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604
토마스 만 지음, 윤순식 옮김 / 아카넷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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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당신이 토마스 만의 팬이라면 당연히 읽어봐야 하며, 팬이 아니면 별로 그럴 필요 없는, 토마스 만 최후의 작품. 한 500쪽 넘게 읽다보면, 어, 이젠 슬슬 마무리로 접어 들어가야 하는데, 라는 걱정이 막 샘솟는 걸 느끼다가 550쪽이 넘으면 드디어 눈치를 채게 되니, 오호라, 중동무이로 끝날 거 같은 걱정. 그렇다. 미완성 작품이다.
 작가가 1905년 작품 구상을 해서 1954년에 <회상록 제1 부>를 발표하니, 무려 50년에 걸쳐 쓴 소설. 그러나 이런 말은 출판사가 책 팔아먹느라 하는 얘기이고, 어느 날 작가가(원래는 ‘만Mann이’ 라고 썼다가, 암만해도 읽는 분이 ‘만이? 무슨 만이?’ 등등 조금 헷갈리실까봐) 오래된 작품노트를 발견해 읽어보고 맞아, 이런 것이 있었어, 재미있군, 이야기를 보태 한 번 써볼 만한데, 라고 생각해 뒤를 이어 썼다고 봐야 한다. 이걸 정말로 가뜩이나 바쁜 토마스 만이 1차, 2차 세계대전과 스스로를 지독하게도 괴롭힌 자기 민족에 의하여 벌어진 유대인 학살을 통과하면서, 그 와중에 <마의 산>, <파우스트 박사> 등의 걸작을 쓰다가도 계속 사기꾼 펠릭스의 스토리를 구상했다는 건, 말도 안 됨. 만이 1955년에 죽음을 맞이하니 사실 1부를 쓰고 나선 손가락에 펜 들 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이 작품이 중동무이로 마감하는 미완성이라서 별 볼 일 없느냐 하면, 말이 많겠으나, 여기서 제안을 하나 하자면, 그건 책을 읽어본 사람들만 논의하기로 하면 안 될까? 내가 읽어본 바에 의하면, 비록 작품이 말끔하게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즐길 만하다는 것.
 무엇보다, 토마스 만이 코미디를 썼다는 거, 이거 한 가지만 해도 대단한 거 아냐? 주인공 펠릭스 크룰의 소년 시절이 1부인데 그걸 읽자마자 책 뒤의 작가 연표를 찾아봤다.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펠릭스는 싸구려 샴페인 공장을 하는 아버지와 보통의 엄마, 나이 차가 좀 나는 누나와 함께 사는 부잣집 외아들. 거의 날마다 씀씀이 헤픈 아빠에 의해, 동네 난봉꾼들과 파티를 벌리고 가끔가다가는 돈이 무척 드는 불꽃놀이까지 하는 집이었으니 라인 강을 낀 시골동네에선 진짜 대단한 부자였던 건데, 서서히 망조가 든다. 망조란 것이 얼른, 후딱 진행이 되면 누구나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펠릭스의 아버지 크룰 씨는, 여전히 파티를 즐기고 싶고, 파리에 있는 현지처를 가끔 찾아가 즐기고 싶은 마음이 워낙 커서, 진짜 문제를 찾아 풀기보다는 유사 이래 이 방면에 관한 한 다른 민족보다 월등한 능력을 자랑했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급전을 빌어 당장의 난관을 풀어나갔던 거다. 그리하여 드디어 거덜이 났고, 더 이상 파티와 파리의 현지처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크룰 씨는 자기 심장에다 권총을 한 발 박아버리는 편을 택했다. 남은 가족은 펠릭스의 대부代父 쉼멜프레스터 씨의 우정어린 조언대로 누이는 배우의 길을 선택하고, 엄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숙을 운영하기로 하고, 펠릭스는 학교부터 때려치우고 대부의 추천으로 파리의 가장 큰 ‘세인트 제임스 앤드 엘버니’ 호텔에 취직하여 훗날을 도모하기로 한다. 반면에 작가 토마스 만은, 내용은 좀 다르지만, 북독일 항구도시에서 부유한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다가 아버지가 죽자 곡물상회를 정리한 다음, 역시 학교부터 때려치우고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뮌헨으로 주거를 옮긴다. 소도시 부잣집 아들 → 아버지의 죽음 → 가업 청산 → 학교 자퇴 → 대도시로 이주. 어때, 좀 비슷한 거 같으신가? 작품을 구상해서 스케치 해본 것이 1905년. 그의 나이 30세. 자신의 청소년 시절하고 비슷하게 그림을 그린 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앞에서 말했다. 이 작품은 명성 높은 작가 토마스 만이 쓴 ‘코미디’ 즉, 희극작품이라고. 