리고 막 도시빈민의 삶을 시작할 때, 어라, 여덟 살과 네 살 아이들, 터울이 조금 심한데? 가운데 하나 더 있는 거 어려서 숟가락 놨나? 솔직히 여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아이들 사이에 자크 랑티에란 둘째 아들이 있어서 파리로 무작정 상경하면서 아이 셋을 다 데리고 가기 버거우니까, 자크를 아빠의 사촌 누나 파지 고모한테 맡겨 놓았었다. <목로주점>에 이 이야기가 나오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는다. 만일 이야기를 했다면 처음부분이 아니라 제르베즈가 모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책의 끝부분에 아이들이 돈을 벌어 조금씩 송금을 해주는 장면에 잠깐 거론을 했을까 싶다. 당연히 송금해준 아이가 자크인지 에티엔인지 아리송하다. 에티엔 아니었을까? 그래도 셋째 아이는 고생고생하며 키우긴 했으니 그놈의 우라질 정이란 게 좀 들었을 거 아냐.(미안하다, 독후감 쓰기 위해 <목로주점>을 다시 한 번 읽어볼 정성까지는 없다. 이거 써서 서재에 올리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그럼 제르베즈 아주머니한테는 아들이 셋, 씨 다른 딸이 하나, 있는 거다. 한 세대가 흘러 제르베즈의 딸 이야기는 <나나>, 첫째 클로드는 <작품>, 셋째 에티엔은 <제르미날>, 그리고 둘째 아들 자크 이야기가 바로 <인간짐승>이 된다. 이로서 제르베즈 아줌마의 아들 딸 이야기를 다 읽은 셈이다.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또 한 권의 눈부신 소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독후감에서 말했듯이 에밀 졸라의 가장 큰 특징은 “질주”다. 근데 이 <인간짐승>에선 정말로 질주하는 장면이, 그것도 독자로 하여금 읽는 도중에 ‘내가 지금 압도당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대단한 질주가 등장한다. 어디에? 작품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열여덟 칸 화물차에 술 취한 병사들을 잔뜩 실어 죽음의 전선으로 무한질주를 감행하는 열차. 어, 지금 내가 작품의 절정 부분을 얘기했네? 아, 이걸 어쩌나.
 졸라의 총서 자체가,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에서 유전적으로 가지고 잠재해 있는 특이성, 즉 자연적 요인과, 가문의 후손들이 19세기의 삶을 살아가는 환경적 요인을 섞어 당대 프랑스의 거의 모든 계급을 묘사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중에서 가문의 저주스런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 외톨이로 살아가는 자크 랑티에의 불운한 유전적 요인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생애를 그렸다.
 1970년대 여름엔 여고생들은 눈처럼 흰 교복을 빨아 행굴 때 물에 파란색(스카이 블루!) 파이로트 잉크를 반 방울 떨어뜨려 띌 듯 안 띌 듯 눈이 푸르게 부시도록 흰 상의를 입고 다녔다. 거의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매끈한 여고생의 순백의 교복과 등 뒤의 도드라진 브래지어 자국을 보면 그냥 넋이 나가 멍하니 바라보는 정도에 그쳤으나 그렇지 않은 유별난 동무도 하나 있었다. 지금은 이민 가 다른 나라 국민으로 살아 연락도 안 되지만 참 친했던 동무인데, 그 친구는 더 없이 깨끗하고 순결해 보이는 여고생의 눈부신 뒷모습을 보면 자기 손을 진흙탕에 담그고, 진흙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희디 흰 교복을 엉망으로 더럽히고 싶은 충동이 인다고 했다. 뭐 그런 충동이 이는 것, 그걸 마음속에 가지고만 있지 정말로 붉은 진흙으로 흰 옷을 더럽히지만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용인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동무도 자신의 충동을 마음으로 다스리기만 했으며, 그리하여 끝까지 정상인의 범주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위에서 말한 유전적 요인. 책의 주인공 자크 랑티에의 경우를 보면, 여성에 대한 갈증으로 시달리다가 정작 여성의 신체, 알몸은커녕 목 주변이나 젖가슴 부분을 보기만 해도 갑작스런 발열에 시달리며 해당 여성을 잔인하게 죽이고 싶어 하는 증상. 성적 흥분으로 인한 교접의 욕망을 훨씬 능가하는 살인의 욕망이 온몸과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분명한 도착증이고 정신 질환의 일종이다.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증상 아닐까? 이런 증상을 졸라는 이렇게 묘사해놓았다.


