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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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먀찐. 이름은 족히 들어보았으나 어째 손이 가지 않던 작가. 보관함에 오랜 세월 들어 있다가 이제야 겨우 일독을 했다. 이번에도 많이 망설이다가 석영중의 번역을 믿고 그냥 한 번 읽어본 건데, 이럴 경우 흔히들 이렇게 얘기한다. 대박.
 진짜 자먀찐이 대단한 건, 이 소설을 1920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표했다는 것. 작가가 18세에 이미 볼셰비키 당에 입당을 하고 일찌감치 유배생활도 경험한 소위 혁명가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1920년, 러시아혁명을 마치고 남쪽에선 카자흐 반란군과, 동쪽에선 백계 러시아 반혁명군과 내전에 여념이 없어서 전 인민이 기아와 추위에 내몰리고 있던 시절이다. 러시아 문학판에선 <어머니>를 쓴 막심 고리끼를 필두로 우리도 잘 아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 등이 사회주의적 명작을 쏟아내던 시기였다. 문학도 당연히 혁명에 이바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 했던 것이다.
 이 빛나는 새로운 세상에 자먀찐이 등장해 <우리들>을 써서, 쓴 걸 그냥 보관한 것이 아니라, 비록 소련 밖의 영토일망정 러시아어로 발표해버렸던 거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소설 <우리들>이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시려나?
 ‘미래 소설’이다. 한 30세기쯤의 지구. 전 지구인구의 80%를 희생시킨 2백년 전쟁을 끝내고 세계는 단일국가로 통일됐다. 위대한 영도자 ‘은혜로운 분’의 치하에서 초록색 벽을 높게 둘러친 거대국가는 벽 안에서 오직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자유를 포기했다. 전 국민은 이름 대신 번호가 주어져 주인공 D-503, 그가 사랑하는 여인 I-330처럼 불리며, 작가는 이들을 ‘인간’ 혹은 ‘국민’으로 칭하지 않고 (20세기 사람의 시각에선) 냉정하게 ‘번호’라고 말한다. 국가의 모든 번호들은 같은 시간에 울리는 경종으로 침상에서 일어나 석유추출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며 주어진 노동을 일정시간 해야 한다. 갑이 을과 섹스를 하고 싶으면 적절한 서류를 제출하여 승인을 얻어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몇 분 동안 관계를 맺는데 임신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걸리면 사형이여!). 수없이 많은 대형 강당에 매일 몇 시간씩 모여 위대한 영도자의 말씀과 번호들의 진정한 행복과 이성과 과학에 대한 강연을 들어야하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번호들은 같은, 적어도 상당히 비슷한 사고를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번호의 행복을 위한 이런 조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일부 지각없는 것들은 진공 튜브 안에서 일종의 (고통 없는) 고문 또는 취조를 거친 다음 수만 볼트의 전압을 흘리는 은혜로운 분의 손끝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것이 ‘인간’이 수행한 소위 ‘마지막 혁명’의 결과이다.
 ‘마지막 혁명’이라는 건 한 마디로 더 이상의 혁명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애초부터 변증법의 무한 고리에서 벗어나는 허위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실험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번호를 부여받은 인류는 초기부터 번호의 행복을 위한 인간의 기계화에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에.
