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집 -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3인 시집
박목월.조지훈.박두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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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불허전.
 지금시대, 21세기에 이처럼 시를 쓸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고, 써서도 안 되겠지만, 70여 년 전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갖지 못한)신생국이자 신탁통치를 받는 후진국에 이런 서정시인들이 있었으며, 지금 그들의 시를 읽는다는 일이 이렇게 감격적일 수가 있을까. 고백하노니, 이들의 시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것 말고는 겨우 하나나 둘 정도만 읽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허세를 부려왔다.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있는 사람치고 <청록집>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 그러나 진짜로 <청록집>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40여년이 더 필요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창피한 것인지, 이 시집을 읽어보고 절감했다.
 ‘술 익는’을 어떻게 발음하는 것이 맞는지, 이때 일어나는 현상을 무엇이라 하는지 만을 배웠다. ‘술 익는’은 ‘술링는’으로 발음해야 하며 기억이 까마득하지만 억지로 끄집어내면 아마도, 자음 첨가, 연음법칙, 자음접변 상호동화 이런 거 같은데, 이 시어가 나오는 시 <나그네>가 지훈의 시 <완화삼>의 답시라는 건 몰랐다.



玩花衫

 ―木月에게―


 차운산 바위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우름 운다.


 구름 흘러 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이냥하여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완화삼玩花衫이 무엇인지는 사전을 찾아보시라. 그리고 다시 시를 읽어보면 무릎을 탁, 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먼저 지훈이 목월에게 헌시를 바치자, 목월의 답시가 탄생하니,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芝薰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렇게 나오는 거였다. 내가 이들의 시를 배운지 아무리 오래됐다고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앞에서 목월, 지훈, 혜산의 시의 특징 같은 것을 이 자리에다 써놓는 파렴치한 짓은 하지 못하겠다. 그리하여 책 이야기나 하겠다.
 책은 1946년 6월 6일, 초판이 을유문화사에서 나왔고, 놀랍게도 2006년, 60년이 지나야 중판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다. 내 책은 2016년에 찍은 중판 11쇄. 초판은 예전 책이 다 그랬듯, 책갈피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고, 문장도 종縱으로 썼다. 60년 동안 문법도 바뀌고, 단어 자체도 변하여, 이제 70년 전의 시를 읽기 위해서는 새 편집이 필요하다. 시에 나오는 한문을 한글로 바꾸고, 지금 표기법으로 편집한 중판의 뒤편에 놀랍게도 초판을 찍을 때의 원래 시가 전편 수록되어 있다. 여전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피를 넘기며 종으로 쓰인 문장을 한 채. 아, 이러니 내가 을유문화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내 경우엔 옛 표기가 그리 낯설지 않아 책을 뒤집어놓고 갈피를 왼손으로 넘기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정말 멋있는 광경이지 않나!
 혜산 박두진의 시를 한 번 읽어보자.



 墓地頌

 


 北邙 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속 어둠에 하이얀 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ㅅ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太陽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메ㅅ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군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었네.



 박두진의 시 가운데 <묘지송>이 가장 좋아 여기 쓴 것이 아니라 제일 짧은 시라서 옮겼다. 세 사람의 사진을 보면 박두진과 조지훈이 힘 좀 쓰게 생겼고 (지훈은 반도가 알아주는 술꾼이기도 했으며), 박두진은 피골이 서로 붙어 좀 빌빌할 거 같은데, 사람은 생긴 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박두진이 제일 오래 살고, 지훈이 가장 짧은 생을 살았다. 참, 인생이란.
 서재 친구분들이시어, 지나가는 과객님이시어, 진정 말씀드리니 미욱한 나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하루라도 서둘러 <청록집>을 즐겨보시라. 크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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