 “그것은 다른 존재, 그동안 너무도 빈번히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며 준동해왔던 그 존재, 아주 먼 조상으로부터 대를 물려 그에게 유전된, 살인에 대한 갈망으로 불타는 존재였다. 그 존재는 옛날에도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사람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지금 자크 주변의 사물들은 꿈속에서처럼 둥둥 떠다닐 뿐이었는데, 그것들이 그의 고정관념을 통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그의 일상적인 삶은 폐기 처분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과거에 대한 기억도, 미래에 대한 예견도 상실한 채 오로지 지금 강박적으로 자신을 따라붙는 욕구에 쫓겨 몽유병 환자처럼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가는 육신 안에 그의 인격은 실종된 상태였다.” (363쪽)

 

 그러나 소설 속에서 자크가 진짜로 시달리는 것은 살인욕망이기는 한데 여성에 대한, 자신을 성적으로 흥분시키려는 여성들만을 향한 살인에 대한 갈망이다. 실제로 그는 남성을 죽이려고 약속도 하고 맹세도 하지만 결코 실행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완력으로 자기보다 열등한 여성을 향한, 전형적인 ‘비겁한 사이코패스’인데 물론 <목로주점>의 제비 아빠 랑티에 씨를 닮아 잘 생긴 용모와 점잖고 신중한 언행을 겸비한 주인공을 그렇게까지 몰아가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시대의 양심이라 일컫는 졸라 선생은 이 소설을 범죄소설로 만들기로 작정을 한 거 같다. 루공-마카르 총서를 구성할 때 벌써 범죄자들에 의한 범죄소설도 구상을 하고 있었다고  하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작품에선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죽거나 죽기 위한 질주를 하는데, 자연사는 하나도 없다. 전부 살인에 의하여 죽음을 맞는 불행한 최후뿐이다.
 총 12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도저히 살인을 피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오랜만에 파리로 부부가 일을 보러와 루보 씨는 곤경에 처했던 사건을 말끔하게 처리하고, 아내 세브린은 백화점에서 행복한 쇼핑을 즐긴다. 부부는 동료가 하루 동안 쓰게 해준 아파트에서 파리 나들이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다가 세브린이 말 한 마디 잘못하는 바람에, 자신을 어려서부터 후원해준 귀족출신의 법원장 그랑모랭의 집에 들어가 마치 수양딸처럼 자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늙은이 그랑모랭의 성노리개로 살았노라 고백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남편 루보한테 두드려 맞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결혼 전 과거에, 타의로 있었던 일 때문에, 수양딸이라고 하지만 거의 하녀 수준의 성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지참금 1만 프랑까지 주며 결혼시켰으며, 유언장에 의하면 4만 프랑에 이르는 시골 영지와 저택을 유증하기로 한 전직 법원장에 대한 질투와 증오로 아내를 무지막지하게 두드려 패고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기어이 법원장을 살해하기로 결심하는 루보. 한 명 더. 아내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1천 프랑 지폐를 차지하기 위해 아내이자, 주인공 자크의 대모이자 키워준 은인 파지 고모에게 쥐약을 섞은 소금을 먹이다가 의심을 받고는 방법을 바꿔 아내가 자주 사용하는 관장약에 쥐약을 넣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러나 결국 돈은 찾아내지 못하는 고모부 등등.
 소설 속의 인물로만 보자면 프랑스엔 전부 환자들만 사는 거 같다. 이외에도 도박중독자, 알콜 중독자, 질투에 눈이 멀어 불특정 다수의 죽음 같은 건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 무엇보다, 가장 큰 죽음, 대규모 살인을 위해 전쟁터로 무수한 젊은이들을 실어 나르는 전쟁의 결정자들까지. 죽음을 향한 정신 질환자들의 멈추지 않는, 또는 멈추지 못하는 질주의 장면들. 정의가 아닌 줄 번히 알면서 진실을 불살라버리는 정책 입안자, 이 책이 발간한 시점이 1890년. 책 속에서 졸라는 벌써, 정권에 의한 진실의 왜곡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마치 4년 후 19세기 말 지식인들의 경종을 울린 드레퓌스 사건을 예감이라도 한 듯.
 격렬한 책. 졸라의 작품치고 격렬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지만 그 끝을 보여준다. 책에서 나오듯 제르베즈와(and/or) 첫 남편 랑티에 집안 남자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열광과 광기의 흐름. 그것이 어떻게, 어떤 파멸로 끝을 볼 것인가는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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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2-0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마침 이 글로 당첨! 적립금 나오시겠는데요! ㅎㅎㅎ

Falstaff 2018-02-09 14:49   좋아요 1 | URL
크흑. 정말로 돈도 나오네요.
물론 잠자냥 님보단 벌이가 좋지는 않지만요. ㅋㅎㅎ (그래도 근무시간에 짱박혀 몰래 쓴 걸로 말하자면, 이게 얼마예요, 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