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9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보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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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편의 희곡이 담겨있다. 처음 읽는 스페인 희곡. 극작가 바예호는 글도 잘 쓰지만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는데 스페인 내란 때 아버지와 형이 사형당하고 자신도 공화파에 가담하는 바람에 콩밥을 먹었던 전력이 있다. 이때 감옥에서 희곡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출소를 하자마자 드라마 창작에 힘을 쏟아 제일 처음으로 쓴 작품이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이고 두 번째 작품이 <어느 계단의 이야기>이란다. 이 두 작품을 문학상, 스페인 판 신춘문예 비슷한 것에 공모를 해서 둘 다 최종심까지 가는 영광을 차지했고, 그 가운데 <어느 계단의 이야기>로 상을 받았단다. 이 정도면 한 마디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다.
 물론 반파시즘 운동으로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정부 편이었겠지만, 스페인 내전에 관한 작품들을 잘 읽어보면 공화정부군은 거의 대부분이, 아니면 적어도 과반수이상이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실제로 코민테른의 지원이 없었다면 히틀러 정권으로부터 막강한 무기와 전투기를 제공받았던 프랑코 군대에 그나마도 대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바예호의 두 작품에 일정 정도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들어 있다고 ‘옮긴이 해설’에 씌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선 사회주의적인지 자본주의적인지 그런 걸 의식적으로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그냥 인간살이를 상징하는 기호로 해석하기만 하면 된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배경은 현대적 시설을 한 맹학교다. 주목. ‘현대적 시설’을 겸비했다는 건 이 맹인 학교가 맹인 가운데서도 다분히 부르주아 성향을 갖춘 부잣집 자재만 다닐 수 있는 기숙 사립학교란 얘기. 학생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최상급의 의상으로 꽉 짜진 드레스코드를 지키고 있으며, 이들이 비록 맹인들이지만 자신이 빛을 감지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거리에서 학교로 들어서는 순간 이들의 더듬이 역할을 했던 지팡이를 휙 내던지고 완벽하게 학습된 공간 안에서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정상인과 다름없이 즐거운 학교생활을 누리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선천성 맹인. 낳자마자 맹인인 상태라서 빛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도대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다. 그냥 그런 맹인들의 에피소드라면 당연히 드라마가 아닐 터. 이런 상황에서 역시 선천성 맹인 소년 이그나시오가 이 유쾌하고, 언제나 즐거움이 넘치는 행복한 학교에 들어오면서 사건은 벌어진다.
 불행의 근원은 거의 언제나 호기심. 이그나시오는 절대로 행복하지 않다. 아무 어려움 없이 학교 안을 보행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아 지팡이를 버리려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그나시오는 불행하다. 본다는 것, 사물의 형태를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망막 앞에 펼쳐진 어둠과 거의 똑같다고 들은 밤하늘, 그 속에서 무수하게 반짝이는 별은 과연 어떻게 반짝인다는 것일까, 별이라는 건 얼마나 아름답기에 숱한 시인들의 찬미를 받아왔을까, 이 모든 것을 알 도리가 없어 이그나시오는 불행하다. 그의 불행과 우울은 천천히 그러나 급기야 나머지 학생들에게도 전염되어 그리도 즐겁던 학생들 사이에 빛을 보고 싶어 하는 학생들과, 여태까지의 즐거움을 계속 누리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무리가 생기고, 자연스레 본다는 것의 궁금증과 못 본다는 것의 불행을 체감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많아진다. 못 보는 것에 대한 불안. 여태까지는 쾌적한 공간이었지만 새로 생긴 사소한 장애 하나만 있어도 보행에 방해를 받아야 한다는 불안. 언제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1)하는 것이라 학교 내에서 이그나시오의 위상은 급기야 교장을 능가하고 많은 여학생들마저 그를 사랑하게 되거나, 남자친구가 이그나시오를 추종하느라 아름다운 자신을 멀리하는 것을 느끼고는 질투를 감추지 못한다. 그 정도다.
 작용이 있으면 뉴턴의 제3 법칙에 의하여 반작용이 있는 법. 누군가는 이그나시오에게 대단한 반감을 지닐 수밖에 없고, 여태껏 누렸던 지위를 여전히 누리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으며, 이들이 행위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처음엔 이그나시오 본인이 원했지만 자신들의 만류로 그리되지 않았던 것, 이그나시오 스스로의 발로 학교를 나가게 만드는 일. 근데 어떻게? 이미 맹인인 교장선생이 앞을 볼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한 이유가, 부인 도냐 페피타가 정상인과는 도저히 결혼할 수 없을 대단히 못생긴 여성이기 때문이리라는 걸 학생들에게 공포해버린 이그나시오. 어째 결말이 불안하시지? 그래, 당신 생각대로 된다. 하지만, 당신 생각대로 된 다음이 문제이자 진짜 중요한 결말. 그건 안 알려줌. 이래봬도 바예호가 20세기 스페인 드라마의 거장이라, 진짜 중요한 결말은 읽는 사람이 스스로 내려야한다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두 번째 작품은 <어느 계단의 이야기>. 제목이 ‘계단의 이야기’라고 해서 계단을 의인화, 첫째 계단이 둘째 계단에게 수다를 떨고, 둘째 계단은 거기다 살을 붙여서 셋째 계단에게 전하고 셋째는 넷째에, 넷째는 … n번째는 n+1번째에…, 이런 거 아니다. 스페인의 중하류층이 사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아파트 주민들이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소, 계단에서 이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하고, 어려운 것을 도와주고, 이해하고, 오해도 하고, 질투도 하고, 싸움도 하고, 연애도 하고, 애부터 일단 하나 만들기도 하고, 이리 사는 모습을 그린 것. 그렇다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만 열라 떠올리시면 곤란하다. 이 작품이 앞에 소개한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를 누르고 1등상을 먹은 작품인데 그리 녹록하겠어?
 무대는 1막이 1919년, 2막이 1929년, 3막은 1949년의 같은 장소로 되어 있다. 그러면 1막에서 청소년기를 맞은 이들이라면 2막에선 찬란한 성인으로 삶의 전성기, 아니면 가장 비참하고 남루한 부적응을 겪고 있을 것이고, 3막에선 잘하면 할머니,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스페인 언어를 쓰는 인류들이 애 하나는 얼른 얼른 낳는데 선수잖습니까? 이 정도면 대강 그림은 그려질 것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 두 작품 다 스토리를 써놓으면 돈 주고 책 사 본 보람이 없어서.
 다만 하나. 두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949년. 스페인에서 프랑코 파시즘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라서 바예호는 정부의 무지막지한 검열을 여러 가지 우회적인 방법으로 피해가야 했을 터. 그리하여 아시아 사람으로는 알아채기 힘든 코드가 숨어 있는 거 같다. 난 그런 묘사가 어디에 있는지 별로 감을 잡지 못했으나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를 읽으면서는 며칠 전에 독후감을 쓴 자먀찐의 <우리들>에서의 규격화된, 자유 없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과 비슷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음을,




1)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무지 지루한 영화의 제목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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