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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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넘겨 본문으로 접어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출간에 부쳐”란 작가의 말이다. 흥, 작가는 처음부터 독자가 속아 넘어가기 바란다. 진짜로 이 작품이 자기 친구의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쓴 일기인 것처럼 꾸미는데 여념이 없다. 뭐 정말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구라일 걸? 그러나 이 서문 비슷한 작가의 말 역시 다니엘 페나크의 재미난 소설 <몸의 일기>의 일부라고 읽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지는 않고, 글쎄 좋은 일도 아니고, 그래, “나 책 좀 읽은 몸이야”라고 폼 잡을 데만 효과가 있겠다. 왜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면, 어느 날 작가의 ‘리종’이란 이름의 여자친구(애인 말고 그냥 친구 있잖아, 친구)가 눈을 벌겋게 하고 찾아와 며칠 전에 세상 뜬 평소 근엄하기 이를 데 없던 자기 아버지의 유물인 ‘몸에 관한 일기’를 좀 읽어보라고 했단다. 리종의 눈을 보니까 밤을 패서 아빠의 일기를 읽은 듯해서 그러마고 하고 반듯한 글씨로 쓴 일기책을 열어보고는, 에그머니, 너무 재미있는 거라, 자기도 꼴딱 밤을 새워 읽고나선 책으로 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도 읽어보게 했다는 거다. 이렇게 초를 쳐 놔야 책, 특히 프랑스의 1923년 10월 10일 생 교육 잘 받은 인텔리 남자의 일기가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한테 먹혀들 수 있단 얘기지. 그런데, 굳이 잘난 척하느라 나처럼 이리저리 골 아프게 따질 필요는 없다. 작가가 말한 대로 그냥 그렇구나 하며 읽는 것, 즉 작가의 의도대로 따라 읽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독법일 것이긴 하다.
 아빠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독일군의 독가스를 흠뻑 자시는 바람에 허파에 큰 문제가 생긴 채 귀환한다. 어디서 본 거 같다고? 그려, <티보 가의 사람들>에서 티보 가의 맏아들 앙트와느 역시, 동생 자크가 그토록 반대했던 1차 세계대전에 의무장교로 참전해 독가스 중독으로 생을 마감한다(이 책은 꼭 읽어보셔야 혀!). 여기서 작가는 기가 막힌 꼼수를 부리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일기의 주인공 ‘나’의 아빠(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는 부친을 “아빠”라고 호칭한다. 여든이 훨씬 넘어서도)가 원래부터 대단한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지긋지긋한 여자인 엄마가, 오랜만에 악당 여자로 등장해서, 아빠와 나를 들들 볶아내는 와중에도, 몸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를 덮은 아빠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나의 지성과 감성을 놀라운 속도로 향상시키는 것이다. 아빠가 죽은 다음 입학한 학교에서 교사들이 '나'가 쓰는 단어와 똑 부러지는 문법, 문장에 기가 막혀 하는 수준. 어린이의 지성으로는 사실상 지독하게 예외적이고 그래서 비정상이지만, 왜 이렇게 설정을 했을까. 사실 이런 거 자꾸 따지면 재미나게 책 읽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만, 한 말씀 올리자면, 그렇게 해 놓아야, 또래에 비해 놀라운 지성과 글 쓰는 실력과 습관이 있는 것이 타당하고, 어려서부터, 십대 초반부터 자기 몸을 탐구하는 목적,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사변적 일기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적어나가는 일기를, 거의 지적인 어른의 솜씨로 써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가 12세가 되어 이제 보이스카우트 대원으로 캠핑을 가서 모의 전투를 하다 포로가 됐는데 적군은 나를 나무에 묶어 놓고 철수를 해버렸다. 숲 속에 인적은 없고, 정적 속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들리고, 아니, 그것보다 묶인 내 두 발 일 미터 앞에 뚫려 있는 개미굴에서 개미들이, 바글바글 수백만 수천만의 개미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어서, 어느 순간 그것들이 내게 접근하더니 내 몸의 모든 빈 곳에 침입해 나를 자디잘게 뜯어 먹을 수 있겠다는 공포가 엄습했고, 하필이면 순간 개미 두 마리가 발끝에서 시작해 다리 위로 기어오르는 거 아닌가.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이 배운대로 절대로 풀 수 없는 매듭으로 나를 나무에 묶어 놓았고, 대원들의 인기척은 아무 곳에서도 들리거나 보이지 않고, 개미의 침략과 포식에 대한 극한 공포는 얼마 살지 않았지만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크고 높은 비명을 지르게 했으며, 눈앞이 완전히 깜깜해지고 머리통은 빙글빙글 돌며 귀까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하자, 순간, 그만 바지 속에다 그대로 똥까지 싸놓았던 것이다. 아, 그 쪽팔림이라니! 차라리 숨을 멈춰 죽는 게 났겠다고 생각했으나 절대로 숨을 멈춰 죽음에는 이르지 못하는 나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완벽한 절망 속에서, 열두 살의 소년이 끔찍하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결코 한 번도 엄마를, 나를 직접 낳아준 엄마를 외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고, 캠프장에서 날 데려온 엄마 역시 보름이 지나도 화를 풀지 않은 채 욕실의 거울 앞에서 내 어깨를 아프게 쥐고는 “거울을 봐, 네 모습을 보란 말이야”라고 날 흔들어댔으나, 내 눈꺼풀은 절대 열리지 않았다. 나무에 묶여 비명을 지르며 똥을 싸지른 다음 날부터 나는 내 몸, 오직 내 몸의 현상에 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죽을 때까지 75년 동안.