펠릭스는 책의 제목처럼, 소년시절부터 사기꾼이 될 대단한 싹수가 보였다. 누군가를 보고 거의 완벽하게 흉내 내는 거, 아버지 서명을 몇 번 연습해보고, 오 하느님, 이거닷, 학교 땡땡이치고 결석 사유서에 아빠 서명해 담임선생에게 내는 거, 바이올리니스트를 유심히 바라본 다음에 거의 완벽하게 운지와 운궁법을 모사해내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활에 바셀린을 왕창 발라 활이 현을 긁어도 아무소리 안 나게 만든 다음 진짜 바이올리니스트와 듀엣으로 연주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고급 휴양지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거, 열네 살에 하녀 게노베바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딱지를 떼게 해주는 거(펠릭스야, 넌 그냥 누워만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등등. 전문 사기꾼의 시각으로 보면 ‘영재’ 수준이다. 떡잎부터. 거기다 점점 자라서 청년이 되자 부드러운 금발에 창백한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만일 옷만 잘 입었다 하면) 이 남자의 외모만 보고도 기꺼이 자빠질 준비를 마치는 수준의 신체조건까지.
 기가 막힌 거짓말을 해서 (아이고, 이 대목이 얼마나 재미나는지!) 병역 면제를 받기 전에 프랑크푸르트의 젊디젊은 백수 앞에 나타난 전문직 아가씨 로짜. 그녀는 슬슬 사기꾼 계에 영재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펠릭스에게 최후의 필살기를 가르쳐준다. 바로 방중술. 이제 갓 스무 살이 됐을 뿐더러 병역의 의무가 없는 펠릭스는 당시 세계의 수도 파리로 진출한다. 비록 하루 열여섯 시간을 서 있어야 하는 엘리베이터 업 앤 다운 맨 Up & Down man에 불과하지만, 어느 옷을 입어도 광채가 나는 펠릭스의 몸에 천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대신 말끔하게 보이는 제복이 걸쳐지니, 펠릭스의 나이보다 꼭 두 배를 자신 귀부인이 나타나, 드디어 로짜를 사사한 실력을 과감하게 펼쳐 보인다. 여류작가이기도 한 귀부인을 밤새도록, 까무러치게 만들었을 거 같지? 천만에. 나이 마흔이 된 변기제조업자의 사모님이자 소설가인 우플레 부인은 다른 건 몰라도 성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아, 다른 모든 여인에겐 왕성하지만 아내 앞에서만 유독 발기부전이 되는 우플레 씨 때문에 잔뜩 욕구불만에 찼던 것을 한 방에 다 쏟아내는 데, 여기다 대고 젊음 하나 믿고 덤벼든 펠릭스, 쌍코피 나는 건 뭐 난 책임 안 져. 일찍이 파리에 입성하는 순간 세관검사 때 우플레 부인의 보석상자를 슬쩍 훔쳐 죄책감까지 있었던 펠릭스는 코피를 쏟건 말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끊임없이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 참 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토마스 만이 이런 순간(앗싸, SM이 뭔 줄 아시나?)을 묘사했다는 거, 실감 나셔? 근데 진짜다. 섹스를 포함하지 않는 사기꾼 소설을 어떻게 읽어! 그걸 토마스 만 선생께서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쌍코피 터뜨리며 밤새 녹초가 되도록 봉사한 대가로 펠릭스는 이 소설이 무진장 긴 장편소설이 될 만한 자금을 얻어내는데 성공하는데, 이처럼 순간순간 토마스 만이 다음 장면을 위해 배치해 놓는 이런 장치들, 정말 독자로 하여금 기가 넘어가게 만든다.
 독후감 쓰면서, 작품의 스토리를 써내려가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스토리를 몽땅 적어놓을 거 같다. 적당한 선에서 끝내야 하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다시 첫 얘기로 돌아가, 만일 당신이 토마스 만의 팬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하고, 아니면 마음대로 하시라. 이렇게 얘기하는 건, 책값이 보통이 아니라서. 정가가 25,000원. 허용 할인율이 10%가 아닌 5%. 그래서 현금 줘도 23,750원. 눈알 나오지? 큰 판형에 본문만 583쪽. 다 합쳐 600쪽. 다른 출판사가 이 책 찍었으면 두 권 아니었을까? 그거 감안하시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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