 그러나 국가를 둘러싸고 있는 초록색 벽의 밖에는? 얼굴의 일부를 제외하고 온몸에 털이 숭숭 난 (그렇게 진화한) 또 다른 인류가 벌거벗은 채 살고 있다. 이들은 폐허로 변한 광막한 벌판에서 추위와 기아에 노출되고 있으나 거의 무한정의 자유를 향유한다. 당연히 서로 눈이 맞으면 자유로운 ‘액체교환방식’에 의하여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하고 양육한다. 아울러 벽 안의 신인류, 즉 모든 번호들 속에서도, ‘비이성적이고 불안정하고 불쾌하고 위험스러운’ 자연의 흔적을 지워내지 못한 번호가 있기 마련이어서 지금 주어진 행복과 감시와 통제 아래의 것들이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일찌감치 알아챈 번호들이 있어, 마지막 혁명 이후에도 또 다른 혁명이 존재함을 입증하려 한다. 자유롭게 사는 벽 밖의 인류와 함께.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자먀찐이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이 1920년. 소비에트에서 이제 막 발생한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한지 불과 3년차. 작품을 쓴 기간이 1년이라고 치면, 공산 혁명 2년차에 자먀찐은 이미 공산주의 또는 볼셰비키 또는 레닌 치하의 정치체계를 보고 앞으로 레닌에 이은 스탈린 등의 권력구조와 또 다른 획일화의 미래를 예상한 것이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죽고 싶어 환장을 하다’라고들 하는데, 이런 생각을 소설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작가의 숙명이다. 완벽한 통제와 세뇌. 자유의 박탈. 주장하는 바는 국민들의 행복을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어느 경우나 국민, 소설의 경우 ‘번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즉 독재자의 영구 집권을 위해서이다.
 이 훌륭한 소설을 읽으면서 난 도스토옙스키의 몇 작품을 떠올렸다. 주인공 ‘나’ 즉 D-503이 번호들에게도 영혼이 있을 수 있고, 영혼이 틈입한 번호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병균에 감염된 상태인데, 자유라는 것 혹은 자유의지가 생기자마자 D-503은 일종의 섬망 상태로 빠져든다. 그런데 놀랍게도(사실은 나로 하여금 우쭐하게 만들게도) 석영중의 ‘역자해설’에서도 도스토옙스키를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2X2=4의 반복적인 사용과 『대심문관의 전설』에서의 행복과 자유의 관계, 대심문관과 ‘은혜로운 분’의 유사점 등을 예로 들었지만 일반 독자에 불과한 나는 대심문관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또는 드미트리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와 유사하다는 생각만 했을 뿐. 석영중에 의하면 자먀찐의 <우리들>이 뒤에 나올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오웰의 <1984>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럴 만하다. (둘 다 읽어봤지만 신기하게도 <1984>는 스토리조차 완벽하게 잊었다. 아마 오웰을 혐오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어서, 오직 이 이유 하나만 가지고, 아직도 이 책이 독자에게 큰 효용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지극히 불행하게 아직도 유효하다. 지금 역시 <우리들>에서 나오는 ‘단일제국’은 전 지구적으로 존재한다. 다만 정치형태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형태를 갖춰서. 물론 제3세계 일부에서는 아직도 절대권력을 향유하는 독재자가 있겠지만 세계적으로는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대신, 거대기업 내부에서는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체제가, “능률”이라는 이름으로, “성과의 배분”이란 행복을 보상으로, 행해지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은 이 체제, 즉 거대기업의 조직적 능률과 행복 대신 자유롭고자 하면 언제든지 ‘체제에서 벗어날 자유’가 개인 또는 ‘번호’에게 주어진다는 것. ‘체제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선택하는 ‘번호’들에겐 죽음 대신, 벽의 바깥, 황량한 정글 아니면 사막으로 던져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자유를 원해 벽의 바깥으로 나왔건, 아니면 ‘은혜로운 회장님’의 사형집행으로 처리가 됐건, 이런 ‘번호’들을 우리(또래)는 대충 ‘닭 튀기는 인간’으로 부르기도 하고 뭐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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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2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3이요..... 누군가 503이라는 숫자로 연상되는 관념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바람에 ˝주인공 D-503과 그가 사랑하는 여인 I-330˝이라는 대목에서 어떤 사람 두 명을 떠올리고 말았네요.

옛날에 읽었는데 <1984>와 <멋진 신세계>, <우리들> 중에서 전 이 작품이 제일 좋았던 기억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17-12-21 10:23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 그림은 그려지는데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좋은 그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 부디 좋은 그림이었으면....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왕자 2022-02-09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리뷰를 보고 있는데 긴 리뷰를 이렇게 집중해서 읽기는 처음이네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2-02-09 06:06   좋아요 0 | URL
좋은 마음으로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