 책에서 ‘나’는 1920년대 초반 태생으로 요즘 부모처럼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으로 시리얼을 먹을 수 없는 세대. 반드시 세수와 면도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나서야 아침 식탁에 앉을 수 있으며, 구스타프 말러를 좋아하는 척하지 않으면 지식인 그룹에 포함될 수 없었던 첫 세대는 가히 초기석기시대의 인류였으며,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레지스탕스 조직에 들어가 왼팔을 거의 잃을 뻔한 부상도 당했으나 ‘팡슈’라는 활달한 여자 레지스탕의 도움으로 정상을 되찾았고 영광스럽게도 드골 장군으로부터 레지스탕스 활동의 보답으로 훈장까지 받았다. 이후 학술연구를 계속하다 대기업의 그룹 전체 인사담당 사장 정도의 자리에 있다가 은퇴하고 늙어죽는 인물. 한 마디로 평생 잘 닦인 곧은길을 곧바로 걸어간 복 받은 인간. 대강 그림이 그려지시지?
 그러나, 이런 호강에 겨운 인물도 허약한 몸을 근육으로 만들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규칙적으로 했으며(쉬울 거 같지? 한 번 해보셔. 하루도 빼지 않고 말씀이야), 어느 날 어려서부터 날 직접 키운 거나 마찬가지인 비올레트 아줌마의 말에 의하면 분수 가에 풀이 돋고(생식기 주위에 털이 났다는 뜻), 조르주 삼촌의 설명에 의하자면 이제 본격적인 남성으로 자격이 생긴 기념할 만하게, 아침에 일어나니 내복과 담요에 빳빳하게 풀이 먹여져 있었으며, 그때부터 여인을 향해 날마다 숨 막히는 갈증에 시달리고는 했다가, 한 명의 레지스탕으로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갈증을 참아가던 어느 날,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고,  전시엔 야매 의사였던 팡슈가 준 그간의 노고에 대한 선물로 건네 , 아름답고 포동포동한 육체를 가진 퀘벡 출신의 용사 쉬잔에 의하여, 드디어 딱지를 뗀다.
 일기는 이후 자잘한 종용의 발견과 제거, 이러저러한 과정을 걸친 결혼과 출산, 노화, 노화의 심화, 백내장과 수술 후의 개안, 또다시 노화, 계속되는 노화에 따른 몸의 변화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한 남자의 몸. 그 세계.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여성들이 좀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했는데 그건 뭐 전적으로 독자들 마음이니 굳이 권하지는 않겠다. 그동안 숱하게 읽은 일기체 소설들. 그것들의 공통점은 거의 감성적인 일기다. 감성적인 일기가 아닌 몸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 그러나 일기라는 형식이 어쩔 수 없이 포함하는 사적인 감정이 일부 들어간 소설. 이렇게 얘기하니까 별로 재미없을 것이라 생각하실 수 있지만, 천만의 말씀. 무지 재밌다. 하루에 완독은 백수가 아닌 현대인으로는 불가능에 가깝겠으나 길게 잡아 하루 반이면 485쪽 거뜬하게 독파할 수 있게 곳곳에 지뢰를 묻어 놨다. 전시에 ‘나’의 별명이 지뢰. 지뢰가 터져 왼팔이 거의 날아갈 뻔해서 팡슈가 ‘지뢰’라는 별명을 붙였다나.
 여기서 나오는 재미난 장면 하나 소개한다. 이게 제일 재미나서가 아니라 짧아서 옮기는 것일 뿐이다.


 “사모님도 스트링을 입고 있지 않나요?
 뭐라고요?
 스트링 말이에요, 끈으로 된 팬티요. 클로델이라면 ‘정오의 분할’이라고 불렀을 만한 옷이죠. 브라질 사람들은 또 ‘치실’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고.“  (414쪽. 클로델은 프랑스의 극작가)


 더 재미난 에피소드도 많이 나온다. 남자들 소변보는 얘기 마누라한테 해줬더니 껌벅 넘어가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작가 페나크의 솜씨가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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